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화] 지하 (1)
“그냥 버리고 갈까.”
에단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에단의 말은 키아나에게 똑똑히 들렸다.
― 빌어먹을 새끼가 지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에단이 피식 웃었다.
농담 삼아 그렇게 말했지만 키아나는 필요한 인물이었다. 에단이 검집에 아슬란을 집어넣었다.
― ……말할 기회를 놓쳤는데, 검 꼬라지가 이게 뭐지?
키아나가 툴툴거렸다. 아슬란의 외향은 전과는 완전히 딴판이 되어 있었다.
이전에는 비교적 밋밋한 모습을 하고 있던 아슬란은 화려한 모습으로 완전히 탈바꿈되었다.
“뭐, 어쩔 수 없었어. 보여지는 게 중요하니.”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용사를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을 짠 이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보여지는 것에 민감하다.
화려한 신성력을 뽐내어 아름다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블란테와 드레이를 지지했다. 지지의 이유에는 성검의 지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 난 매우 별로야. 진짜로.
“이미 늦었어.”
키아나의 투덜거림을 무시한 에단이 계속 걸어 나갔다.
― 아니? 딱히 늦지는 않았어.
우웅.
순간 검이 진동했다. 에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 마음에 안 든다고.
우우우웅!
진동이 거세지더니 아슬란의 외향이 바뀌였다. 화려한 껍데기가 우수수 떨어지며 다시 본래의 심플한 겉모습으로 바뀌었다.
“돈 아깝게…….”
에단이 혀를 찼다. 직접적인 손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입맛이 썼다.
― 이제야 좀 낫군.
키아나의 목소리가 후련해졌다. 에단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사실 나도 지금이 마음에 들어.”
“그치?”
키아나와 에단은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걸어 나갔다. 비록 체내의 마나는 봉인되어 있지만, 몸은 그대로였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며 에단의 체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갈증이 나네.’
그럼에도 생리적인 현상은 어쩔 수 없었다. 묵묵히 걷다 보니 목이 탔다.
공기가 탁했다.
건조한 대지는 사막과도 같은 탓에 목에 모래가 굴러다니는 기분이다.
‘체력은 그대로지만.’
몸이 무거웠다.
지하는 지상과 다른 장소였다. 들이마시는 공기도 무언가 다른 것 같았다.
― ……그나저나 신기한데.
“뭐가.”
― 네가 살아 있는 거. 전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너는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지녔어. 원래라면 진작 그 그릇이 깨졌어야 정상이야.
“그래서 그릇을 넓혔잖아.”
에단은 죽을 고비를 넘겨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 지금 떠올리면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느꼈던 고통을 떠올리면 아직도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원래라면…… 지하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어. 그런데 너는 잘만 살아 있잖아? 그런 것들이 전부 말이 안 된다는 거야.
“와 본 적 있나?”
― 아니? 나도 들은 거지.
“갑자기 신뢰도가 급락하는데.”
― 염병할 새끼.
에단과 키아나가 티격태격했다.
* * *
한참을 더 걸었다.
체력은 여유가 있었지만 심리적인 피로감이 상당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었다.
벌써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대지를 걷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다.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군.’
에단이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지하에서는 태양이 없었다. 하지만 완전한 어둠에 휩싸인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낮과 밤이 없으니 시간을 판별할 수 없었다. 에단은 발자국을 세며 거리를 계산하고 있었다.
‘십만 보가 다 되어가네.’
정신적인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에단은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키아나와 나누던 시답잖은 대화도 어느새 끊기고 말았다.
― 야.
“나도 봤어.”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햇볕이 내리쬐지는 않았지만 손으로 그늘을 만든 채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작은 오아시스가 있었다.
‘신기루는 아니겠지.’
신기루라기에는 이곳의 더위는 그리 심하지 않았고, 햇볕도 없었다.
에단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오아시스를 향해 다가갔다. 다행히도 신기루는 아니었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건가?”
고여 있는 물이라고 생각하니까 뭔가 꺼림칙했다.
― 다른 것들은 죄다 처먹는 놈이 이제 와서 물 가지고 그러냐?
키아나가 기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에단은 온갖 것들을 흡수했다. 당시에는 딱히 뒤를 고려하지 않았다.
에단이 수긍하며 샘물을 퍼먹으려던 그때.
쿠구구구궁.
바닥이 진동하며 물이 요동쳤다.
에단이 칼자루를 붙잡았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젠장.”
에단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에단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쿠구구구구구구―!
거대한 오아시스를 집어삼킨 괴물이 등장했다.
‘뱀?’
처음 보자마자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개 뱀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덩치가 매우 거대했다.
에단이 고개를 높이 치켜들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저건 또 뭐야?”
― ……그걸 나한테 왜 물어?
“진짜 도움 안 되네.”
― ……시발.
키아나가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욕을 하고 싶은 당사자는 에단이었다.
‘잡을 수 있나?’
에단의 몸속에는 한 줌의 마나도 없었다.
초인의 반열에 든 육체를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저 거대한 크기의 뱀은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정도면 용 아니냐?’
위용만 놓고 보면 오르번이 제작한 마룡과 비교해도 딱히 꿀리지 않았다.
에단이 실소를 터트리고 있을 때.
먹잇감을 삼키지 못한 뱀이 검은 눈동자를 뜨며 에단을 사납게 노려봤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와…… 존나 징그럽네.”
눈깔의 숫자가 범상치 않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쌍의 눈동자. 총 열 개의 동공이 에단을 응시했다. 거대한 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에단은 본능적인 혐오감을 억누른 채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저거 비늘은 뚫리겠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뱀이 에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육중한 몸에 비해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쿠구구구구구!
바싹 말라 있는 대지가 뒤집어졌다. 달려드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깡그리 파괴되고 있었다.
파밧!
에단이 지면을 박차 옆으로 돌았다.
“진짜 뭐 도움되는 정보라도 없어?!”
― 기다려! 생각 중이니까!
키아나가 오히려 역정을 냈다. 에단은 짜증을 억누른 채 침착하게 생각했다.
‘키아나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되고.’
신성력을 쓰지 못하는 아슬란은 그저 조금 튼튼한 검일 뿐이었다.
‘마나는 제약된 상태.’
원거리 공격은 불가능하다.
오러가 가진 절삭력과 파괴력이 없는 이상 저 비늘을 뚫기는 요원해 보인다.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지.’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좌절하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에단이 신체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움직였다.
에단이 빠르고 화려하게 스텝을 밟았다.
저 뱀은 크고 재빨랐지만 몸집이 비대하고, 공격이 단순했다. 궤도를 읽고 피하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지금.’
에단이 쏜살처럼 튀어 나갔다. 아슬란을 강하게 움켜쥐고 검을 휘둘렀다.
깡!
강한 반발력과 함께 에단의 팔이 튕겨져 나갔다. 손아귀가 욱씬거리고 어깨가 뻐근해졌다.
“이야, 시발.”
에단이 감탄 섞인 욕을 내뱉었다.
이건 상상이상이었다. 두터운 강철을 후려쳐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케르륵.
큰 뱀이 괴상한 소리를 흘렸다. 마치 에단의 저항을 비웃는 것 같았다.
단순히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에단의 심기는 좋지 않았다.
“……그래 한번 해보자 이거지?”
에단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툭하고 불거졌다. 최근 열받는 일이 잦는 것 같았다.
“후우.”
에단이 짜증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에단의 동공이 깊게 가라앉았다.
콰과광―!
큰 뱀이 다시 달려들었다.
에단은 빠르게 피하면서 뱀의 몸을 훑었다. 비늘 하나하나 매우 크고 단단했다.
‘약점 하나쯤은 있겠지.’
에단이 질주하면서 뱀의 동체를 살폈다.
‘여기선 제대로 안 보여.’
“쯧.”
혀를 찬 에단이 뱀 위에 올라탔다.
올라타는 순간 뱀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에단은 중심을 잡으며 뱀 위를 뛰어다녔다.
“이거 좀 재밌는데?”
에단이 히죽 웃으며 뱀의 몸을 하나씩 살폈다. 마나를 사용 가능하다면 정면에서 상대했겠지만 지금으로써는 요원했다.
캉! 캉!
혹시나 싶어 칼끝으로 비늘을 찔러봤지만, 금속음을 일으키며 튕겨져 나갔다.
‘이거 힘으로는 안 되겠네.’
에단은 빠르게 포기했다. 뱀의 발버둥이 더욱 심해졌다. 어떻게 해서든 에단을 떨어트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마음대로는 안 되지!”
에단은 쉽게 떨어져 줄 생각이 없었다. 에단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뱀의 위를 활보하는 도중 눈에 띈 게 보였다.
검고 매끈한 비늘들 사이에 거꾸로 나 있는 비늘이 보였다. 순간 에단의 눈매가 좁혀졌다.
‘역린?’
저 역린이 약점이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에단은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순식간에 역린이 있는 곳에 도달한 에단이 칼을 높히 치켜들었다.
“스읍―!”
에단이 숨을 가득 들이마시자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콰아아앙―!
그러고는 전력으로 검을 내리찍었다. 예상과 달리 역린은 부서지지 않았다.
쿠아아아아아아―!
하지만 반응은 온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큰 뱀이 격렬하게 몸을 비틀었다.
“좋아 죽네 아주.”
에단이 사납게 웃었다. 반응이 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다른 방법을 시도할 때였다.
에단이 중심을 잡았다.
반질반질한 비늘 위는 미끄러워서 쉽지 않았지만, 형편을 고려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에 걸어봐야겠어.’
에단이 비늘의 틈새에 검끝을 끼우고 힘껏 벌렸다.
쿠어어어어어―!
뱀이 다시금 몸을 비틀며 끔찍한 괴성을 토해 냈다. 에단의 몸이 사정없이 흔들리며 떨어질 위기에 처했지만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에단이 검을 회수했다. 그러고는 벌어진 틈새에 왼손을 밀어 넣었다.
치이이이익―!
손을 집어넣자 연기가 피어오른다. 독인지 뭔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왼손을 넣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 빌어먹을 검도 이런 식으로 뽑았거든?”
데드리프트에는 자신이 있었다. 여러모로 불안정한 상황이었지만 에단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사냐, 뒈지냐 아니겠어?”
에단이 이를 악물고는 있는 힘껏 비늘을 잡아당겼다.
대퇴이두와 사두, 그리고 척추 기립근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에단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왼손은 비늘 사이에, 오른손은 왼손의 손목을 붙잡아 보조했다. 에단의 목에 핏대가 섰다.
“끄으으으으―!”
에단이 포기하지 않고 있는 힘껏 뽑아내자, 비늘이 뜯겨져 나갔다.
쿠어어어어―!
비늘을 뜯어낸 순간, 에단은 뒤로 자빠질 뻔했고, 큰 뱀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비늘을 뜯어내자 뽀얀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에엑.
그것을 보자 에단의 내면에 있던 죽은 나무가 목소리를 냈다. 탐욕에 젖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