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화] 침략 (4)
또였다.
같은 이야기다.
‘인간이 아니다라…….’
에단이 옅은 실소를 흘렸다. 육체적인 강함이 아닌, 이번에는 조금 더 본질에 가까워진 물음이었다.
죽은 나무.
인간이 가질 수 없고, 탐해서는 안 되는 힘.
이들이 내뱉는 게 허언은 아닐 것이다.
‘난, 아니, 에단 블란테는.’
인간이 맞는가에 대한 물음.
소설 속 에단 블란테는 주인공에게 살해당한다. 엑스트라 악역이니 놀라울 건 없는 이야기다.
‘추후에 흑막으로 나타난다는 개막장 전개가 아닌 이상.’
이 몸뚱이가 인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역시나 가장 많이 체감할 수 있는 것은 본인 스스로였다.
에단이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처음 눈을 떴을 때의 비대한 몸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블란테의 혈통이 지닌 육체의 잠재성은 인정한다.
시험 삼아 그 반증으로 무지막지한 무게로 쉬지 않고 뜀박질을 해 댔지만, 관절이 상하기는커녕 더 멀쩡해졌다.
회복력과 잠재력.
이 모든 것들은 에단이 경험한 적 없는 수준이었다.
류태신이 살던 현대와 비교하면 인간이 아닌 수준이기는 했다.
‘하지만 여긴 어디까지나.’
책 속의 세계.
검과 창, 그리고 마법이 난무하는 시대였다. 그것에 빗대어 봤을 때 인간을 초월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잠재력은 있었으나, 이 몸의 잠재력을 끌어낸 것은 어디까지나 피를 토하는 에단의 노력이 뒤따랐다.
‘나는 인간이야.’
그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카이나와 오르번은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에단이 지닌 힘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나무, 그리고 신성력.
에단은 이 힘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나보다도 먼저 쓴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지.’
주인공.
강한수.
보잘것없는 양판소의 내용답게 강한수는 소설 속에서 모든 기연과 기물들을 휩쓸어 갔다.
죽은 나무와 성검도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선례가 있기에 에단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 에단은 순서만을 조금 바꿨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추측할 수 있는 건.’
강한수든, 류태신이든 결국 이 세계에 속한 이들이 아닌 외부인이란 사실이다.
본질은 다른 세계에 속한 이.
‘그걸 보고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건가?’
에단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후우.”
에단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천천히 정리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페온.’
페온은 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가문이라는 것을 빌미로 에단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과거를 되짚어 보면 페온은 언제나 에단의 몸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에단은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존심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 남에게 몸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매우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타이탄이라.’
황제와 지하 놈들을 상대하기도 전에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꽤나… 흥미로웠다.
“신성 왕국이 수인들에게 욕심을 내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
― 그래. 얘기를 들어 보니 어느 정도 성과는 내던 것 같군. 아마 그 실험체가…….
“휴고와 렉사르 같은 녀석들이란 거군.”
흔한 클리셰다. 소설 속에 들어온 판국에 그런 걸로 일일이 놀라지는 않는다.
이제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휴고와 렉사르는 수인의 형질을 띠면서도 수인과는 달랐다.
싸워 보면 알 수 있었다.
톱니바퀴가 맞아떨어진다. 머릿속을 찜찜하게 만들던 것들이 하나둘씩 맞물려 엉켜 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죽은 나무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속한 이방인이기 때문.
신성 왕국이 유독 과도할 정도로 수인들을 배척한 것은.
‘타이탄을 쫓았기 때문인가.’
확실히 그쪽이 훨씬 타당성이 느껴졌다. 신을 숭배하며 고결함과 숭고함을 표방하는 녀석들이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성기사들과 사제들의 배출이 어려워지는 마당에 성녀라는 간판이 등장했다.
‘실험이 성과를 보였다고 가정을 한다면.’
실패작인 휴고와 렉사르와는 무엇이 다른가.
둘은 뛰어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과 수인 수준의 신체 능력과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에단이 상대했던 그 괴물과는 차원이 달랐다.
‘시간을 끌었으면 결국 졌겠지.’
에단은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성녀의 존재.’
달라진 것은 그것 하나뿐.
신성 왕국 놈들은 성녀를 이용해 무언가를 추가하고, 결국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그 결과물을 페온이 데려간 건가?’
하.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어찌 보면 페온 덕에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괘씸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충 어떻게 할지 감이 잡히는데.”
에단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추론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실타래가 풀린 기분이다.
―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에단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고 싶지? 페온을 쫓고 싶은 거라면…….”
― 미쳤어?
카이나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 말했잖아. 타이탄은 결국 허상에 불과하다고. 그 씹새끼가 감히 내 뒤통수를 쳐? 왕년에 그렇게 내 꽁무니만 따라다니던 변태 새끼가…….
카이나가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에단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재수 없는 면상 한번 후려쳐 보자고.”
계획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 * *
성녀, 레미아가 눈을 떴다.
드레이는 레미아가 눈을 떴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스윽.
침대에 앉아 있는 레미아가 드레이를 응시했다.
먹물이 낀 것처럼 탁한 동공.
레미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드레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
드레이의 동공이 길을 잃은 것처럼 흔들렸다. 황금색 동공에 초췌한 레미아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나, 나는…….’
드레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강하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사과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레미아의 얼굴을 보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과거 드레이는 도망쳤다. 어떻게 스스로를 변호해 봐도 그것은 궁색하고 역겨운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드레이는 여동생을 구하지 못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여동생을 외면하고 제 한 몸 건사하고자 도망쳐 나왔다.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몸을 숨기는 와중이었지만 친구를 사귀었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다.
여동생이 고통받고 있는 와중에도.
자괴감이 차오른다. 역겨웠다.
당장에도 속에 있는 것들을 게워 내고 싶었다.
“하아, 하아…….”
드레이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레미아에게 다가가려 들었다. 드레이가 손을 뻗는 그때.
드레이는 보았다. 레미아의 눈에 공포가 서리는 것을.
레미아가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이불을 꽈악 붙잡는다.
“아, 아아…….”
레미아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소리를 내었다. 드레이가 뻗던 손을 회수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방 안을 빠져나갔다.
쿵.
문을 닫은 드레이가 한참 동안 문에 기대었다. 드레이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 * *
레미아는 눈을 떴지만 그 누구와 접촉도 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같은 여성인 시녀들과 의료인들이 나섰음에도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에단은 레미아와 외부인의 접촉을 차단시켰다.
‘당분간은 그게 낫겠어.’
어차피 레미아의 존재는 지금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신성 왕국은 멸망했고, 사람들은 신성 왕국과 성녀들을 타락한 배교자들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드레이의 충격이 적지 않아 보이기는 했으나, 개인의 감정 상태까지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었다. 에단은 최근 검은 칼날을 이끄는 단장인 사미라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제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군대가 소집되었다. 미리 준비하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밀집되었다.
군대의 진군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우려 섞인 시선을 보였다. 이제는 정말 뒤가 없는 전면전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병력은 성벽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증거였다.
에단은 여유로웠다. 진군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다.
에단은 온순하게 이동하지 않았다.
군대의 유지는 엄청난 재화가 소모된다. 사미라가 용병 길드를 장악했다고는 하나, 금화를 지급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블란테가 축적한 부는 많았지만, 대규모 군대의 유지는 쌓아 둔 부가 급격히 소모될 정도로 많은 지출을 필요로 했다.
한니발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 상황이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보급만으로 충당하기에는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에단은 더 이상 정의의 사도를 표방하지 않았다.
백기를 들지 않은 황제의 봉신들과 성주들은 처절하게 보복했다.
이건 명분과 실리를 위한 전쟁이 아닌 한쪽의 말살을 위한 전쟁이었다.
에단은 알량한 인정이나 자비심 따위를 부리지 않았다. 그저 두려울 정도로 잔혹하게 각인시킬 뿐이었다.
너희들이 건드린 게 누구인지를.
산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검은 사자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같잖은 공성전을 시도하던 성주와 영주들은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에단과 드레이의 검격 한 번에 견고한 성벽이 무너져 내린다. 그러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장거리에서는 아큐르와 마탑의 전투 마법사들이 마법을 뿌렸고, 중거리에서는 엘프 궁수들이 정령의 힘이 깃든 화살들을 쏘아 댔다.
그렇다고 중기병을 투입해 적진을 헤집을 수도 없었다.
“괴, 괴물들이야!”
크르릉.
말은 감각이 예민한 동물이다. 철저한 훈련을 통해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군마들조차 수인들의 맹렬한 야성을 견딜 수는 없었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성과 요새는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에단은 민간인의 피해는 최소화시켰지만, 그 외 수뇌부들에게는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포로 따위는 필요 없었다. 블란테는 제국에게 금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블란테가 원하는 것은 피였다.
대륙이 피에 물들기 시작했고, 소문은 빠르게 번져갔다.
대륙민들은 블란테의 압도적인 무력에 두려워하면서도 경외하기 시작했다.
진군하는 군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피를 보기 시작하자 팽팽한 분위기가 더욱 살벌해졌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병사들과 기사들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네이드는 우려 섞인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이번 전쟁의 수장을 자처했다.
이번 일을 벌인 것은 에단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죽은 적군들의 숫자만 벌써 수천을 넘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황제가 기거하고 있는 제국의 본성뿐이었다. 에단은 흔들림 없는 지휘관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고작 20대를 갓 넘은 나이의 앳된 얼굴에서 백전노장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