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화] 지하 (3)
말의 덩치는 거대했다. 어지간한 군마와 비교해도 상당이 큰 덩치였다.
검은 외관과 거대한 뿔, 그리고 중앙에 달린 하나의 눈.
기괴하다면 기괴한 모습이었다.
위에 올라타 있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평범한 외향을 지니고 있었는데, 약간의 구릿빛이 감도는 피부와 긴 귀가 눈에 띄었다.
‘엘프들이랑 비슷한데.’
에단이 가진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키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크엘프네.
‘그래.’
뭐,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후우…….”
에단이 숨을 깊게 내뱉었다. 격렬한 전투가 끝난 직후이기에 조금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저렇게 대놓고 살기등등하게 달려드는데 가만히 죽어줄 수는 없었다. 에단이 검을 치켜들었다.
에단의 안광이 바뀌었다.
거대한 뱀에게서 죽은 마나를 포식한 직후였기에 에단의 몸속에는 충만한 마나가 들끓고 있었다.
죽은 마나는 일반적인 마나보다 사나운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훨씬 포악하고 폭발적이었고, 에단의 성향과 잘 맞는 편이었다.
화르륵!
에단의 눈에서 검은 귀화가 피어올랐다. 일렁이는 불길이 적들을 노려본다.
심기가 불편했다. 에단이 피어를 분출시켰다. 이제 피어를 다루는 것도 상당히 익숙해졌다.
에단이 피어를 표출하자 말들이 반응했다.
찰나의 멈칫함. 그러나 이내 말들은 다시 에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
날 때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군마일지라도 생존에 대한 본능은 무시할 수 없었다.
드래곤의 피어는 마스터가 내뿜는 살기보다도 강렬했다.
감각이 예민한 짐승이나, 담력이 약한 인간이라면 심장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여전히 에단을 노린 채 달려들고 있었다. 흉흉한 안광과 서슬 퍼런 기세가 제법 매서웠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매끈한 검신에서 검은 불길이 치솟았다.
후웅―!
에단이 검을 휘둘렀다. 검은 칼날이 말의 다리를 향해 쏘아졌다.
말들이 마치 묘기를 부리듯 공중에 도약했다. 에단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 대단한데!”
에단이 사납게 미소 지었다.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에단이 다시 한번 검에 죽은 마나를 두른 채 휘둘렀다. 검은 칼날이 쏘아진다.
다만 이번에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촤르륵―!
수십 개가 넘는 칼날이 쏘아진다.
말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칼을 뽑아 든 귀쟁이들이 무어라 소리쳤다.
“방진을 펼쳐라!”
저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에단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녀석들은 에단을 노리고 있었다. 마적 놈들에게 자비심을 보일 만큼 자비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뱀 고기보다는 말고기가 낫지.’
에단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녀석들이 순식간에 대열을 갖췄다. 그 순간 반투명한 장막이 형성되며 에단이 던진 죽은 마나를 막아 냈다.
쾅과과광!
에단의 공격이 장막과 충돌하면서 강한 충격을 일으켰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에단이 눈을 좁히며 정면을 바라봤다.
우우웅―!
녀석들의 장막은 멀쩡했다. 놈들은 에단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마치 에단을 비웃는 것 같았다.
“어쭈?”
에단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저 재수 없는 미소를 보자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졌다.
“그 좆 같은 표정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보자고.”
에단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처음의 기세는 흩어진 지 오래였다.
기병들의 위력은 돌격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지금처럼 기동력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에단이 히죽 웃으며 녀석들을 향해 다가갔다. 놈들은 여전히 득의양양한 미소를 걸친 채 건방을 떨고 있었다.
에단을 향해 칼끝을 겨누고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상당히 배알이 꼴렸다.
“재밌냐?”
에단이 물었다.
눈을 끔뻑이던 놈들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그래 뭐, 재밌으면 됐다.
에단이 달려들었다. 눈으로 좇기도 어려운 속도였다.
쩌엉―!
에단이 검을 휘두르자 엄청난 반발력과 함께 손아귀와 어깨가 저릿했다. 예상하던 상황이었다.
에단이 곧장 손을 뻗어 장막에 손을 얹었다.
키에엑?
포식을 마친 죽은 나무가 반응했다.
에단이 사악하게 웃으며 죽은 나무를 향해 말했다.
“밥 먹을 시간이다.”
키에에에엑―!
죽은 나무가 환희에 찬 울음을 토해 냈다. 에단이 장막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장막이 크게 요동쳤다.
우웅―!
장막이 진동한다. 그러자 녀석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놈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 막아!”
“뭐야 저거!”
“뭐긴 뭐야.”
에단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좆된 거지.”
에단은 장막을 유지시키던 죽은 마나를 순식간에 모두 먹어치웠다. 저들을 지키던 방패가 부서졌다.
에단이 칼을 겨누며 소리쳤다.
“자, 다시 해볼까?”
화르륵!
검은 불길이 치솟았고, 에단은 흉흉한 안광으로 놈들을 노려봤다.
“덮쳐!”
녀석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이 소리쳤다. 말들이 에단을 포위했다.
혼란을 주려는 듯 빙글빙글 돌던 녀석들이 달려들었다.
촤악!
순간 에단이 검은 칼날을 날렸다.
말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회피했지만, 에단은 단번에 달려들어 그대로 말의 얼굴을 후려쳤다.
히이잉―!
주먹을 얻어맞은 말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압력을 이기지 못한 눈이 튀어나왔다. 말은 그대로 혀를 내밀고 몸을 누인 채 숨을 거뒀다.
말에서 떨어진 녀석이 재빠르게 자세를 갖췄지만 에단의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에단이 순식간에 녀석을 제압했다.
짧은 몸싸움이 있었지만, 에단을 상대로 몸싸움을 이길 수는 없었다.
에단이 녀석의 팔을 비틀어 무장을 해제한 뒤에는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칼을 겨눴다.
“일단 인질은 하나 얻었고.”
에단은 무모하게 날뛰지 않았다.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관찰했다.
‘질 것 같지는 않지만.’
여기서 놈들을 몰살시키는 것도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에단은 혼자였고, 적들은 다수였다.
이렇게 많은 적들을 전멸시키는 순간 상황은 돌이킬 수가 없게 된다.
‘추격대가 붙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그렇게 되면 불리한 것은 에단이었다. 제아무리 에단이 체력에 자신이 있다고 한들 지속적인 추격과 전투는 정신을 갉아먹는다.
휴식과 수면, 그리고 제대로 된 영양 섭취도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위험해지는 것은 에단이었다.
‘그렇다고 얕잡혀 보일 생각은 없어.’
먼저 적의를 보인 것은 녀석들이었다.
적의를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호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고, 이처럼 호전적인 이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최악의 판단이었다.
‘내키지도 않고 말이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확인했으니 일단 협상을 제시하기로 했다.
놈들 사이에서 높은 위치에 있어 보이는 녀석을 인질로 붙잡은 채.
인질은 좋은 대화수단이었다.
녀석들이 거부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통솔자를 죽이고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에단에게는 이득이었다.
“이거 놔!”
예상대로 녀석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코웃음을 친 에단이 한쪽 팔로 녀석의 목을 조르면서 칼끝으로 허벅지를 찔렀다.
푹!
“끄윽!”
녀석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남은 적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제압당했다. 이제 놈들은 선택해야 한다.
우두머리를 포기하고 에단을 향해 달려들 것인지, 아니면 패배를 인정하고 머리를 숙일 것인지.
‘새끼들.’
얼굴에 만연한 고민을 읽은 에단이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이 녀석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무기 내려놔.”
에단이 경고했다. 하지만 놈들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무기를 내려놓지는 못했다.
에단이 시선을 돌려 붙잡은 인질을 바라봤다. 가까이서 보니까 남자가 아닌 여자로 보였다.
얼굴선과 이목구비가 부드러운 게 꽤나 유려했다.
‘의외인데.’
저런 거친 무리의 수장이 여자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상관은 없지.’
이 녀석이 여자이든 남자이든, 예쁘든 못생겼든 에단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수틀리면 죽은 나무의 힘으로 생명력을 모조리 강탈한 뒤 얼굴을 뭉개 버릴 생각이었다.
에단에게는 생존과 승리가 최우선이었다.
에단이 피 묻은 칼을 혀로 핥았다. 살기와 광기가 뒤섞인 눈이 유리알처럼 번들거렸다.
에단의 서슬 퍼런 기세에 녀석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에단은 피어를 흩뿌리며 분위기를 장악했다.
“무기 내려놔.”
이번에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잘라 버릴 생각이다.
그렇게 했는데도 투항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인질을 죽여 버리고 전투를 재개할 것이다.
에단의 표정을 읽은 녀석들 중 하나가 눈을 질끈 감더니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았다.
“우으읍―!”
에단이 구속해 둔 여자가 눈을 부릅뜨며 발버둥 쳤다. 마치 저자를 향해 호통을 치는 것 같았다.
“조용히 있지?”
에단이 팔에 힘을 주자 여자의 발버둥이 약해졌다.
에단이 놈들을 천천히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기 안 내려놔? 죽이고 다시 시작해 볼까?”
농담이 아니었다. 에단의 눈빛을 정면에서 바라본 그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툭.
놈들이 하나둘씩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말 위에서 내려온 자들이 손을 들며 투항 의사를 밝혔다.
“다들 엎드려.”
에단은 거기에서 안심하지 않았다.
무기와 말을 멀리 떨어트려 놓은 채 놈들을 엎드리게 만들었다. 인질은 계속 붙잡은 채였다.
‘이거 고민인데.’
에단은 혼자였고, 당연히 이 녀석들을 구속시킬 도구도, 사람도 없었다.
설령 도구가 있다고 한들 인질을 붙잡아 둔 채로 잡업을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팔다리를 자를 수도 없고.’
그렇게 하는 순간 관계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에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 대화 좀 하지?”
* * *
에단은 인질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붙잡고 있는 여자를 무장해제한 다음, 뒤에서 목덜미를 붙잡은 채 자리를 만들었다.
어쩌다 보니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짧은 전투였고,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지만 전투는 전투였다.
게다가 수장을 인질로 잡은 것 때문인지 놈들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사나운 눈빛으로는 에단도 어디서 꿀리지 않았다.
“자, 먼저 나는 딱히 적의를 보이지 않았어. 그것부터 알아줬으면 좋겠군.”
“……대장을 놓아주시오.”
“나도 놓아주고 싶은데, 쉽게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막상 놓아줬더니 태도가 돌변해서 대뜸 공격할 수도 있잖아?”
에단이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녀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리는 명예를 아는 일족이오.”
“나는 명예를 잘 믿지 않아서. 상황에 따라 언제나 돌변하는 게 사람…… 아니, 음…….”
에단이 턱을 긁적이다가 말을 이었다.
“마족들의 심리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