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화] 침략 (2)
“들어와라.”
문 너머에서 빈센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이 문고리를 잡기 전 자신의 소매를 바라봤다.
격전을 치른 소매는 너덜너덜해져 넝마나 다름없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옷에 신경 쓸 시간보다 빠른 보고가 우선이었다. 피식 웃은 에단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무실에 앉아 있던 빈센트가 에단을 응시했다.
빈센트의 시선에서는 묵직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제 이것도 좀 적응이 되네.’
에단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이겼느냐?”
빈센트가 물었고.
“이겼습니다.”
에단이 답했다.
빈센트와 에단이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 * *
에단은 상황과 결과를 빈센트에게 전달했다. 결과는 완승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블란테가 입은 피해는 전무하다고 봐도 좋았다.
발생한 사상자는 오롯이 수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묵묵히 에단의 보고를 들었다. 작전은 사전에 들었다.
온갖 변수가 창궐하는 전쟁에서 계획된 것들을 수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은 작전을 완벽히 수행했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대승을 거두었다.
상대가 미미한 군소 영주인 것도 아니었다. 상대는 대륙에 오랫동안 뿌리내려 있었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신성 왕국이었다.
첫 전쟁에 지휘관이라는 감투를 쓰고 완벽하게 수행해 냈다.
‘허.’
빈센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전쟁에서 블란테의 힘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모두 에단을 믿고 따르는 수하들이었다.
빈센트는 기특하면서도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가문의 골칫거리였던 망나니 아들내미에게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빈센트가 에단의 몸을 훑어봤다.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거적때기가 된 옷들을 보면 에단이 치른 혈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에단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목례했다.
“아직 드릴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에단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에단은 교황과 대주교들이 펼친 의식과 산처럼 쌓여 있던 수인들의 시체.
그리고 거기서 모습을 드러낸 괴물.
녀석의 압도적인 무력.
놈을 죽이기 직전 등장한 페온.
긴 이야기를 최대한 축약하여 무덤덤하게 전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빈센트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쉽게 믿기는 힘든 것들이군.”
“이해합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겪은 당사자인 에단도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었다.
“최대한 알아보마.”
“저도 최대한 조사를 해 볼 생각입니다.”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지?”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에단은 빈센트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고작 벽을 하나 넘었을 뿐입니다. 녀석들은 우리를 우습게 여겼고, 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생각입니다.”
에단의 눈빛에서 사나운 야성이 흘러나왔다.
‘많이 컸군.’
더 이상의 시험은 의미가 없었다. 빈센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언제까지 너한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제는 내가 선두에서 나서겠다.”
“그건…….”
“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으니 걱정치 말거라. 어차피 더 이상 우리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없어. 보아하니 이미 대륙 각지에 너의 세력이 퍼져 있던데.”
“…….”
에단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여우 같은 놈.”
실소를 흘린 빈센트가 외투를 걸쳤다. 흑사자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고풍스러운 서코트(surcoat)였다.
빈센트가 검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휴식을 취해라. 오늘은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를 열 터이니.”
* * *
빈센트는 사람들을 소집했다. 학생과 기사, 가신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모였다.
감히 블란테의 주인인 빈센트의 말을 거스를 간 큰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빈센트가 단상 위에 올라섰다. 빈센트는 말없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오늘 첫 전쟁에서 승리했다. 감히 대륙을 우롱하고, 블란테의 명예를 더럽힌 신성 왕국은 오늘부로 대륙에서 지워졌다.”
충격적인 발표에 군중들이 입을 떡하고 벌렸다.
“그리고 그 공은 내가 아닌, 블란테의 후계자, 에단 블란테가 세운 업적이다.”
단상 위에 에단이 올라섰다. 에단은 피로에 찌든 표정을 감춘 채 단상 아래에 있는 군중들을 훑어봤다.
후우.
에단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념할 만한 사건이었다.
에단이 피어를 조금 끌어올렸다. 압도적인 기세가 휘몰아치며 학생들의 몸을 짓눌렀다.
이내 에단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군중들은 에단의 목소리를 뚜렷하게 들었다.
“타락한 교황과 주교들, 그리고 그를 추종하던 성기사는 나와 기사들이 모두 죽였다.”
담담한 어조. 군중들은 에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는 내뱉은 말은 지킨다. 신성 왕국은 오늘부로 대륙에서 지워졌고, 다음 상대는…… 바로 제국이다.”
“……!”
학생들이 눈을 부릅떴지만 에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계속되는 도발과 모욕, 그리고 미심쩍은 전 황제의 타계와 1황자의 즉위식.”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녀석들이 뭐를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블란테를 건드린 이상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신성 왕국이 그랬던 것처럼.”
뚜벅.
빈센트가 에단 곁에 섰다. 에단이 고개를 들어 빈센트를 바라봤다.
후웅.
선선한 바람이 불며 빈센트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블란테의 주인 빈센트가 입을 열었다.
빈센트에게는 피어도 뭣도 없었지만,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남들을 주목하게 만드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블란테는 오늘부로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고고한 선전포고가 선고되었다.
* * *
연이어 터진 충격적인 사건에 대륙은 충격에 휩싸였다.
신성 왕국이 패전하여 몰살당한 것도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곧바로 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한 것도 대륙을 격동시켰다.
수많은 호사가들과 행상인들, 그리고 용병들이 이번 일들에 관해 떠들어댔다.
그들은 제국의 대응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지만, 제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흐음…….”
옥좌에 앉은 크리스토가 턱을 괴며 팔걸이를 두드렸다.
신성 왕국이 패배했다.
에단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단 하루 만에 신성 왕국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제국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혼란에 빠졌다.
교회의 사제들은 최선을 다해 일련의 사건들이 거짓이며, 모함이라고 설파했지만 신성 왕국이 패전한 것으로 그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포로는 없었다.
신성 왕국에 있던 사제와 성기사들은 모조리 몰살당했다. 크리스토가 보낸 사절들이 그 사실을 확인해 왔다.
어느덧 흑사자의 송곳니가 제국으로 향했다. 변방에서 군림하던 흑사자가 이제는 신성 왕국을 넘어 제국을 노린다.
가신들과 봉신들이 언성을 높이며 대응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크리스토가 보기에는 별로 의미 없는 행동처럼 보였다.
저들은 순전히 겁에 질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유일한 측근이자 무력 집단이었던 카이제르도 가주가 사망한 이후 혼란에 빠져들었다.
제국의 귀족들이 초조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언제 블란테의 군대가 진격을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피식.
크리스토가 씨익 웃었다. 에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단은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인물이다.
‘자, 이제 어찌할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어찌 대응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의식은 성공한 것 같은데 말이지.’
크리스토는 신성 왕국 놈들이 무엇을 연구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사건 현장을 봤을 때 의식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과물이 없었다.
‘죽었나?’
모든 것은 추측이자, 짐작일 뿐인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다.
“용병들의 고용은 진행하고 있나?”
“그것이…….”
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강국이었지만, 무작정 군대를 소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군대는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금화와 식량을 소비한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용병들을 대거 고용하는 것이었다.
“용병이…… 고용되지 않습니다.”
“흠, 그래?”
크리스토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유는 얼추 알 것 같았다.
검은 칼날 때문일 것이다.
“하하.”
크리스토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 더 이상 흐름은 크리스토의 편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크리스토를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그들이 내건 충성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면피책일 뿐이었다.
올가미가 조여 온다.
대륙을 휘어잡던 제국은 어느새 전방위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전군 소집해.”
남은 것은 전면전뿐이었다.
* * *
검은 칼날은 난폭한 행보를 이어 나갔다. 신성 왕국이 패배하며 대륙이 혼란에 휩싸였을 때, 검은 칼날이 용병 길드의 본부를 습격한 것이다.
“이런 명예도 모르는 놈이!”
“언제부터 느그들이 명예를 운운했냐? 야만적인 용병 새끼가.”
사미라가 냉소를 흘렸다. 사미라가 휘두르는 거대한 양날 도끼가 전장을 휩쓸었다.
용병 길드의 용병들이 이를 갈면서 대항하려고 했지만, 맹렬한 기세로 전장을 휘어잡는 사미라에게 접근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블란테의 기사들도 활약했다.
블란테에서 미친 강도의 훈련을 소화하며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기사의 자리에 오른 이들은 하나하나가 살인 병기나 마찬가지였다.
기사들이 쥔 검에서 시퍼런 오러가 흘러나왔다. 용병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슨!”
저 정도 오러는 최소 상급에서 최상급의 마나 유저가 아니라면 엄두조차 내지 못할 수준이다.
쉽게 말해 사미라가 대동한 용병들의 수준은 최소 사미라와 엇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소리였다.
그러한 실력을 가진 이가 어째서 용병질 따위를 한단 말인가?
이미 용병 길드의 전의는 바닥에 처박혔다. 반면 검은 칼날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선두에 선 사미라와 블란테 기사들이 적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있었다.
“검은 도끼―!”
사나운 노호성이 들리자 사미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
검은 도끼 사미라와 같이 용병계에서 전설로 자리 잡은…….
푹.
그때 녀석의 그림자에서 복면을 쓴 네이드가 등장했다. 네이드는 순식간에 남자의 급소를 찔렀다.
남자는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절명했다.
피의 악마 로크는 그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미라는 벙찐 표정으로 피를 흘리며 죽은 로크를 바라봤다.
용병 길드가 준비한 비장의 패가 무너졌다. 용병 길드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사미라는 항복한 용병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하지만 길드장과 지부장, 그리고 간부들은 모조리 처형시켰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혹한 행보에 용병들이 전율했다.
“이제 용병들의 관리는 우리 검은 칼날이 맡는다.”
용병계의 흐름이 반전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