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화] 지하 (2)
‘뭐야, 배고파?’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죽은 듯이 조용히 있던 죽은 나무가 반응했다.
지상에 있을 때와는 비교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미약한 반응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우드득.
에단이 왼손을 풀었다. 그리고 뽀얀 속살에 그대로 왼손을 박아 넣었다.
콰드드드득―!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쿠아아아아아아아!
큰 뱀이 다시금 미친 듯이 발광했다. 밀어 넣은 왼손에서 불똥이 튄다.
이놈의 체액이 위험하다는 건 매캐한 냄새로 알 수 있었다.
파직! 파지지직!
하지만 강한 독성을 띤 뱀의 체액도 타이탄의 장갑을 뚫지는 못했다. 에단은 한번 잡은 기회를 놓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키에에에에엑―!
죽은 나무가 반응했다.
그러고는 게걸스럽게 큰 뱀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뿌리를 내린 죽은 나무가 녀석의 생명력을 무자비하게 강탈하기 시작했다.
고양감이 차올랐다. 비어 있던 에단의 몸에 죽은 마나가 곳곳에 퍼져 나갔다. 중독적인 황홀감에 빠져 버릴 뻔했다.
“하하하!”
에단이 광소를 터트렸다.
큰 뱀의 발광이 더욱 심해졌다. 이대로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본인도 인지한 것이다.
녀석이 고개를 돌려 에단을 노려봤다. 독기와 증오가 가득 어린 눈빛이었다. 에단은 녀석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부라렸다.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고 했지?”
에단이 사납게 웃었다. 그 순간 큰 뱀의 아가리가 쩌억 벌어졌다.
‘저 새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럴 때 드는 예감은 거의 적중하는 편이었다.
에단은 큰 뱀의 몸속에 왼손을 박아 넣은 채로 아슬란을 들었다. 에단이 소리쳤다.
“할 수 있는 거라도 해!”
― 알고 있어 염병할 새끼야!
에단의 몸속에서는 꽤나 충만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에단이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뱀의 아가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아―!
큰 뱀의 입에서 검은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저걸 정통으로 맞으면 목숨을 부지하기는 글렀다.
‘조금만 더.’
에단이 죽은 나무를 재촉했다.
죽은 나무가 더욱 격렬하게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에단의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콰앙―!
에단이 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검은 불길이 아슬란을 뒤덮었다.
― 이건 나랑 잘 안 맞는데!
“불평 작작하고!”
에단이 키아나를 타박했다. 키아나는 투덜거리던 것과는 별개로 본분을 잊지 않았다.
에단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죽은 나무로 추출한 기운을 검에 밀어 넣는 게 고작이었다. 정교한 컨트롤과 발출은 불가능했다.
에단이 검을 휘둘렀다. 정교한 기술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우악스러운 일격이었다.
콰아앙―!
아슬란에 어린 검은 오러가 큰 뱀이 내뱉은 검은 기운과 부딪쳤다.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 나오며 강한 풍압이 휘몰아쳤다. 에단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얼굴을 가렸다. 자칫하면 떨어질 것 같았다.
콰드드득!
에단은 움켜쥔 살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죽은 나무가 탄력이 붙은 것인지 더욱 빠르게 마나를 추출하고 있었다.
에단의 눈이 번들거렸다. 흰자위가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미 에단의 그릇은 크기를 가늠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방대했다.
저 거대한 뱀의 생명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도리는 없었으나 에단의 그릇이 넘칠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큰 뱀의 발버둥이 미약해지고 있었다.
이제 에단은 중심을 잡는 것에 신경을 쏟지 않아도 괜찮았다. 에단이 다시 한번 칼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키아나.”
― 알고 있어.
키아나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에단이 사납게 미소 지으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매끈한 검신에 다시금 검은 불길이 치솟았다.
“아직 한 발 남았거든?”
콰아아앙―!
에단이 검을 휘두르고 검은 오러가 뱀의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뱀이 크게 휘청거렸다.
에단의 일격은 성벽도 무너트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여전히 뱀의 얼굴은 붙어 있었다.
경이로운 내구성이었다.
하나 그러한 내구성에도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는지 검은 뱀은 머리를 휘저었다.
에단은 다시 한번 추출한 죽은 마나를 검에 밀어 넣었다. 검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 ……악마 같은 새끼.
“칭찬 고마워.”
에단이 검을 휘둘렀고, 검은 오러가 쏘아져 뱀의 머리에 적중했다. 크게 휘청이는 뱀의 머리가 지면에 처박혔다.
“후우.”
에단이 숨을 토해 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요동쳤다. 손아귀가 저릿저릿하고 어깨가 뻐근했다.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에단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큰 뱀은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막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하에 서식하는 생명체에게 있어 생명력은 곧 죽은 마나였다.
에단은 죽은 마나의 추출을 멈추지 않았다. 큰 뱀의 움직임이 점차 미약해졌다.
에단은 차오르는 죽은 마나를 느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뱀은 목이 잘려도 적을 물 정도로 사나운 녀석이었다.
죽기 전 발악으로 언제 기습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큰 뱀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천천히 죽어 갔다.
먹잇감으로 생각했던 에단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 생명이 꺼져 나갔다.
키에에엑!
죽은 나무가 포만감을 느낀 것인지 만족에 찬 목소리를 토해 냈다.
에단이 뱀의 몸속에 밀어 넣었던 손을 뽑았다. 손은 뱀의 체액으로 엉망이었다.
“하아.”
에단이 한숨을 토해 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다.
‘진짜 더럽게 크네.’
에단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뱀의 몸을 훑으니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길이만 따지면 50미터를 족히 넘을 것 같았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크기였다.
“고생했다.”
에단이 검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키아나가 뾰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 됐어.
뭔가 뚱한 말투에 에단은 웃음을 터트렸다.
한바탕 전투가 끝나자 피로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눈꺼풀을 붙이면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되지.’
갑자기 이런 괴물이 출몰할 정도로 지하는 곳곳에 위험이 산재해 있었다.
이런 곳에서 눈을 붙이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이게 지하란 건가.’
위험하다고 언급되는 것만 봤지 실제로 와 보니 상상을 초월했다.
“일단 체력부터 회복해야겠지.”
에단이 차게 식은 눈으로 큰 뱀을 바라봤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했다.
수면을 취하는 것보다 뱃속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게 급선무였다.
마스터의 이른 몸이 무적은 아니었다. 굶으면 배가 고프고, 마시지 않으면 목이 말랐다.
에단이 아슬란에 오러를 둘렀다. 그리고 손으로 헤집었던 부위부터 시작해 천천히 가르기 시작했다.
카가가가가강―!
강한 불똥과 함께 귀를 찌르는 듯한 파열음이 들렸다. 비늘의 단단함은 대단했다.
하지만 모든 생명력을 뽑힌 뱀의 비늘은 전보다는 쉽게 절단되었다. 오러를 두른 상태에서도 꽤나 힘을 줘야 할 정도였다.
에단은 힘겹게 뱀의 몸을 가른 뒤 흐르는 피를 마셨다. 울대가 꿀렁거렸다.
벌컥벌컥.
“크으.”
에단이 입을 닦았다.
큰 뱀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검은색이었다. 이질적인 색깔에 비위가 상하기는 했지만 형편을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역시 멀쩡하네.’
죽은 나무로 생명력을 추출하면 그 특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큰 뱀의 몸은 강한 독성을 띠고 있었다.
죽은 나무가 큰 뱀의 모든 생명력을 갈취한 탓에 독성이 약해진 것도 있었겠지만, 에단이 큰 뱀의 특성을 얻은 것도 이유 중 하나일 터였다.
‘뭐,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에단이 배를 어루만졌다. 딱히 배탈이 나거나 복통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에단은 이번에는 천천히 뱀의 속살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비늘과 달리 속살은 꽤나 부드러웠다.
워낙 덩치가 비대한 탓에 손질이 어렵지는 않았다.
대충 잘라도 거대한 고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음…….”
에단이 고기를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에단은 딱히 생고기를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이러한 괴물이라면 더더욱.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지.’
에단이 주위를 둘러봤다.
땔감을 구할 곳도 없을뿐더러 부싯돌도 없었다.
고기를 구워 먹기는 요원한 일이었다. 오히려 어설프게 익혔다가는 누린내가 진동할 확률도 있었다.
지금 에단에게 누린내를 잡아 줄 향신료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후우.”
착잡한 표정으로 고기를 바라본 에단이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으적으적.
에단이 고기를 거칠게 씹었다.
― 으으…….
키아나가 질색하는 목소리를 냈다.
에단은 키아나의 반응을 무시했다. 신경 쓰면 더 먹기 힘들 것 같았다.
꿀꺽.
고기를 삼킨 에단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생각보다 먹을 만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역하지도, 비리지도 않았다.
생고기 특유의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냥저냥 먹을 만했다.
‘피도 그렇고 뭔가 톡 쏘는군.’
사천 음식을 먹을 때처럼 혀가 짜릿했다. 저 뱀이 가진 독성 탓일 것이다.
‘하다 하다 참.’
이제 독이 든 괴물의 살점을 먹고 있다니.
에단이 실소를 터트리며 다시 한번 뱀의 살점을 떼어 냈다. 입에 가득 넣고 우물거리니 역시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
‘톡톡 쏘는 게 나쁘지 않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에단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배는 채워야 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서 좋을 건 없었다.
적당히 배를 채운 에단의 기감에 다른 기운이 잡혔다. 에단이 폴짝 뛰어 뱀의 몸 위에 올라섰다.
“흐음…….”
에단이 손으로 가림막을 만들어 앞을 바라봤다. 지평선 근처의 거리에서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열명 남짓한 숫자. 녀석들은 말과 비슷한 생김새의 것들을 타고 있었다.
‘인간일 리는 없고.’
이곳은 지하였다.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다.
‘어떻게 할까.’
체력은 어느 정도 보충했다. 이제 마나도 부족하지 않았다.
큰 뱀의 생명력을 모두 흡수하자 일반적인 마스터 수준의 마나량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에단은 인간이다.
저들이 호의적으로 나올 확률은 희박했다. 이곳은 엄연한 지하였고, 자신은 외지인이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방향을 틀어 저들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
이곳은 척박한 황야였다. 지금은 힘들게 식수와 식량을 얻게 되었지만 이런 녀석이 계속 출몰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에단은 지하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단순한 생존이 목표가 아니었다.
‘결정했다.’
에단은 저들과 대화를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에단은 싸움을 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저들이 적의를 보이면 무력으로 진압하면 그만이다.
에단이 뱀 위에서 뛰어내려 그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이제 거리가 꽤나 가까워져서 모습이 판별되었다.
‘옘병할.’
녀석들이 칼을 뽑아 든 채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