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3화] 실종 (2)
리사가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에단과의 훈련을 통해 더욱 기민하고 경쾌해진 움직임이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쉰 에밀라의 표정이 달라졌다. 순간 에밀라의 눈빛이 한기를 머금었다.
스윽.
리사의 동공이 커졌다.
시야에서 에밀라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쌔신이 사용하는 발걸음이었다.
‘어디 갔지?’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리사가 눈을 굴리며 에밀라를 좇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야에 에밀라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 순간 리사의 머릿속에서 에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속임수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아냐?
― ……경험?
―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나는 감이라고 생각해.
― 감이라고? 너무 무책임한 소리 아니야?
― 생각하면 늦어. 찰나의 순간 판단할 수 있는 건 자신의 감이야. 본능이란 건 네 생각처럼 같잖은 게 아니야. 오감을 믿어. 내가 상대라면 어딜 공격할까. 내 약점이 뭐지? 상대의 표정, 근육의 움직임, 호흡을 읽는 것. 모두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그게 목숨이 걸린 실전에서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에단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개소리 하지 말라 그래.
사아악.
순간 리사의 몸에서 솜털이 곤두섰다. 에밀라의 위치는 여전히 미궁 상태였다. 에밀라는 기척을 흘릴 만큼 미숙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오롯이 본능.
리사는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어차피 그 외의 방법은 없었다.
캉!
몸을 비튼 리사가 목검을 휘두르자 강렬한 충격음이 울렸다.
에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놀란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이거 꽤나 놀라운걸.”
“칭찬…… 감사합니다!”
리사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틈을 주지 않는 빠르고 화려한 공격들. 에밀라는 침착하고 차분하게 리사의 공격들을 흘려 내고 있었다.
‘공격이 더 매서워졌어. 단순히 빠르다의 차원이 아닌…….’
훨씬 정교하고 날카로워졌다. 한 번의 실수가 패배로 직결될 것 같았다. 폭풍을 보는 것 같은 리사의 검에는 독까지 묻어 있었다.
‘그 사람 덕분인가.’
에밀라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인물.
자만하던 자신에게 수없이 패배와 좌절을 맛보게 해 준 인물.
에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에밀라의 눈빛이 순간 진지해졌다.
에밀라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마치 환각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순식간에 늘어난 잔상들.
리사는 실체를 구분할 수 없었다.
‘구분이 안 되면!’
모조리 부숴 버리면 그만이다.
리사가 목검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몸은 아직 한계까지 치닫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에밀라의 몸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어디지?’
이번에도 감을 믿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끝났어.”
리사의 배후를 잡은 에밀라가 리사의 목덜미에 목검을 들이밀었다.
“……하.”
허탈한 한숨을 내쉰 리사가, 들고 있던 목검을 떨어트렸다. 허무한 패배였다.
“……방금 그건 뭐였나요?”
“글쎄.”
에밀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신을 놀리는 듯한 표정에 리사가 뾰로통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짜증 나.”
“너무 그러지 마. 나도 꽤나 놀랐으니까. 그래도 검술 교수인데 벌써 학생한테 패하면 체면이 안 살지 않을까?”
“……후우, 알겠습니다. 이기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어도, 한 방 먹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리사의 표정에서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 나왔다.
에밀라는 그런 리사를 바라보며 귀엽고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빤히 보이네.’
에밀라가 리사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배고프지?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힘없는 미소를 지은 리사가 에밀라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짧은 대련이었지만, 몸을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배가 고팠다.
“그래서 교수님, 아직도 오빠 좋아하는 건 맞나요?”
“……밥 먹기 싫니?”
“와, 개치사하네.”
“말이 짧다.”
“근데 이해가 안 되는 게, 쌤은 오빠한테 맞기만 했는데 왜 좋아하시는 거예요? 뭐 취향이 그런 쪽인가?”
“진짜 굶고 싶니?”
“죄송합니다.”
* * *
“이건 또 뭔 수작질이냐?”
“별거 아니야.”
“진짜 보면 볼수록 좆같은 새끼네.”
에단이 사납게 웃었다. 늪지대에 몸이 빠지고 있었다. 늪에서는 어둡고 음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은 마나와도 유사한 기운이었기에 죽은 나무로 흡수하려고 해 봤지만 죽은 나무는 반응하지 않았다.
‘뭐지?’
에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음, 죽은 나무가 무용지물이라 조금 당황했나?”
꿈틀.
크리스토의 말에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 정곡을 찔렀나 본데. 이것 참 기분이 좋군.”
“어디서 잘난 척이야?”
에단의 눈이 번들거렸다.
에단은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몸은 점점 늪에 빠져들고 있었지만, 아직 체내의 있는 마나는 반응했다.
더불어 아슬란의 신성력도 운용이 가능했다.
우우웅.
강대한 기운을 머금은 아슬란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에단이 기운을 방출하려는 순간 크리스토가 손을 뻗었다.
[부정]
크리스토의 입에서 사특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순간 에단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에단이 재빠르게 아슬란을 휘둘렀다.
“…….”
에단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출수하려던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
에단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뭔 짓거리를 했냐.”
“별건 아니야. 위험한 짓을 벌이려고 하길래 어쩔 수 없었지.”
크리스토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으래?”
에단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절망] [좌절]
에단도 룬어를 읊조렸다. 크리스토의 눈이 커졌다.
그가 순식간에 바닥을 박치고 늪지대에서 빠져나갔다. 에단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이(邪異)한 기운이 크리스토를 뒤쫓았다.
“하하하하! 이건 예상 못 했는데?!”
크리스토가 광소를 터트리며 검을 휘둘렀다. 검은 기운은 크리스토의 검격을 맞고도 흩어지지 않았다.
“이거 정말 낭패야.”
말하는 것과 반대로 크리스토의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에단은 저 웃는 낯짝을 뭉개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우웅.
그 순간 에단의 발이 점점 깊게 빨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검은 늪지가 스산한 빛을 뿜어낸다.
― ……이거 좋지 않아.
침묵을 고수하던 키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나도 할 수 있거든? 이거 왜 안 빠지는 거야?”
― 저주가 스며들고 있어. 네 몸이 가진 내성 때문에 피해는 주지 못하고 있지만…… 대체 이걸 펼치려고 몇 명을 죽인 거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나갈 방법은 없나?”
― 기다려 봐. 지금 신성력이 방해받고 있어서 제대로 된 대처가…… 잠깐만…….
키아나의 말끝이 흐려졌다.
에단의 룬어에 쫓기던 크리스토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거, 더 즐기고 싶었는데 정말 아쉽게 됐어.”
쩌억―!
바닥이 갈라진다. 이를 악문 에단이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수많은 손들이 에단의 팔과 다리를 붙잡았다.
‘제기랄!’
에단이 욕설을 토해 냈다.
아슬란을 휘두를 때마다 검은 손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으나 끝도 없이 달라붙는 손들을 모두 떼어 낼 수 없었다.
늪이 사라진다. 아래쪽에 보이는 건 심연뿐.
후웅!
에단이 아슬란을 휘둘렀다.
아슬란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은 암흑 속에서 피어나는 촛불처럼 잠깐 주변을 밝혔지만, 이내 어둠에 잠식당했다.
에단이 바닥에 추락한다. 에단은 절망에 빠지지 않고 빠르게 판단했다. 앞은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크리스토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었지만 중지를 치켜들었다.
“넌 나중에 뒈졌어.”
그 웃는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키에엑.
순간 죽은 나무가 미약하게 반응했다. 그게 에단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쿵.
바닥이 닫혔다. 끔찍한 늪지대가 사라졌다. 에단이 내뱉은 룬어도 소멸했다.
“이런.”
평지에 서 있는 크리스토가 이마를 닦아 냈다. 준비해 둔 술식이 끝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할 뻔했다.
크리스토는 지하에 떨어지면서 에단이 내뱉은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중지를 치켜들면서 소리쳤던 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왠지 모르게 기대가 됐다.
에단이 사라졌다. 블란테의 대군은 에단이 없어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에단 님?”
르니엘이 동공이 길을 잃었다.
기사와 병사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르니엘이 활시위를 당겼다. 바람의 정령과 막강한 마나가 활시위에 매겨졌다.
오르번이 지팡이를 들고, 에르미온이 손을 뻗었다. 허공에 어지럽고 난해한 마법의 문양이 빼곡하게 그려졌다.
크르르.
휴고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기사들도 칼을 뽑았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당장 저 새끼의 목을 따고…….”
검은 칼날의 단장인 사미라가 투박한 양날도끼를 들고 으르렁거렸다.
“아아.”
그때 크리스토의 목소리가 블란테 진영에 울려 퍼졌다.
“지금 와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잠깐 휴전을 했으면 하는데 말이야.”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발언에 르니엘이 이를 갈았다. 당겨 놓은 활시위를 놓으려던 그 순간.
짙은 안개가 내리깔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백을 넘는 검은 갑주의 기사들이 피처럼 붉은 안광을 빛냈다.
블란테를 상징하는 색도 검은색이었지만, 저들의 검은 갑옷은 그것보다 훨씬 더 어둡고 불길했다.
“뭐, 원한다면 전면전을 해도 괜찮지만.”
엄청난 거리에도 크리스토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자신 있겠어?”
명백한 도발.
계속 들을 가치가 없었다. 블란테 진영의 병력들이 당장에라도 달려들려고 했다.
군사의 총지휘를 맡은 에단이 사라졌다. 이제 병력의 책임자는 첸이었다.
에단이 사라지며 동요한 것은 첸도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첸은 동요를 내색하면 안 되는 위치였다.
누구보다 침착하게 군대를 진두지휘해야 할 지휘관이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만큼 최악은 없었다.
그는 냉정하게 판단해야만 했다.
‘원거리에서 요격했어야 하나?’
불가능하다. 상대가 그 정도 방비도 안 했을 리 없었다. 넓은 평야에서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대군.
그리고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에단조차 빠져나가지 못한 검은 늪.
이 모든 건 함정이었다. 불길함을 느낀 에단이 홀로 가지 않았다면 모든 병력이 순식간에 증발할 수도 있었다.
노기가 치밀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에 휘둘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적진에 뛰어들어 저 오만한 황제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첸은 주변에서 얼음 기사라고 부를 정도로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늘 평정을 유지하는 이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첸의 사나운 살기에 곁에 있던 기사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뿌드득.
첸이 이를 갈았다. 무감정한 얼굴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전군 정지.”
첸의 목소리에서는 한기가 흘러나왔다.
“회군한다.”
첸은 결국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