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화] 실종 (1)
아카데미는 혼란에 휩싸였지만 정상적으로 운영됐다. 중단되었던 수업도 다시금 재개되었다.
하지만 남은 학생의 숫자는 많지 않았는데, 대다수의 학생들이 자신의 가문이나 고향으로 돌아간 탓이었다.
전쟁이 벌어졌으니 걱정하지 않을 부모는 없었다.
그럼에도 아카데미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학생들이 있었기에 에밀라와 크러쉬, 그리고 그 외 몇 명의 교수진들이 학생들을 지도했다.
숫자가 줄어든 탓에 수업을 진행함에 있어 부담이 적었다. 하지만 수업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이 마법의 원리에 관해서는…….”
크러쉬는 더 이상 권위 의식에 빠져 있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수많은 마법사들과 교류하면서 그는 겸손함을 배웠다.
수업의 질이 올라갔다.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학생들은 크러쉬의 말에 집중하면서 노트에 필기하고 있었다.
잡담도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학생들과 함께하던 드레이와 가토, 다른 블란테의 기사들이 전쟁에 참전했다.
굳이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소식들이 들려왔다. 제국령에 있는 성과 영지들이 함락당했다는 소식들이었다.
전쟁은 아름답지 않았다.
많은 피가 흐르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블란테는 멈추지 않았다.
학생들은 불안에 떨었다.
블란테가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많은 진통과 부작용이 뒤따를 터였다.
만약 블란테가 제국을 먹고 온 힘을 다해 안정시키려 노력한다면 조금은 덜 혼란스럽겠지만.
크러쉬는 브란테가 그러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블란테가 제국을 흡수할 리는 없어.’
아무리 블란테의 무력이 막강하다고 한들 제국은 삼키기에 너무 큰 먹잇감이었고, 삼킬 명분도 없었다.
신성 왕국이 멸망한 지 많은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다. 교단에 속해 있는 이들이 무너진 왕실에 들어가 시신들을 수습했다.
눈에 반쯤 파묻혀 있는 시체들을 모두 수습하고 나서야 공식적인 발표가 나왔다.
신성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대륙의 국교의 중심이 한순간에 지도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블란테를 두려워했다. 전쟁이 발발한 지 단 하루 만에 거대한 힘을 지닌 왕국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이제 사자의 송곳니는 제국을 향했다.
승자를 벌써 점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전쟁에서 누가 승리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을 거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 * *
에밀라의 수업을 듣고 있는 리사에게 다가오는 동급생은 없었다. 리사는 블란테의 적통이었기 때문이다.
리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에밀라의 수업은 체계적이고 유익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은 대표적으로 방어와…….”
에밀라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검술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도하는 검술의 기틀은 기본적인 것들이었다.
그 이외의 것들은 학생들의 질문을 그때그때 피드백하며 이루어진다.
리사는 수업이 지루하다고 느꼈다.
그다지 집중도 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그녀의 호승심을 자극할 만한 상대는 없었다.
안전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슷한 또래의 가토와 휴고는 목숨을 걸고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 리사는 안전하고 아늑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다.
리사는 그 사실이 매우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뭐가 검술이냐.’
검이란 것은 어떤 아름다운 수식어를 붙여도 결국에는 누군가를 해하는 무기였다.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리사는 검을 수련했다. 검의 끝을 보겠다는 장대한 열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그녀의 곁에 검이 있었고, 그녀에게 검의 재능이 있었기에 검을 들었을 뿐이다.
재능이 있으니 즐거웠다.
남들의 칭송과 경탄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몽글거렸다.
아카데미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힘을 숨기고 있기에 동급생이든 선후배든 전부 같잖게 느껴졌다. 진심으로 붙으면 모두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작디작은 우물 속에서의 오만함이었다.
리사는 연이어 패배했다.
에단에게, 또 가토에게.
종이 한 장 차이도 아니었다. 손을 쭉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가문에서는 발끝에도 못 미치던 녀석들에게 리사는 패배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분이 풀리지 않아 잠을 자지 못했다. 매일같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원인을 찾아 헤맸다.
수련을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은 타이트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리사는 혹독한 훈련을 소화해야만 했다.
에밀라는 리사와 견줄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보다 더 많은 경험을 지닌 좋은 스승이었다.
리사는 자신의 성장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찬란한 재능은 블란테가 아닌 곳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단과 가토에게 패배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리사의 기억에 둘의 재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그녀와 동일 선상에 서는 것 자체가 불쾌할 정도로.
어떻게 그렇게 성장할 수 있지?
리사는 의문을 느꼈다. 그때부터 리사는 에단을 향한 혐오와 경멸을 멈췄다.
이제 그녀는 에단을 친오빠로 여겼다. 그리고 자존심을 굽혀 가르침을 부탁했다.
짓궂은 장난을 치기는 했지만 에단은 리사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개 같은 새끼.’
그때 당시를 떠올리자 기가 막힌 리사가 실소를 터트렸다. 에단의 수련법은 그야말로 무식하기 그지없었다.
― 뭐 자기 딴에는 체력이야 충분하다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한참 부족해.
에단의 말이었다.
당시의 리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에단의 말대로 체력에는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감정이 표정에서부터 드러나네. 어디 한번 해 볼까?
에단이 이죽거리며 도발하자 리사는 에단의 제안에 응했다.
― 허억! 허억! 허억!
결과는 참패였다. 에단은 여러 종목을 섞어 체력을 테스트했다.
버피 테스트, 하이 점프, 전력 질주.
― 허억! 허억! 허억!
리사는 에단의 설명에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바닥나 버렸다.
그 이후로 에단은 정말 참혹할 정도로 리사를 굴렸다. 지금껏 혹독한 훈련은 훈련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 공격을 보고 반응하면 늦어. 작은 속임수 하나에 크게 반응할 거냐?
에단의 지적이 이어졌다. 리사의 얼굴이 울분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리사는 눈이 좋다.
상대의 공격이 나오기도 전에 공격의 경로와 궤적이 그려진다.
하지만 에단과 대련하면 모든 궤적이 어지럽게 헝클어진다. 마치 어지러운 소용돌이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 공격을 가늠할 수 없으면 마구잡이로 휘두르지 말고 흐름을 끊어.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 지금 뭐 하는 거야? 흐름을 끊고 다시 시작하라고 했더니, 되도 않는 욕심을 부리고 있어? 뒈질래?
― 자세가 무너지잖아. 표정 관리 안 해?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가 얼굴에서 다 드러나고 앉았네. 쯧.
― 평정심이란 단어를 모르나? 빠르고 세게만 휘두르면 끝이야?
신랄한 지적이 이어졌다. 하지만 에단의 훈련은 그만큼 효과적이었다.
리사의 얼굴에 멍과 상처가 늘어났다.
리사는 에단의 지도를 받고 매일같이 성장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성장세에 놀랄 정도였다.
― 오늘 대련은 언제…….
리사는 그때 봤던 에단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얼음장처럼 싸늘한 표정.
에단이 리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심해처럼 깊은 동공을 보자 저도 모르게 몸이 굳고 말았다.
―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어울리지 못하겠다.
― ……왜?
― 할 일이 있거든.
에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조차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날 에단은 블란테의 차기 가주로서 권한을 행사했다.
병력이 모였다.
본격적인 전쟁의 서막이었다.
‘가토 그 녀석도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겠지.’
에단이 훈련 중에 늘 하던 말이 있었다.
― 대련만 백날 해 봐야 제대로 된 실전 한 번에 미치지 못해. 네가 왜 가토한테 졌는지 이해가 안 돼?
― …….
― 경험. 찰나의 실수가 승패를 가르는 경험이 없어서야. 네가 어째서 그렇게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검술을 구사할 수 있는지 알아? 네 성향이 그래서? 아니, 이게 대련이기 때문이야.
리사는 에단의 말이 듣기 싫어, 더욱 맹렬하게 에단에게 돌진했다.
감각이 곤두섰고, 타이밍도 완벽했다. 에단이 던지는 가짜 공격도 인지할 수 있었다.
에단의 목검과 리사의 목검이 부딪치려는 순간.
에단이 가볍게 리사의 공격을 피하며 복부를 걷어찼다. 리사는 순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에단이 리사의 목을 향해 목검을 겨눴다.
― 지금 이게 실전이었으면, 너는 이 자리에서 죽었어.
진심 어린 충고이자, 조언이었다.
리사는 순간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펜을 부러뜨렸다.
뿌득!
펜이 부러지는 소리에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리사는 멋쩍은 표정과 함께 뺨을 긁적였다.
그리고 그런 리사를 에밀라가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에밀라는 리사를 잠깐 호출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네? 아, 뭐…….”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리사는 에밀라를 따라갔다. 에밀라는 교무실이 아닌 건물 밖 교정으로 향했다.
교정은 아름다웠다.
화단과 나무에 핀 꽃들에서는 좋은 향기와 함께 생기로움이 흘러넘쳤다.
하지만 리사에게는 매일 보는 정원일 뿐이었다. 리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교정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이내 에밀라도 리사 곁에 자리를 잡았다.
“날이 좋네.”
“……그렇네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리사는 지금 이 껄끄러운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었다. 닭살이 돋을 것 같다.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별 이유는 없고…… 그냥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이유가 없으면 이만…….”
“내 수업이 별로였니?”
“……네?”
몸을 일으키려던 리사가 순간 고개를 돌려 에밀라를 바라봤다. 에밀라와 리사의 눈이 마주쳤다.
리사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딱히 별로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요즘 계속 집중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전에는 에단 교수님에게 따로 훈련을 받던데?”
“음…….”
리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그시 리사의 얼굴을 바라보던 에밀라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대련 한번 할까?”
“……네?”
리사가 눈을 깜빡거리며 또다시 되물었다.
* * *
사용하지 않는 연무장에 리사와 에밀라가 마주 섰다. 리사는 허공에 대고 목검을 붕붕 휘둘렀다.
가벼운 손짓이었지만 들려오는 파공성은 섬뜩했다.
반면 에밀라는 목검을 추욱 내려놓은 채 리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교수님, 뜬금없이 대련을 하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글쎄……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네.”
에밀라가 어색한 미소를 짓자, 순간 리사는 장난기가 동했다.
“마음을 잘 모르겠다라…… 교수님은 아직도 오빠를 좋아하고 있나요?”
“……뭐?”
에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 순간 리사가 재빠르게 돌진했다.
“빈틈 발견!”
리사가 에밀라를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