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화] 침략 (6)
“저, 전 병력이라고요?”
헨리가 기겁했다.
힘을 깨우치고 지형을 조작하는 데 엄청난 재주를 보이기는 했으나 그것에도 엄연히 한계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만한 대군을 성벽 너머까지 옮기려면 얼마나 대규모의 지형 변경을 일으켜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헨리가 난색을 표하고 있을 때, 다행히도 적군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웅.
굉음과 함께 굳건하던 성문이 열렸다. 아군 측 병사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성문이 열렸습니다.”
에단도 고개를 돌려 열린 성문을 바라봤다. 적군 병사들이 성문을 나서고 있었다.
‘뭐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공성전이라는 이점을 포기하고 기어 나오다니…….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공성전의 특성상 수성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더군다나 제국의 성벽처럼 높고 견고한 난공불락의 요새라면 더더욱.
하지만 녀석들은 그 어마어마한 이점을 포기하고 성벽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전열을 정비해.”
에단이 명령에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통제했다.
“하하하! 저 머저리들이 정신이 나가 버렸나?”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병사들과 용병들이 제국군을 보며 비웃었다. 저들의 돌발 행동이 같잖게만 느껴진 것이다.
“……도련님.”
네이드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이드, 오르번. 정찰을 부탁해도 되겠나?”
네이드와 오르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느낌이 좋지 않을 때면 항상 변수가 일어났다.
에단은 차게 식은 눈으로 적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국군 병사들이 진격하고 있었다.
대열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과도 같이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자진해서 공성전을 포기했다.
병사들은 지휘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반발이 일어났고, 탈영병이 속출했다.
하지만 탈영을 시도한 탈영병은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다.
카이제르의 병사들이 말 위에서 묵묵히 이동했다. 병사들에게 기사의 존재는 하늘과도 같았다.
그것도 검술 명가로 알려진 카이제르의 기사라면 더더욱.
“돌격해라.”
스산함이 감도는 목소리였다. 병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아아아아―!
두려움을 잊기 위한 거센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병사들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바바바밧!
순간 하늘이 검게 물들었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병사들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화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호우처럼.
툭.
병사들이 무기를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실성한 듯 웃었다. 이건 개죽음이었다.
“씨, 씨발…….”
병사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죽어 나갔다. 병사들은 죽어 가면서도 증오를 잊지 않았다.
화살 비를 맞은 병사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조악한 방패로는 엘프 전사들의 화살을 막아 낼 수가 없었다.
엘프들이 다시금 활시위를 당겼다.
남은 병사들이 더 다가오면 전투 마법사들도 막강한 화력을 뽐낼 것이다. 굳이 기사들과 병사들이 맞부딪칠 필요도 없었다.
‘뭐지?’
에단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너무 이질적이었다.
이건 병사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자포자기?
아니다.
에단이 알고 있는 크리스토는 궁지에 조금 몰렸다고 모든 걸 포기하고 자포자기할 성격이 아니었다.
놈은 교활하고 잔혹했다. 그리고 교만하고도 오만했다.
크리스토는 결코 이번 전쟁을 이렇게 끝내지 않는다.
“도련님.”
네이드와 오르번이 돌아왔다. 네이드는 전설적인 어쌔신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전면전에 대한 경험은 부족했다. 에단의 오르번을 향해 물었다.
“알아낸 건?”
“저 녀석들은 제물이야.”
“제물?”
“아직 가정에 불과한데 상관없나?”
“그 가정이 아마 사실일 것 같은데.”
“동감이군.”
쓰게 웃은 오르번이 말을 이었다.
“피를 먹은 대지가 요동치고 있어. 사전에 무슨 작업을 해 뒀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규모의 술식을 준비 중인 것 같군.”
“술식? 흑마법인가?”
“저건…… 흑마법 이전에 있던 것들이야. 훨씬 더 원초적이고 사특하지. 네가 썼던 고대의 단어처럼 말이야.”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파훼는 불가능한가?”
“정확히 판별은 힘들지만…… 이미 술식이 가동되었다면 불가능해. 이 정도 규모의 술식이라면 드래곤 로드가 와도 힘들겠어.”
오르번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쯧.
혀를 찬 에단이 시선을 돌려 진군하는 적군을 바라봤다. 지휘관들은 에단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끝낼 수 있음에도 백병전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결국 에단은 결단을 내렸다.
“쏴라. 흔적도 없이 쓸어버려.”
명령이 떨어지자 엘프들이 활시위를 놓았다. 하늘이 다시금 검게 물들고, 정령을 머금은 화살의 소나기가 쏟아졌다.
제국군들은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 갔다. 남은 잔당들은 전투 마법사가 나섰다.
에단이 준비해 둔 마석의 양은 넉넉했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난사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가장 화력이 강하기로 유명한 화염 계열 마법사들이 마법을 전개했다. 강한 열기가 전장을 휩쓸었다.
잔당들은 비명을 토해 내며 타 죽어갔다.
시체가 익는 소리에 아군들조차 인상을 찌푸렸다. 엄청난 연기가 치솟았다.
“계속. 멈추지 마.”
에단이 연달아 명령했다. 마법사들이 화력을 집중했다.
엄청난 마나가 소모되었지만 마석의 양에는 여유가 있었다.
포악한 불길이 쉬지 않고 타오른다.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듯이 맹렬하게.
에단이 묵묵히 그곳을 응시했다.
불꽃이 사라지고 폐허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게 그을린 바닥과 잿더미조차 남지 않은 시체가 보였다. 에단은 진군을 명령하지 않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불길함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에단이 문득 회군을 고려했다. 그만큼 지금 느껴지는 감각이 좋지 않았다.
‘지금 회군해도 자원의 여유는 충분해.’
군대의 사기는 충만하다. 연이은 승전이다. 근처에서 주둔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제국은 말라죽을 것이다.
아무리 막대한 부를 축적한 제국이더라도 고립되어서는 견딜 수가 없다.
에단에게는 방법이 많았다. 시간을 들여 대륙의 거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패로 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만큼 에단에게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아카데미도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거의 모든 병력을 이끌고 진격했지만 아카데미에는 아직 대륙 최강의 괴물이 남아 있었다.
‘군대를 보낼 수는 없어.’
에단조차 이 불길함이 무엇인지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고작 불길하다는 기분 하나 때문에 진군을 못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에단은 고민했다.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선수 시절 류태신은 홀로 옥타곤에 올랐다. 그것에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면 그만이었다.
쏟아지는 야유와 비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옥타곤의 문이 닫히고 레프리가 경기의 시작을 알리면 결국 철창에는 나와 상대만 남는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결국 승자는 가려진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순간의 실수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에단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생각은 없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내가 간다.”
“도련님!”
네이드가 만류했다.
네이드뿐이 아니었다. 후미에서 기사들의 진영을 배치하며 부관 역할을 수행하던 첸도 에단을 말렸다.
“내가 가장 적합해.”
에단은 죽은 나무의 힘과 룬어를 지니고 있었다.
크리스토가 무엇을 준비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걸 파훼할 수 있는 이는 에단밖에 없었다.
‘이게 편해.’
스스로의 행동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
에단에게는 그것이 편했다. 에단이 명령하자 병력들이 홍해 갈라지듯 좌우로 물러났다.
“에단 님!”
르니엘이 달려왔다. 르니엘은 촉촉이 젖은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차,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르니엘의 만류의 에단이 실소를 흘렸다. 이 맹한 여자의 마음이 썩 갸륵했다.
“너는 기억하잖아? 내가 거기서 어떻게 살아나왔는지.”
세계수의 마나를 몸에 받아들일 때 에단은 수없이 죽음의 순간들을 넘어왔다.
에단은 자신이 있었다.
본인의 능력에도, 그리고 운에도.
에단이 씨익 웃었다. 특유의 거만한 미소였다.
이목이 쏠렸다. 수많은 눈동자가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선은 우려였다. 익숙한 얼굴들도 보였다.
가장 처음 에단이 수하로 주워 온 휴고.
그 겁 많던 애송이가 이제는 어엿한 전사가 되었다. 이제 휴고는 더 이상 얼굴의 흉터를 숨기지 않았다.
가토는 블란테의 기사들 사이에서도 꿀리지 않는 기량을 보여 줬다. 그는 더 이상 한낱 수습 기사가 아닌, 어엿한 블란테의 기사였다.
그 밖에도 카론, 헨리, 줄리엔, 에르미온 등등.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 모두 썩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지만, 에단을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이들이었다.
‘나쁘지 않네.’
지금 느끼는 미묘한 감정이 나쁘지 않았다. 에단은 주먹을 움켜쥐며 감정을 꾹 억눌렀다.
‘전쟁은 승리한다.’
이건 맹세였다. 감히 자신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걱정들 말고 있어.”
에단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에단은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그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오르번은 물끄러미 걸어 나가는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르번이 눈을 감고 마법을 준비했다. 오래된 흑마법사인 오르번은 수많은 흑마법을 알고 있었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오르번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저건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만 이런 게 아니야.’
느껴지는 기운은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광범위했다. 오르번도 처음 겪는 규모였다.
에단이 검게 그을린 현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반가워.”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크리스토가 삐딱한 자세로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별로 안 반가운데?”
에단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크리스토는 짐짓 과장된 포즈로 말했다.
“이런, 상처 되는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 아닌가? 이래 봬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고.”
“그래? 그런데 이거 어쩌지? 내 취미 중 하나가 마음 여린 사람 가슴을 후벼 파는 거거든.”
“그것참 고약하면서도 악질적인 취미네.”
크리스토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대체 뭘 하려는 생각이지?”
“꽤나 놀랐어. 번번이 실패하긴 했지만 이쪽에서도 대비를 하고 있었거든. 뭐 결국 허사로 돌아가서 이 지경까지 왔지만.”
“그럼 깔끔하게 뒈지는 게 어때?”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아직 놀이는 끝나지 않아서 말이야. 나는 더 즐기고 싶어.”
그 순간 크리스토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에단이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후웅!
달려드는 에단의 몸이 멈췄다. 에단이 내디딘 지면이 끈적한 늪처럼 바뀌어 있었다.
검은 늪은 점점 더 어두운색을 띠기 시작했다.
마치 깊디깊은 심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