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침략 (1)
[좌절]
에단의 입에서 흘러나온 삿된 언어.
아슬란을 감싸고 있던 룬어가 회수되기 시작했다. 검고 음습한 기운이 에단의 입으로 돌아간다.
“…….”
오르번이 놀란 눈으로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궁금증을 해소할 상황이 아니었다.
녀석이 움직인다. 오르번이 녀석의 발목을 붙잡기 위해 흑마법을 쏟아부었다.
검은 방진이 그려지며 검은 기운과 촉수 따위가 괴물의 팔과 다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킥.”
녀석이 조소를 흘렸다. 오르번의 눈매가 좁혀졌다.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르번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괴물이 공중에서 빠른 속도로 낙하하고 있었다.
‘이거 쉽지 않군.’
오르번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주 마법조차 통하지 않다니,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그 순간 에단이 아슬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카이나!”
쩌엉―!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광채가 휘몰아쳤다. 찬란한 신성력이 온갖 부정한 것들을 집어삼킨다. 에단은 거기에 마나를 더했다.
폭풍 같은 기운이 괴물을 집어삼켰다. 에단의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 ……이 빌어먹을 자식이.
눈을 뜬 카이나가 욕설부터 내뱉었다. 에단은 카이나의 말을 무시했다.
다친 이들의 치료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모든 이들을 치유할 여유는 없었다. 에단은 가장 크게 다친 가토부터 치료했다.
가토의 숨소리가 많이 차분해졌다. 파리한 안색도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싸움은 승리했지만 아군이 입은 피해는 적지 않았다.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저 녀석부터 끝내는 게 먼저였다.
“에단님…….”
드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억양만 들어도 드레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에단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고생 많았다.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에단이 사납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금방 끝낼 테니까.”
“…….”
드레이는 아무 말 없이 에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에단의 등을 보자 안심이 되며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후우.”
에단이 숨을 토해 냈다. 역시 괴물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고 멀쩡했다.
‘죽은 나무에도, 신성력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라.’
더불어 오르번의 흑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이거 완전…….’
에단이 쓴웃음을 지었다.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에단이 스윽 시선을 돌려 자신의 왼손을 바라봤다.
타이탄의 장갑.
가문의 무기고에서 얻은 물건. 후반에야 풀리는 설정을 페온으로 인해 초반에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에단은 그때 얻은 타이탄의 장갑으로 인해 몇 번의 사선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러면 나가린데.’
지하실에서 교황과 주교들이 했던 말.
타이탄.
만일 저 녀석이 정말 타이탄이 맞다면 승산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럴 확률은 낮아.’
타이탄은 원작에서도 이름만 간신히 언급되던 떡밥이자 설정이었다. 중요도로만 본다면 지하의 군주들보다 높았다.
‘왼손의 위력만 본다면 군주 이상이겠지.’
타이탄의 장갑은 그 어떠한 공격에도 내성을 지녔다. 오러든, 죽은 마나든, 군주의 마법이든, 왼손에는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것만 보더라도 타이탄이라는 이름 가진 힘과 무게를 알 수 있다.
‘완벽한 타이탄은 아니겠고.’
에단이 상황들로 유추를 시작했다. 즐비한 시체.
인간과 수인들.
그것들은 제물.
그리고 의식.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이나.”
― ……빌어먹을 새끼.
“저 새끼 정체가 뭔지 알겠어?”
― 내가 묻고 싶은 말이거든? 저 괴물 새낀 도대체 뭐야? 지하 놈들도 아닌 거 같은데.
“도움이 안 되네.”
― 너 이 개…….
“타이탄.”
― …….
“교황 새끼가 그러더군. 현장을 정확하게 보진 못했지만 수인들과 인간 시체들 숫자만 백 구가 넘어갔어. 코가 썩어 버리는 줄 알았지.”
― 저 새끼가 거기서 나왔다고?
“어. 솔직히 타이탄 같지는 않고…….”
― 네가 타이탄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지?
“그건…… 쯧. 주절거릴 여유가 없군.”
녀석이 고개를 돌려 에단을 인식했다. 이글거리는 동공만 보더라도 녀석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키에에엑!
녀석이 울부짖었다. 끔찍한 포효였다. 청각이 예민한 수인들과 휴고, 렉사르는 귀를 틀어막았다.
파앙―!
녀석이 바람을 가로지르며 에단에게 달려들었다. 에단은 녀석의 움직임을 확실히 인지했다.
‘눈이 적응된 건가?’
에단이 피식 웃으며 성검을 휘둘렀다. 에단이 지닌 회색의 마나와 신성력이 뒤섞이며 강력한 힘을 일으켰다.
콰앙!
괴물이 뒤로 밀려났다. 녀석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야, 저거 잡을 수는 있는 거냐?”
― ……저딴 건 타이탄이 아니야.
“내구력은 왼손에 있는 거랑 비슷한 거 같은데.”
― 저건 힘에 취한 망나니일 뿐이야. 핵의 위치만 파악할 수 있으면…… 처리할 수 있어.
“핵의 위치는 어떻게 파악하는 건데?”
― 붙어. 최대한 가까이. 그럼 내가 알려 줄 수 있으니.
“말은 쉽네.”
― 그래서, 못 해?
비아냥대는 말투. 에단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
팟!
에단이 쏘아졌다. 에단이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아슬란이 번뜩이며 수많은 궤적이 그려졌다.
모든 궤적에서는 신성력과 마나가 타오르듯 분출되었다.
콰앙―!
어마어마한 굉음. 녀석이 뒤로 밀려간다. 에단은 멈추지 않았다.
녀석은 학습을 한다. 그 증거로 대처가 점점 좋아진다.
파충류 같은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
오르번이 지원을 멈췄다.
에단이 아슬란의 힘을 활용하기 시작한 순간 오르번의 흑마법은 빛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단은 호흡조차 가둔 채 쉬지 않고 격렬한 움직임을 펼쳤다. 녀석이 점점 에단의 검에 반응한다.
그 순간 기회를 포착한 에단이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다.
뻐억!
녀석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에단은 순식간에 녀석의 위에 올라탔다.
“이것도 버티는지 보자고.”
에단이 괴물의 양팔을 허벅지로 묶었다.
하지만 녀석의 근력은 에단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임시적인 조치일 뿐이었다.
에단이 아슬란을 역수로 쥔 채 그대로 내려찍었다. 검 끝이 괴물의 목과 맞닿았다.
쾅!
우우우웅―!
아슬란이 비명을 지르듯 움직였다. 에단이 이를 악물었다. 검에서 오러와 신성력이 타오르듯 피어올랐다.
까드드득!
칼이 조금씩 들어가고 있었다.
― ……조금만 더.
카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에단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었다.
에단은 내색하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흔들림 없는 동공이 괴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 찾았다! 왼쪽 허벅지! 거기를 찍어!
에단이 순식간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번개처럼 몸을 일으켜 녀석의 왼쪽 다리를 움직였다.
괴물도 빠르게 반응하며 몸을 피하려고 들었지만 에단이 조금 더 빨랐다.
아슬란이 괴물의 허벅지와 맞닿기 직전의 순간.
쩌엉―!
강한 저항력과 함께 에단이 밀려났다. 에단은 순간 끓어오르는 피 가래를 게워 냈다.
“커헉―!”
에단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고개를 들었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에단은 이번 기회에 저 녀석을 끝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에단을 밀어냈다.
에단이 눈에 힘을 집중하며 앞을 응시했다. 자잘한 상처나 내상쯤이야 아슬란의 힘으로 치유할 수 있었다.
쩌어어억.
허공이 갈라진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저갱 같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에단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저건 또 뭐야?’
정말 가지가지 하고 있었다. 에단이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짓고 있을 때 카이나가 입을 열었다.
― ……페온.
갈라진 공간에서 누군가가 틈을 비집고 모습을 드러낸다. 에단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페온.
에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페온과 에단의 시선이 서로 얽혔다.
“오랜만이네?”
에단이 먼저 물었다. 가만히 에단을 바라보던 페온이 피식 웃었다.
“그래. 오랜만이군.”
“때깔 보니까 뒤통수 후려치고 아주 잘 지냈나 보네.”
에단이 비아냥거리며 도발을 해 봤지만, 페온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페온의 관심사는 에단이 아닌 페온의 곁에 있는 괴물이었다.
괴물이 페온을 바라보더니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페온은 말없이 녀석을 향해 손을 들었다.
“■■■■■.”
페온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지만 페온이 내뱉는 말이 더없이 이질적이고 불길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페온의 손이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검게 물든 손은 괴물을 순식간에 낚아챘다.
“키에에에에엑!”
녀석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페온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페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쩌걱.
허공이 다시 한번 갈라진다. 그리고 이번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검은 손이 괴물을 움켜쥐었다.
꽈드드드득!
더 이상 괴물의 형체도, 괴성도 들리지 않았다. 페온은 손을 떼며 에단을 응시했다.
“조만간 또 보겠지.”
페온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에단은 냉소를 지으며 중지를 치켜들었다.
“좆까세요.”
씨익 웃은 페온이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페온은 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싸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페온에게서 풍기는 기세와 위압감이 말해 줬기 때문이다.
“후우.”
에단이 끈적한 숨을 토해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피로함이 한 번에 몰려왔다.
“카이나.”
― …….
“돌아가면 모든 걸 다 말해야 할 거야.”
― 그래.
카이나가 굳은 어조로 대답했다.
에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이렇게 주저앉아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에단은 이 전쟁의 책임자였다. 모든 상황을 책임지고 끝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사나운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하얀 눈은 피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
시체가 즐비했다.
대부분은 적들의 시체였고, 수인들의 시체도 적지 않게 석여 있었다. 부상당한 수인들의 숫자도 넘쳐 났다.
“돌아간다.”
에단이 말했다. 시체의 수습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생존자가 최우선 순위였다.
* * *
에단과 일행들이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전쟁은 승리했다.
대륙 전체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명실공히 북부의 패자로 군림하던 신성 왕국은 오늘 지도에서 사라졌다.
신성 왕국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 대륙에는 수많은 교회가 남아 있었다.
신성 왕국이 무너진 이상 교회도 급격하게 쇠락할 테지만, 아직 신도들은 남아 있었다.
에단은 남은 신도들까지 몰살시킬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그들이 지닌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일 터니.
에단은 복귀하자마자 부상자들을 치유했다. 새삼 아슬란이 지닌 사기성을 통감한다.
하지만 치유 능력은 만능이 아니었다. 결국 소모하는 건 시전자의 체력이었다. 치료를 받은 이들은 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부상의 정도가 심한 가토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가토의 곁은 계속 휴고가 지키고 있었다.
지치고 피로한 것은 에단도 마찬가지였지만, 에단은 곧장 빈센트를 찾아갔다.
승전의 보고를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