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5화] 실종 (4)
레미아는 용기를 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압하는 사제와 성기사는 없었다.
“……물 좀 줘.”
레미아가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 * *
성녀.
고결한 이름이다. 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자만이 성녀라는 이름을 쓸 수 있었다.
성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성스럽고 숭고하다. 그녀는 기도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막대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성녀란 이름은 교황보다도 더 중요했다. 사제들은 성녀를 시기하지 않았다.
‘시기’라는 감정 자체가 불순했고, 불경했기 때문이다.
성녀란 것은 신의 선택과 신탁을 받은 사람이다.
레미아의 오빠 또한 엄청난 신성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성자라고 불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신성력을 가졌다.
“이 아이는 성자가 아니다.”
동시대에 두 명의 성인이 존재할 수는 없었다.
신성 왕국은 드레이의 처분을 보류했지만, 일각에서는 혼란을 야기한 불순한 존재라 하며 폐기를 주장했다.
“안 돼!”
그 이야기를 들은 레미아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드레이는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자 버팀목이었다.
“오빠를 죽이면 나도 죽을 거야. 내가 못할 것 같아?”
레미아가 혀를 깨물었다.
뇌가 저릿해지는 끔찍한 고통이 치밀어 올랐다. 곧바로 사제들이 달려와 레미아의 상처를 치유했다.
굳이 사제들이 치유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가진 신성력이라면 잘린 혀쯤은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었다.
레미아의 행동은 신성 왕국을 향한 경고이자, 협박이었다. 그리고 그 협박은 성공적이었다.
드레이의 처분은 보류되었다. 다만 드레이를 이용해 협박할 수 있는 것은 레미아뿐만이 아니었다.
“오빠가 보고 싶지 않은 건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우리도 뭘 할지 모르겠는데.”
라오나드가 싸늘한 동공으로 말했다.
레미아는 이가 부서져라 악물었다. 이 녀석들은 오빠를 이용해 레미아를 협박했다.
레미아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협박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레미아는 녀석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오빠를 위해서는 녀석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끔찍한 나날들이었다.
감정이 지워지는 걸 느꼈다. 외우기 싫은 경전을 읽다 보면 자아가 흐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끝은 보이지 않았고, 도리어 날이 갈수록 끔찍해졌다. 신성 왕국은 레미아에게 살인과 실험을 강요했다.
난해하고 기이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그림 위에서 신성력을 끌어 올린다.
그러면 수많은 생명체들이 끔찍한 비명을 토해 냈다.
사람, 짐승, 아이, 어른,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게 뒤섞여 있었다. 그들의 비명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자들은 죽어 가며 증오 가득한 눈으로 레미아를 응시했다.
레미아는 수많은 생명들을 앗아 갔다. 그들의 원망은 레미아에게로 향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목숨을 끊어 버리고 싶었다.
신성 왕국은 레미아에게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성스럽고 고결한 신성 왕국의 민낯은 그 어떤 것들보다도 추악했다.
레미아의 정신은 닳고, 마모되고 있었다.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녀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지만 오빠를 위한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다.
그리고 그때, 드레이가 도망쳤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소식을 들었을 때 레미아는 여러 감정에 휩싸였다.
안도, 슬픔, 절망, 좌절, 배신감.
먼저 오빠가 무사하다는 것에 대한 안도.
신성 왕국이 드레이를 죽이고, 그것을 숨기기 위한 자작극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드레이가 실종됐을 당시 성기사들의 대처를 보면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드레이는 이 지옥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것은 레미아 혼자였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레미아는 드레이를 위해 지옥 같은 나날들을 버텨 왔지만, 드레이는 기회가 보이자마자 이곳을 빠져나갔다. 자신을 남겨 둔 채.
감정이 복잡했다.
안도의 감정보다는 절망과 배신감이 더욱 커져 갔다. 레미아의 정신이 흔들리고 빈틈이 생기자 라오나드는 그 틈을 노렸다.
“결국 버림받았군.”
“……아니야.”
레미아는 부정했다.
드레이는 자신을 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레미아는 자신의 손으로 죄를 쌓으면서까지 드레이를 지키려고 했다.
“아직도 진실을 외면하려고 드는 건가?”
라오나드가 조소 지었다. 그 냉막한 눈빛에 레미아는 몸을 떨었다.
“제 안위만을 위해 너를 버리고 도망친 오빠가 너를 구할 거라고 믿는 건가? 너는 오빠를 위해 희생했지만, 그 오빠는 희생한 너를 이곳에 남겨 두고 버렸어.”
“아니라고―!”
유일한 버팀목이 사라지자, 레미아의 감정은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망가진 자만큼 세뇌하기 쉬운 이는 없었다.
* * *
그 뒤로 레미아는 신성 왕국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더는 저항할 의지도 기력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렇게 그녀는 신성 왕국이 원하고 바라는 성녀가 되었다. 그 뒤로도 수많은 실험들이 행해졌을 것이다.
“……녀석들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나도 몰라. ‘대의’, ‘선택받은 자’, ‘지하’ 같은 걸 떠들어대기는 했지만, 나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뿐이었지.”
“……고마워.”
드레이이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분노, 슬픔, 죄책감 따위의 감정들이 뒤섞였다.
‘혼자서 많이 힘들었구나.’
그것도 나를 위해서.
부끄러웠다.
오빠가 되어서 동생을 지켜 주지 못했다.
힘이 있었다면 녀석들에게 동생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고, 동생을 놔두고 도망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랑 레미아는 달라.’
레미아는 강했다. 이제 갓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다시금 자신의 부탁으로 과거를 끄집어내었다.
한 발짝 내딛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신성 왕국에서 도망치고 매일 같이 가슴 졸이며 살아온 자신과는 달랐다.
드레이는 차마 레미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났다.
“……고마워.”
“…….”
레미아는 대답하지 않고 드레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드레이가 몸을 돌려 방을 나서기 직전, 레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드레이의 몸이 멈췄다.
“구해 줘서 고마워.”
“……미안해.”
드레이가 문을 열고 나섰다. 드레이는 곧장 오르번이 있는 연구실로 찾아갔다.
연구실에 들어서자 여전히 막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마룡이 보였다.
그곳에는 오르번만 있는 것이 아닌, 에르미온과 데아티르도 함께하고 있었다.
셋은 넓직한 장소에서 여러 그림을 그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왔군.”
오르번이 고개를 돌려 드레이를 바라봤다. 드레이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셋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됐지?”
“레미아도 정확한 것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더군요. 제가 들은 것들은…….”
드레이가 레미아에게 들은 내용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이야기를 들은 에르미온과 데아티르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정신 나간 새끼들.”
“……혐오스럽군.”
에르미온과 데아티르는 신성 왕국을 향한 경멸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실체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추악했다.
“……그렇단 말이지.”
“감이 잡히십니까?”
드레이가 물었다.
에르미온과 데아티르 모두 마법에 관해서는 높은 권위를 쌓은 이들이었지만, 흑마법이란 분야에 한해서는 오르번과 견줄 수 없었다.
오르번은 그들이 마도의 길을 걷기도 전부터 알려져 있는 전설적인 흑마법사였다.
오르번이 우두커니 서서 드레이가 말한 정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역시 그런가.’
예상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정황들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북부로 가야겠어.”
검증을 위해서는 육안으로 확인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 * *
에단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은 정보 길드의 귀에도 들어갔다. 메이가 평정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실종?”
“……그렇습니다.”
정보원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가면 안의 동공이 길을 잃은 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어.’
그동안 봐온 에단은 괴물 그 자체였다. 그 어떤 계락과 모략도 정면으로 박살 내는 것이 바로 에단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메이는 에단에게 모든 것을 배팅했다. 수많은 상황들이 맞물려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메이가 정보원이 건넨 보고서를 확인했다.
전쟁의 양상은 블란테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화력과 백병전에서 승부가 되지 않았다.
성자 드레이의 힘은 성벽을 단번에 무너트릴 수 있었고, 마탑의 수장인 에르미온과 전투 마법사들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들을 유린했다.
모든 병력이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나마 발생한 사상자도 검은 칼날의 용병 몇 명이 전부였다.
승리가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그대로만 흘러가면 제국의 아성도 무너져 내릴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수많은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 황제가 함정을 파 두었다.
그리고 그 함정에 에단이 걸려들었다.
그게 끝이었다.
블란테는 지휘관을 잃었다.
병력은 만전의 상태였지만, 그 상황에서 맞부딪친다면 손해가 어디까지 번지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때 나타난 기사들.
죽지 않는 불멸의 기사. 그것은 죽음을 거부한 저주받은 자들이었다.
첸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미친 새끼!’
메이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황제가 얼마나 비틀려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그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모든 이가 비난하고 규탄할 것이다.
그리고 신성 왕국은 대중을 신경 써서라도 결코 제국의 행패를 묵인하지 못할…….
‘아…….’
사특한 것들을 억제해야 할 신성 왕국은 멸망했다.
그것도 블란테의 손에.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세상이 격동하고 있었다. 정보 길드는 격동하는 세상 속에서 가장 기민하게 반응해야만 했다.
“……나가 봐.”
“…….”
살짝 고개를 숙인 정보원이 방을 나섰다. 메이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에단.’
그 오만방자한 얼굴이 떠올랐다. 적일 때는 누구보다 무섭지만, 아군일 때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얼굴이었다.
‘돌아올 거라 믿어.’
메이가 알고 있는 에단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이가 아니었다.
* * *
에르미온과 데아티르, 그리고 오르번이 마법진을 이용해 신성 왕국으로 돌아갔다. 셋은 곧장 왕궁의 지하실로 향했다.
들어서자마자 정체 모를 악취와 음습함이 코를 찔렀다. 지하실의 온도는 외부와 달리 따뜻했다.
하나 오히려 적당한 온기가 더욱 악취를 가증시켰고, 몸을 끈적거리게 만들었다.
“불쾌해.”
에르미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마법을 전개하자 어둠이 걷혔다.
쥐새끼 무리가 빛을 보고 순식간에 도망쳤다. 에르미온이 본능적인 혐오감을 억누르고 시선을 돌리는 순간.
충격적인 광경에 에르미온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시체의 잔해들.
그리고 기하학적이고 기괴한 그림과 문양들.
‘이, 이놈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