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화] 침략 (3)
대륙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폭풍 전야.
그것이 대륙의 정세를 말해 주고 있었다. 병사들이 제국에 모이기 시작했다. 정규군과 징집병 할 것 없이 모든 군인이 모였다.
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군대는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 자체로도 엄청난 금화를 소모한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신하들이 소리쳤다. 이렇게 공격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블란테를 치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블란테의 모든 병력은 아카데미에 밀집되어 있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견고하고 높은 방벽 안에 있었다.
온갖 존귀한 혈통들이 모이는 아카데미의 특성으로 인한 조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국의 귀족들은 아카데미의 방벽이 이렇게 적들의 요새가 될 줄은 상상치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계속 이렇게 녀석들이 진격할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란 말이오?”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 거요?”
“…….”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한자리에 오래 머무르고 있으면 병사들은 물론이고, 민간인들에게도 많은 정신적 피로가 쌓이게 된다.
물처럼 소비되는 금화는 덤이었다.
화살받이로 쓸 절대적인 병사의 숫자도 적었다. 귀족들과 커넥션을 구축한 용병길드가 최근 무너졌기 때문이다.
“후우…….”
제국의 귀족이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 * *
에단은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 전쟁을 선포했다고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꼴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시키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엄청난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할 것이었다. 블란테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겼다.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는 이라면 감히 블란테를 함부로 힐난하지 못했다.
에단은 여유롭게 상황을 관망했다. 오히려 기사들과 학생들이 긴장감에 휩싸였다.
뭐라고 해도 전쟁은 전쟁이었다.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던 신성 왕국이 무너진 이후, 학생들은 많은 충격에 휩싸였다.
수업도 중단된 상태이기에 아카데미에서 이탈하는 학생들이 더욱 많아졌다.
에단은 굳이 그들을 잡지 않았다.
흐름이 좋았다.
아카데미는 대륙의 중심이자 요충지에 자리해 있었다.
보급로도 지척에 깔려 있었고, 에르미온과 데아티르, 그리고 오르번의 영향으로 수많은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상황은 유리했고, 보급은 용이했다. 조급함을 지닐 필요가 없었다.
에단은 기사들과 병사들의 훈련을 명했다. 그들은 에단의 지시를 수행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전쟁이 임박했음에도 이탈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놓고 블란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를 바랐다.
에단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상황이 유리하게 흘러간다고는 하나 전쟁은 전쟁이었다.
대강의 상황을 정리한 에단은 방에 혼자 앉아 아슬란을 꺼냈다.
“카이나.”
― ……말해.
카이나의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에는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점점 짙은 땅거미가 방 안을 잠식했다.
“이제 슬슬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 너도 그 광경을 봤을 텐데.”
― …….
“이번에도 대답을 회피한다면…….”
― 말할 테니까 닥쳐.
카이나가 날 선 대답을 했다.
― 하아……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지?
“알고 있는 모든 걸.”
― ……먼저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그것부터 밝히고 싶은데.
“말해 봐.”
― 나는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 아니었어. 예상은 했겠지만 원래는 일반적인 사람이었지. 그냥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어. ‘진실’과 ‘신비’를 탐하기 시작한 거지.
“진실과 신비?”
에단의 눈매가 좁혀졌다.
― 그래. 진실과 신비. 네 왼손에 있는 거. 그것에 대한 의문을 단 한 번도 가진 적 없나?
에단이 왼손을 들어 바라봤다.
‘타이탄의 장갑’이라고 불리는 기물.
어찌 의문을 가진 적이 없을까. 능히 베지 못할 것이 없다고 알려진 오러도, 타이탄에게 장갑에게는 생체기조차 내지 못했는데.
― 나는 타이탄을 탐구했어. 초월적인 고대의 종족. 역사에도 미미한 자취만을 남긴 위대한 초월자들에 대해서.
“썩 감성적이었군.”
― ……좆같은 칭찬 고맙군. 하지만 타이탄에 대한 정보는 늘 부족했어.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지. 당시의 나는 마스터였지만, 그럼에도 한계는 명확하더군. 그래서 나는 조력자를 구했어.
“그게 페온이었나?”
― 그래. 페온이 나의 조력자…….
카이나의 말끝이 흐려졌다. 갑자기 방문을 두드린 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에단은 문 너머의 존재감을 인지하며 입을 열었다.
“오르번?”
“잠시 들어가지.”
잠시 침묵하던 에단이 결정을 내렸다.
“들어와.”
끼익.
오르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긴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의 젊은 외향을 지니고 있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오르번이 특유의 피로한 듯 보이면서도 무미건조한 눈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카이나.”
오르번이 말했다.
― ……오르번.
“둘이 서로 아는 사인가?”
에단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오르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관계는 아니지만…… 기억은 하고 있지.”
오래된 흑마법사는 과거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용사의 성검이라 칭송받는 검이 흑마법사인 오르번과 교류가 있었다니.
‘웃기는 일이군.’
피식 웃은 에단이 오르번을 응시했다.
“무슨 용무로 찾아온 거지?”
“그날 있었던 일. 나도 할 말이 있다.”
오르번이 천천히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녀석들이 아주 재밌는 짓을 벌이고 있던 것 같은데.”
“재밌는 짓?”
“그래. 감히 타이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쓸만한 걸 만들었어. 그래서 놈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수인들을 억압하던 것이었군.”
피식 웃은 오르번이 에단을 응시했다. 황폐한 눈동자였다.
“카이나, 진실에는 다가갔나?”
― …….
카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오르번은 예상했다는 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겠지. 유실된 과거는 찾기 어려운 법이야. 그것도 모두가 잊은 고대의 역사라면 더더욱.”
“무게 좀 작작 잡지 그래?”
“여전히 본론을 좋아하는군.”
에단의 재촉에 희미하게 웃은 오르번이 에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이나, 타이탄이라는 허상을 좇은 말로가 고작 그따위 모습인가?”
― …….
카이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 * *
페온과 카이나는 타이탄을 탐구했다. 그들은 완벽한 종족이었다.
신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늙지 않고, 다치지 않으며, 죽지 않는다.
그야말로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이었다.
막강한 무력을 지닌 ‘지하의 군주’들조차도 타이탄은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
그것이 바로 타이탄이었다.
어느 순간 타이탄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희미한 발자취만을 남긴 채.
― ……페온 그 녀석이 가문을 떠난 건 사실이야.
페온은 힘을 갈망했다. 그리고 언젠가 드리울 죽음을 두려워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며 인간으로서는 긴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음에도 결국에는 닥칠 죽음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어했다.
그렇기에 페온은.
“허상을 좇았지.”
“불로불사인가?”
에단이 실소를 흘렸다. 진부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 ……그래. 녀석은 죽음을 두려워했어. 아니, 두려워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지. 페온은…… 죽음에 분노했어.
“분노했다고?”
― 그래. 지하의 군주들은 지하에 있을 때만큼은 무한에 가까운 삶을 영위할 수 있어. 그건 위에 사는 녀석들도 다를 바 없을 거야. 놈들과 우리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
카이나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다루는 마나인가?”
― ……그래. 지하의 놈들은 죽은 마나라는 것을 쓰고, 위에 새끼들은 신성력이라는 힘을 쓰지. 사실 신성력이라는 말도 우습기 그지없어. 너는 내가 신성해 보이나? 사제들과 성기사 같은 정신병자가 고결해 보여?
카이나가 냉소를 흘렸다.
― 녀석들은 우리보다 더한 허상을 좇고 있을 뿐이야. 운 좋게 타고난 ‘신비’일 뿐이고. 녀석들의 본질은 흑마법사들과 다를 게 없어.
“상당히 불쾌하군.”
비교 대상에 오르자 오르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아무튼 우리는 결국 타이탄에 도달하지 못했어. 결국에는 닿을 수 없는 허상이었다는 거지. 하지만 의외의 사실은 알아낼 수 있었어.
“그게 뭐지?”
― 우리조차도 결국 타이탄의 편린이었다는 거야.
“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카이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 페온이 왜 죽은 나무와 함께 있었고, 내가 왜 성검이라 불리는 검에 귀속되어 있겠어? 신성력과 죽은 마나. 우리는 허상을 좇은 대가를 치른 거야.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삶을 영위하던 거지. 큭큭.
카이나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 세계수, 신성력, 그리고 죽은 나무, 인간, 수인, 지하. 모든 건 결국 하나였어. 그리고 모든 게 하나가 되어야.
“그래서 성공했나?”
― 비꼬는 거냐? 성공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카이나가 실소를 터트렸다.
― 우리는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야. 겁도 없이 태양에 다가갔던 거지. 불을 보면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그게 전부인가?”
― ……아니, 내가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건 너라는 존재야. 오르번,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그래.”
오르번이 에단을 응시했다.
“내가 물었었지. 네가 인간이 맞냐고.”
과거 두 사람이 처음 조우했을 때, 오르번이 에단에게 물었었다.
인간이 맞냐고.
“네가 지닌 힘은 본디 인간이 소화할 수 있는 힘이 아니야.”
― 그래. 특별하다거나 천재라거나 하는 속 편한 소리로도 불가능한 일이야. 너는 인간이 지닐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어. 마나를 깨닫기 전, 죽은 나무의 힘을 얻었다고?
하하하.
카이나가 소리 내어 웃었다.
― 그런데 너는 어떻게 살아 있지? 그리고 세계수? 네가 그 힘을 흡수했다고? 인간이? 드래곤조차 아득히 뛰어넘는 무한한 마나를? 그게 끝이 아니지. 너는 신성력을 다루는 것에조차 별지장이 없어.
알고 있어? 네 몸속은 혼돈뿐이야. 원래라면 진즉에 터져서 뒈져 버려야 했다고. 재능? 천재? 애초에 인간은 수용할 수가 없는 것들이야. 억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지하의 군주들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힘이 한낱 인간에게?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카이나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에단은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지?”
― ……왼손에 있는 그거. 우리가 이 꼬라지가 되어 가면서 간신히 손에 넣은 타이탄의 편린이야. 써 봐서 알겠지만 말도 안 되는 힘을 내포하고 있지.
그리고 그건…… 한낱 인간 따위가 쥐면 그대로 몸이 터져 버리는 물건이야.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아직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