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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격투천재-322화 (322/398)

◈ [322화] 지하 (5)

에단은 지루한 이동에 늘어져라 하품을 내뱉었다. 지상에 있을 때 어느 정도 마술에 단련이 되었기에 허벅지는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에단은 시선을 돌려 말을 바라봤다.

육식성인 이곳의 말들은 바실리스크의 살과 피를 잘 먹었다.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면서 으적으적 씹는 모습이 꽤나 신선했다.

이번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탁한 하늘은 답답하다는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태양은 보이지 않았고, 달도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았다.

낮과 밤의 경계가 흐리다.

흐릿한 게 조금 걷히면 낮 같기도, 다시 안개가 엄습하면 밤 같기도 했다.

숨통이 막히는 끈적한 공기는 덤이었다.

모래가 낀 것처럼 텁텁하고 꺼끌거리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있는 것이라고는 시원한 물이 아닌 뜨뜻미지근한 피가 전부였다.

전사들은 잘도 피를 마셨다.

‘피가 있으니 꽤 편하네.’

마을로 가는 길은 황량하고 메마른 벌판뿐이었지만, 마수들의 출몰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전사들이 챙긴 바실리스크의 살점과 피 때문이었다.

강대한 마수의 피 냄새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수의 접근을 방지한다.

과시를 좋아하는 이는 바실리스크의 피를 얼굴에 치덕치덕 바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네빌라가 꾸짖었다.

“귀한 식수를 함부로 낭비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얼굴에 피를 바른 전사가 바로 사과했다. 그 모습을 통해 네빌라가 전사들 사이에서 가진 입지를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꽤나 신용을 받고 있군.’

이곳의 전사들은 지상보다 훨씬 원초적이었다.

수인들이 지내는 북부보다도 훨씬 척박한 화경에서 살아간다.

애당초 바실리스크라는 괴물을 사냥하려 토벌대를 꾸린 것부터가 이곳 전사들의 실력을 유추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죽은 나무가 있어서 다행이군.’

만일 죽은 나무가 없었다면 중간에서 객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바실리스크와의 혈전에서도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상의 마나는 이곳에서 사용할 수 없었으니.

‘지하 놈들은 잘만 쓰던 것 같은데.’

에단은 자신이 상대해 온 군주들을 떠올렸다. 군주들은 힘의 제약은 받았을지언정 힘이 봉인되지는 않았다.

에단이 죽은 마나를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페온에게 위험하다는 경고는 들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기운의 운용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것은 흑마법사인 오르번과 언데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뭔가 이상하네.’

뭔가가 거슬렸다.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상황.

찝찝했다. 그때 에단의 머릿속에 오르번의 말이 떠올랐다.

― 너는…… 인간이 맞느냐?

인간이 맞느냐는 질문.

에단은 여러 기연들을 닥치는 대로 흡수했다.

모든 걸 원해서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상황이 어찌 흘러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과적으로 에단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과한 힘을 얻었다.

과한 힘은 부작용이 따르지만, 당시에는 방법이 없었으니 후회하진 않았다.

힘을 얻지 못하면 그곳에서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에단은 무사히 힘을 흡수했고, 죽은 것은 적들이었다.

에단은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에단이 물 대신 피가 차 있는 가죽 주머니를 열어 입으로 가져갔다.

녹진한 피가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 갔다. 맛은 짭짤하기도 했고, 어딘가 비릿하기도 했다.

‘그래도 뭐……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하네.’

에단이 실소를 터트리며 앞을 바라봤다. 여정은 길고 지루했다.

*   *   *

에단과 전사들은 그렇게 며칠을 쉬지 않고 이동했다.

에단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았다.

전사들이 때때로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보기는 했지만, 에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긴 여정 끝에 드디어 저 멀리 마을이 하나 보였다.

“보이는군.”

네빌라가 말에 에단이 부스스 일어나며 눈을 비볐다.

눈매를 좁히며 정면을 바라보자 마을의 윤곽이 눈에 보였다.

“오.”

에단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루하기만 한 여정이 끝을 보이니 기뻐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에단의 반응을 지켜본 네빌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소란을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말이지.”

“퍽이나 무섭네.”

에단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틈틈이 이들의 대화 내용은 들었다.

이번 토벌은 마을의 병력을 대부분 투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십에 달하는 전사들. 모두가 정예병이었다.

보초를 설 전사들은 마을에 남아 있었겠지만, 에단은 이미 이들의 무력 수준을 알고 있었다.

‘한 몸 간수하는 건 일도 아니야.’

에단은 충만한 기운을 느꼈다.

바실리스크의 생명력을 흡수하면서 어떤 능력을 얻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툭툭.

에단이 손가락으로 피부를 두드렸다. 일반적인 피부랑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의식을 집중하자 비늘 같은 형상이 피부에 돋아났다.

‘으, 더럽게 징그럽네.’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능력은 확실했다.

에단은 자신 있었다.

여기 있는 전사를 모두 상대할 자신이.

“…….”

네빌라와 전사들이 흉흉한 눈빛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에단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시선을 흘려 넘겼다.

에단과 전사들이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은 변변찮았다.

낮고 얇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내부에 있는 집들은 거의 다 천막이었다.

천막은 언제든지 철거할 수 있는 구조로 보였는데, 아무래도 이들의 특성 탓인 것 같았다.

‘유목 민족 같군.’

말을 타고 다닐 때부터 얼추 느낌이 왔다. 피부색을 제외하면 외향은 엘프들과 흡사했지만 습성은 완전히 달랐다.

엘프들은 숲에서 나고 자라며 거의 일평생을 자기가 지내던 숲에서 살아간다. 자연을 사랑하고, 지키는 일족이 엘프들이었다.

르니엘은 에단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숲에서 나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특수한 경우였다.

대다수의 엘프들은 자신이 살던 고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연친화적인 건 비슷하군.’

허접한 목책을 본 에단이 피식 웃었다.

“……네빌라님? 복귀하신 겁니까?”

“그래.”

네빌라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초를 서던 전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 어떻게 되셨습니까? 바실리스크는…….”

전사의 질문에 네빌라가 복잡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네빌라의 표정을 읽은 전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표정을 보니 실패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바실리스크의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 그것이 정말입니까?”

전사의 표정이 매우 밝아졌다.

그는 에단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목책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목청껏 소리쳤다.

“네빌라 님이 바실리스크를 처치했다―!”

“그게 정말이야?!”

“전사들이 돌아왔다고?”

보초병의 우렁찬 외침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은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걸치고 있었고, 전사들은 수치심과 자괴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한숨을 내쉰 네빌라가 말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에단을 응시하며 손짓했다.

“너도 내려와라.”

“그러지 뭐.”

에단이 말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장시간의 이동 탓에 몸이 뻐근했다.

이리저리 몸과 허리를 풀자 우두둑거리는 뼈 소리가 났다.

네빌라가 마을에 들어서며 말했다.

“바실리스크를 처치한 건…….”

“잠깐.”

에단이 네빌라를 불러 세웠다. 네빌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에단을 응시했다.

“뭐지?”

“바실리스크인지 뭔지 잡은 거. 너희가 한 걸로 하자고.”

“……뭐?”

“괜히 복잡해지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아서.”

“지금 나를 동정하는 건가?”

네빌라의 눈빛이 매서워지자, 에단이 씨익 웃었다.

“불쌍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감히.”

네빌라의 손이 칼자루 쪽으로 향하자 에단이 네빌라의 팔목을 붙잡았다.

에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 말 들어.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

네빌라가 이를 까득 갈며 몸을 획 하고 돌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목책 안으로 들어서더니 보초를 향해 말했다.

“손님과 함께 왔다. 여독을 풀기 전에 족장님을 뵈어야겠어.”

순간 눈을 끔뻑인 보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빌라는 지금 마을의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말을 거역할 자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변을 들고 온 족장의 직속 전사가 네빌라를 향해 다가왔다.

“수고 많았소. 그대는 이제 진정으로 위대한 전사가 되었군.”

“겉치레는 됐어. 바로 족장에게 보고하지.”

짧게 고개를 끄덕인 전사가 네빌라와 에단을 이끌고 이동했다.

에단은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은은 딱 유목민 수준으로 보였다.

‘환경이 이래서야 어쩔 수 없겠군.’

근처에는 개울도, 하천도 없었다.

식수조차 보급하기 까다로운 이러한 곳에서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풀 한 포기도 없는 땅에서 마수는 간간이 발견되니.’

마수라는 족속이 얼마나 생명력이 질긴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에단은 계속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족장의 천막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네빌라, 그대는 위대한 전사지만 족장 앞에서는 예를 갖추시오.”

“신경 꺼.”

네빌라가 신경질적으로 전사를 노려보자 전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사가 먼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네빌라와 에단을 향해 말했다.

“그쪽도 예를 갖추는 게 좋을 거요.”

“염두에 두지.”

“들어와라.”

그때 안에서 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들으면 힘없고 가냘프지만, 또 반대로 단단하고 웅혼하게도 느껴지기도 했다.

네빌라와 에단이 천막을 젖히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노회해 보이는 여성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빼빼 마른 몸과 주름진 피부는 영락없이 평범한 노인이었다.

노인의 탁하고 흐릿한 동공이 에단을 응시했다.

에단은 묘한 눈초리로 노인을 마주 봤다.

“걱정 말게나. 아직까지는 볼 수 있으니.”

생각이 꿰뚫린 것 같자 에단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반응이 재밌었는지 족장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끌끌. 재밌는 걸 데리고 왔구나, 네빌라.”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은 아니지. 그래, 바실리스크는 자네가 잡은 건가?”

족장이 에단을 응시했다.

대답을 어찌하는 게 좋을까 싶어 에단은 볼을 긁적이며 고민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으니 솔직하게 말하게나. 자네에게 궁금한 게 많거든.”

“노인네랑 대화를 나누는 취미는 없는데.”

“너……!”

네빌라가 눈을 치켜뜨며 에단을 노려봤다. 족장은 손짓으로 네빌라를 진정시켰다.

“끌끌. 신경 쓰지 말게나. 자넨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나는 오래 살았어. 이제 곧 흙으로 돌아가야 할 나이지. 다만 나이를 먹어서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도 있지.”

족장의 하얗고 탁한 눈이 가늘어졌다.

“인간인 자네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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