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1화] 지하 (4)
네빌라는 황야의 전사였다.
잿빛 황야.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대다수의 마을 구성원들이 전사로서 살아간다.
마계가 대부분 그랬지만 네빌라의 마을은 유독 심했다. 메마른 대지에서는 식물이 자라나지 않았다.
수시로 출몰하는 마수들의 위협 속에서 생존하며, 작은 우물을 쟁취하기 위해서 피를 흘려야 했다.
이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그토록 척박했다.
풍요로운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했다.
반대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도 힘이 필요했다.
마수와 적들은 언제나 호시탐탐 자신들을 노리고 있었으니.
네빌라는 출정을 앞뒀다.
마을의 전사들이 한데 모였다. 전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움터로 향했다.
그들의 목적은 바실리스크였다.
최근 들어 마을의 피해가 극심했다. 바실리스크는 영악하고 교활했다.
그 힘과 거체를 지니고서도 욕심을 부리거나 무리하지 않았다.
승산이 확실할 때만 마을을 습격했다.
대부분의 경우는 전사들이 마을을 비웠을 때였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바실리스크는 잔혹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배를 채우고 나서도 근처의 마족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마족은 죽음에 익숙하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약하면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강하면 모든 것을 독식한다.
단순하지만 냉혹한 규율이다.
전사들은 목숨을 걸었다.
바실리스크를 살해하면 엄청난 명성과 함께 일대를 평정할 수 있었다.
바실리스크의 몸에서는 버릴 것도 없었으니, 한순간에 전사들의 무장도 올라갈 것이다.
네빌라와 전사들은 대의를 안고 출정했다.
바실리스크의 확실한 흔적을 확인하고 이동했다.
자리를 오래 비울 수는 없었다.
자리를 오래 비우면 습격에 노출된다.
보초를 서는 병사는 남겨 뒀지만, 그들로는 마을을 지킬 수 없었다.
습격을 당한다면 바로 전멸이었다.
전사들은 초조함을 억눌렀다.
진군이 지속될수록 전사들의 대화 소리도 줄어들었다. 왁자지껄하던 대화가 꺼졌다.
네빌라는 침묵했다.
그는 전사들의 수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토벌이 실패로 돌아가면 모든 책임은 그녀에게 있었다.
‘무조건 잡는다.’
네빌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지루한 추격이 계속되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추격이었다. 추격의 끝에 바실리스크가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목적지를 찾아낸다고 한들 땅속 깊은 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면 방법이 없었다.
뚝. 뚝.
전사 한 명이 신경질적으로 물병을 집어 던졌다.
식수가 바닥났다.
이제는 회군하기도 늦었다.
바실리스크를 잡아 식량과 식수를 보충하지 못한다면 여기서 전멸이었다.
운이 좋게 회군하면서 사냥감을 발견한다면 목숨을 연장할 수 있겠지만, 전사들의 목숨을 운에 걸 수는 없었다.
‘바실리스크가 있기를 기대하는 것도 운이지만.’
네빌라가 실소를 흘렸다.
목숨을 건 결의가 옅어지고 있었다.
굶주림과 갈증은 전사를 나약하게 만든다.
전사들의 표정이 예민해졌다.
시시콜콜한 대화 소리도 끊긴 지 오래였다.
쭈뼛.
그때 레빌라의 머리칼이 곤두섰다.
그녀는 전사들의 수장이었다.
전사들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전투력도 필요했지만 예민한 감각도 필요했다.
코끝에서 묘한 비린내가 스친다.
레빌라는 이 비린내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사냥감을 발견했다!”
“우오오오오오―!”
전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이 타고 있던 흑마들이 대지를 박차고 질주했다.
건조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전사들의 얼굴에서 흥분과 환희가 차올랐다.
몸을 짓누르는 피로감 따위는 전투를 앞둔 고양감에 흩날렸다.
레빌라의 감각은 적중했다.
저 멀리서 바실리스크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바실리스크의 거대한 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가늘게 뜬눈으로 바실리스크를 응시하던 레빌라의 동공이 커졌다.
‘누가 있어.’
그녀의 시력은 전사들 사이에서도 으뜸이었다.
정확한 모습은 판별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보였다.
‘혼자 사냥했다고?’
믿기지 않았다.
바실리스크는 혼자 대적할 수 있는 수준의 괴물이 아니었다.
‘빼앗아야 해.’
여기서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하면 전사들의 생환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약탈은 일상이다. 약하면 빼앗기는 것이고, 강하면 빼앗는다.
그것이 전사들의 법칙이다.
“빼앗아라!”
레빌라가 칼을 뽑아 들었다.
* * *
“……맹세하겠습니다.”
부관으로 보이는 이가 치욕감을 이기기 힘들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뭐, 맹세까지 할 정도라면.”
에단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레빌라는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며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에단이 두 손을 들며 씨익 웃었다.
“이제 와서 말을 돌리진 않겠지?”
빠득 이를 간 레빌라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 모욕은 잊지 않을 거야.”
“그러든가.”
에단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에단과 레빌라는 짤막한 통성명을 끝냈다.
에단은 이들의 목적을 확인했다.
‘이 녀석을 노린 건가.’
에단이 뒤를 돌아봤다.
다시 봐도 엄청난 위용이었다.
바실리스크는 덩치만 큰 것이 아니었다.
에단도 죽은 나무가 아니었다면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전사들은 에단을 향해 적의 어린 시선을 보냈다.
패배한 것으로도 모자라 수장을 빼앗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지하가 맞았군.’
가까이서 보니까 전사들의 외모가 꽤나 미려했다.
확실히 다크엘프가 맞았다.
다크엘프는 일반적인 엘프보다는 훨씬 호전적이고 포악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이미 원작의 스토리를 넘긴 지 오래였다.
앞으로는 오롯이 에단의 추측과 판단을 믿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 녀석을 잡으러 왔다고?”
“……그래.”
“그러면 얌전히 와서 협상이라도 할 것이지 대뜸 칼부터 뽑아 드는 게 너희들의 관습인가?”
“그렇다.”
레빌라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순간 말문이 막힌 에단이 미묘한 눈초리로 레빌라를 바라봤다.
‘미친년이네.’
레빌라에 대한 판단을 끝낸 에단이 전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결국 너희들이 원하던 사냥감은 내가 잡은 거잖아? 필요하면 가져가도 좋아.”
“…….”
전사들이 침묵했다.
자존심이 강한 전사들에게 있어 선심 쓰듯 말하는 에단의 말은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존심과 별개로 바실리스크의 사체는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비늘과 독니, 뼈, 안구, 살과 피까지 버릴 게 없었다.
옮기기는 쉽지 않겠지만 사체를 전부 옮긴다면 마을의 힘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질 것이다.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조건?”
레빌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협상은 전사의 덕목이 아니었기에 레빌라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조건을 내걸든지 우리는 거부할 수 없다.’
바실리스크의 사체는 반드시 필요했다.
사체의 가치도 가치였지만 식량과 식수가 모두 떨어진 상태였다.
말들의 체력도 이제 한계였다.
운 좋게 사냥감 몇 마리를 발견한다고 한들 원정에 참여한 전사들에게 모두 배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터였다.
목숨 줄을 틀어쥐고 있는 건 에단이었다.
레빌라가 긴장한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너희들 좀 따라가자.”
“……뭐?”
“왜, 싫어?”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자, 레빌라가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얘기는 끝난 걸로.”
에단이 웃었다.
* * *
전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실리스크의 거대한 사체를 해체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빠르게 해체를 끝내고 수습하기 위해서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깡!
오러를 두른 검을 휘둘렀지만 비늘은 잘리지 않았다.
전사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바실리스크가 가진 비늘의 경도는 강철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전사들이 힘겹게 비늘을 들어내 살을 갈랐다.
그리고 살점을 떼서 먹고, 흐르는 피를 마셨다.
강한 마수의 살과 피는 그 자체로도 뛰어난 영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사들은 바실리스크의 살을 으적으적 씹으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힘겨운 사투 끝에 얻은 보상이 아닌, 누군가의 선심과 자비로 얻은 사냥감이라는 생각에 서글픈 감정이 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끝내?”
에단이 다가왔다.
비늘을 들어 올린 에단은 오러를 두른 아슬란으로 바실리스크의 살을 갈랐다.
에단이 해체를 돕기 시작하자 속도에 탄력이 붙었다. 그럼에도 반나절이 넘게 흘렀다.
“진짜 못해 먹겠네.”
에단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해도 해도 작업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분리된 살과 비늘, 그리고 가죽 주머니에 넣어 둔 피들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낸다.”
레빌라가 전사들을 향해 말했다.
바실리스크는 일대에 적수가 없는 마수였다.
마족을 제외하고는 감히 바실리스크의 사체를 노리는 마수나 짐승은 없었다.
그 증거로 마수의 습격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실리스크의 사체를 노릴 만한 자들은 오롯이 마족뿐이었다.
전사들은 다른 마족들에게 사체가 발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적당히 구덩이를 파서 바실리스크의 사체를 감췄다.
그러고는 자신들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겼다.
바실리스크의 사체로 배를 채운 말들은 기분이 좋은지 투레질을 했다.
‘육식을 하는 말이라.’
생김새만큼 특이한 녀석들이었다. 이곳은 지상이 아니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말의 숫자가 하나 부족했다. 에단이 전투 중에 레빌라가 타던 말을 죽였기 때문이다.
“제 말을 타시죠.”
레빌라의 부관으로 보이는 이가 말에서 내렸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능숙하게 말 위에 올라탔다.
말도 자연스럽게 레빌라를 태웠다.
부관은 다른 전사와 함께 말을 탔다.
전사들은 기동력을 위해 마차를 준비해 오지 않은 탓에 가져갈 짐이 많았음에도 모두 챙길 수 없었다.
“나는 뭐, 걸으라고?”
에단이 이맛살을 구기며 말하자 레빌라가 에단을 슬쩍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타라.”
“전사장님!”
“됐다.”
부관이 언성을 높였지만 레빌라가 손을 들어 만류했다. 에단이 가볍게 도약해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이제 가자고.”
착석감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말들의 덩치가 지상의 군마보다 컸기에 꽤나 시야가 높아졌다.
“…….”
부관이 사나운 눈초리로 에단을 노려봤지만, 에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에단이 레빌라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출발하지?”
“……그래.”
이동이 시작되었다.
사체의 대부분은 챙기지 못했다.
말에 매달아 둔 배낭만으로는 사체를 챙기기에 한계가 명확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마차를 준비해서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에단이 고개를 내밀어 앞을 바라봤다. 황량한 대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거 귀찮게 됐군.’
이곳에서 탈출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