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7화] 실종 (6)
빈센트는 홀로 제국을 향해 이동했다. 첸조차 빈센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빈센트는 고요한 분노를 삼켰다.
가주라는 자리는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인내했다. 빈센트는 본디 감정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
빈센트가 말없이 평야를 응시했다. 평야 너머에 제국의 수도와 성이 보였다.
빈센트는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꿈틀.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기감에 무언가가 잡혔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고, 무언가 사특한 듯하면서도 꺼림칙한 기운.
빈센트가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키이잉.
빈센트의 심기를 대변하듯 검이 뽑히면서 꺼림칙한 울음을 토해 냈다. 잘 벼려진 빈센트의 검이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뚜벅뚜벅.
빈센트가 말없이 발을 옮겼다.
“간만에 뵙는군요.”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난 크리스토가 빈센트를 향해 인사했다.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 신하들을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크리스토는 생글생글 웃으며 빈센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빈센트는 물끄러미 크리스토를 바라봤다.
‘이게 이 시대의 최강자인가.’
크리스토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고요한 살기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빈센트의 시선을 응시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에단처럼 폭력적이고 난폭한 살기가 아닌, 잘 정제되어 있는 살기였다.
“이런, 상당히 무안하군요.”
크리스토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빈센트는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먼 길까지 찾아오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안 그래도 화친을 위해서 사절들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블란테의 수장이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군요. 지금이라도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으니…….”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있을 거지?”
“네?”
크리스토가 생글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빈센트는 삭막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을 쓰지 않으면 죽을 걸세.”
빈센트는 그렇게 크리스토를 향해 통보했다. 빈센트가 검을 치켜들었다.
크리스토의 웃음기가 지워졌다.
‘이거 위험한데.’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크리스토가 검을 뽑아 휘둘렀다. 여전히 경이로운 쾌검이었다.
깡!
불똥이 튀며 검이 튕겨져 나갔다. 크리스토의 눈이 순간 커졌다. 빈센트는 검을 치켜들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크리스토가 혀를 찼다.
오러를 실은 일격이었다. 그것이 먹히지 않은 순간 크리스토는 빠르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토가 자리를 피했고, 빈센트가 검을 내리그었다.
매우 천천히, 느긋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그 파급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재앙과도 같은 기운이 터져 나왔다. 크리스토가 자리를 피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좋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제국의 성벽은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후우.”
한숨을 내쉰 크리스토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지면이 검게 물들면서 검은 갑주를 입은 알렉스가 빈센트의 공격을 쳐냈다.
쩌엉―!
오러와 오러가 부딪치면서 강렬한 파공성과 섬광이 터져 나왔다. 빈센트는 고요한 눈으로 알렉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많이 추해졌는데, 알렉스.”
“…….”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창백하고 흐릿한 동공으로 빈센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빈센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크리스토를 응시했다.
“오, 라이벌의 재회인가요?”
크리스토가 이죽거렸다.
빈센트는 크리스토가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빈센트가 다시 천천히 검을 휘두르려고 들자 알렉스가 크리스토의 앞을 가로막았다.
“와, 든든해.”
크리스토가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마치 의도적으로 빈센트를 조롱하고 놀리는 듯한 행동과 제스처였다.
쾅!
불똥이 튀겼다. 검과 검이 부딪쳤다. 알렉스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오러는 아름다운 푸른색이 아닌 불길하기 그지없는 검정색이었다.
검은 오러, 창백한 낯짝.
빈센트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불쌍하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빈센트는 진심으로 알렉스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렇기에.
“이제 그만 쉬게.”
빈센트가 칼날을 비틀었다.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위로 검을 그었다.
알렉스는 이미 죽음이라는 순리를 거부한 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빈센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순리를 한 번 거슬렀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리면 될 뿐이다.
아래에서 위로.
역류하는 물길처럼 허공을 가른 빈센트의 검.
알렉스의 몸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토는 눈이 동그래지며 알렉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보내기에는 좀 아쉬운 친구라서.”
씨익 웃은 크리스토가 빈센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부정]
크리스토가 중얼거린 룬어. 빈센트는 심장부에서 흐르는 통증을 느꼈다. 몸의 마나가 역류하기 시작한다.
씨익.
빈센트가 사납게 웃으며 기세를 폭발시켰다.
그 순간 크리스토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뻗은 손을 회수했다. 강한 반발력이 느껴지며 룬어가 파훼되었다.
“와우…….”
크리스토는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건 정말 놀라웠다. 설마 정면에서 룬어를 파훼하다니.
‘녀석처럼 다른 룬어를 지니고 있던 것도 아닐진대 말이야.’
크리스토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시도하는 방법마다 족족 막혔다. 빈센트의 무력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음……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되겠습니까?”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이것 참 당황스럽네…….”
크리스토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알렉스의 몸이 사라졌다.
“이건…… 지금 쓰고 싶지 않았는데…….”
“할 수 있는 게 남았다면 더 해 보거라. 정면에서 부수고 그 목을 베어 주지.”
“하하, 자신감이 대단하시네요.”
크리스토가 볼을 긁적였다.
“뭐, 정 원하신다면 보여 드릴 수야 있지만…… 희생이 조금 커서요.”
“희생?”
“네. 이건…… 나중에 준비가 되면 다시 보여 드리겠습니다. 가신들을 전부 죽이든…… 제국의 시민들을 몰살시키든, 원하신 대로 하면 됩니다.”
크리스토는 정말 관심 따윈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시선으로 뒤를 힐긋 돌아봤다. 그러고는 다시 빈센트를 응시하면서 웃었다.
“조만간 다시 뵙죠.”
빈센트의 이마에 주름이 새겨졌다.
빈센트가 재빠르게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크리스토는 사라진 이후였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크리스토가 나타났을 때도 아무런 전조 없이 빈센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원래부터 있던 것처럼.
기이한 현상이다.
빈센트의 기감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마법과는 다른 무언가.
빈센트가 굳은 표정으로 제국의 성벽을 바라봤다. 검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거운 분노가 가슴을 짓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감정이 이끄는 대로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렇다면 저 성벽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고한 희생이다. 현 황제는 잠적했다. 쫓는 것은 무의미했다. 황제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빈센트는 굳은 얼굴로 크리스토가 사라진 장소를 응시하다가 검집에 검을 밀어 넣었다.
빈센트가 몸을 돌렸다. 자기혐오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나는.’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 * *
에단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에단이 천천히 눈을 뜨자 하늘이 보였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탁하고 흐린, 화산재가 자욱하게 낀 것 같은 하늘이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무거운 공기가 폐를 채웠다.
“하하.”
에단이 실소를 터트렸다.
저 하늘을 보자마자 어디에 떨어졌는지 가늠이 되었다.
‘옘병할.’
에단이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황량했다. 주변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 쩍쩍 갈라진 바닥에서는 아무런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친 곳은 없고.’
에단은 가장 먼저 몸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눈에 띄는 부상은 없었다.
몸이 찌뿌둥하고, 어딘가 뻐근하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옷이 너덜너덜했다. 등판이 욱신거리는 걸 보니 등 쪽 상황도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다.
‘머리부터 안 떨어진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하나.’
머리부터 낙하했다면 그대로 목이 부러져 죽었을 것이다. 아무리 에단이라도 목이 부러지면 죽는다.
에단이 주위를 둘러봤다. 저 멀리 아슬란이 눕혀져 있었다. 헛웃음을 지은 에단이 아슬란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에단은 움직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몸이 꽤나 무거웠다.
이건 몸 상태니, 컨디션이니 하는 문제가 아닌 더욱 원초적인 문제였다.
‘뭐, 중력이라도 높다는 설정이냐?’
만일 그렇다면 좀 실망이었다. 너무 식상했다.
에단이 쓰러진 아슬란을 쥐었다. 그러자 익숙한 키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살아 있네.
“이대로 객사하면 억울하잖아.”
크리스토의 건방진 낯짝을 박살 내기 전까지는 죽을 생각이 없었다.
에단의 눈매가 좁혀졌다.
끝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대지였다.
생명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어 다니는 벌레도 없었다.
“여기는…… 지하인가?”
― 그래.
키아나가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기에 놀랄 것도 없었다.
― ……당황하지 않는 건가?
“당황하면 뭐가 바뀌어? 다른 것보다 기분은 조금 더럽네. 내가 당하고는 못 살거든.”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 자리에서 지하의 문을 열어서 자신을 떨궈 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워낙 범위가 광범위하고 마나가 제약되던 상태라 손을 쓸 방법도 없었다.
‘병력은 퇴군했겠군.’
에단은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이 실종된 상황.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죽었을 거라 여길 것이다.
만일 군대가 복수심에 불타 크리스토를 향해 돌격한다고 하면…….
‘마음은 갸륵하지만.’
최악의 판단이다. 아직 크리스토에게 남은 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미 에단은 함정에 빠졌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게 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첸이라면 병력을 물렸겠지.’
에단은 첸을 신용하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기사였다.
“뭐, 지상의 고민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제 앞가림을 해야 할 때였다. 공기가 탁하고 무거웠다. 목에 모래가 끼는 것 같았다.
에단이 내부를 점검하던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다.
끝을 헤아릴 수 없던 방대한 마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키아나.”
― 마나가 없어졌다고?
“그래, 이유를 좀 설명 듣고 싶은데?”
― ……당연한 얘기야. 여긴 지하니까 지하의 것들을 써야지. 모든 게 달라져 있어. 네 마나는…… 조금 특이하기는 하지만 지하의 것이 아니니 사용할 수 없는 거지. 정확히 말하면 사라진 게 아니라, 봉인된 거고.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좀 예상외였다.
에단이 의식을 집중하며 죽은 마나를 떠올리자 죽은 나무의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하, 이걸 슬퍼해야 해, 안도해야 해?’
기막힌 표정을 짓고 있던 에단이 무언가 생각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아슬란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너도 신성력 못 쓰냐?”
― …….
짐 덩어리가 생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