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습격 (5)
에단과 괴물은 지하실에서 격전을 펼쳤다. 주위 구조물이 모조리 부서질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전투의 양상은 에단이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순간적인 기교와 판단으로 간신히 호각을 이루고 있었지만, 괴물의 신체 능력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파밧!
이동할 때마다 잔상이 생겼다. 에단의 눈으로도 괴물의 움직임을 좇기가 쉽지 않았다.
후웅!
순간 에단이 상체를 숙였다.
에단이 있던 자리에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만일 조금이라도 대처가 늦었으면 상체가 통째로 날아갔을 것이다.
“키케켁―!”
괴물이 꺼림칙한 웃음을 토해 냈다. 에단이 인상을 구겼다.
“이 새끼 반칙 쓰네.”
에단의 피부에 상처가 늘어 가기 시작했다. 저 괴물은 신체 능력 자체도 매우 까다로웠지만 회복력이 더 문제였다.
에단에게 찔렸던 눈은 어느새 완전히 회복되어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 재수가 없었다.
‘오러를 써도 별 소용이 없고.’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출력 자체를 높이자니 건물이 통째로 무너질 것 같았다.
‘뭐 하는 새낀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느껴지는 기운과 기괴한 외향만 보았을 때 확실히 지하 놈들은 아니었다.
저놈은 뭐랄까…….
이것저것을 뒤섞은 것 같았다.
‘나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혹시나 해서 마나를 흡수하려고 들었지만 되지 않았다.
죽은 나무가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녀석은 언데드나 지하의 존재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쯧.’
에단이 혀를 찼다.
어지간해서는 제압을 하고 알아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기회는 한 번인가.’
에단이 가진 룬어는 두 개.
[절망]과 [좌절].
그리고 사용할 수 있는 룬어는 [절망] 하나였다.
에단은 본능적으로 룬어의 사용법을 아는 것처럼 두 번 사용할 수 없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좌절]은 내성에 진입하면서 이미 한 차례 사용했다.
상대를 제압하는 성질을 지닌 좌절이 녀석을 상대하는 것엔 최적의 무기였지만, 에단은 지금 좌절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결국 근접했을 때 [절망]으로 묶어야 한다. 그러나 절망으로 묶었을 때 승부를 볼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없었다.
‘문제는.’
저놈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육안으로 좇는 것조차 어려운 속도.
에단은 이제 네이드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 안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저 괴물의 움직임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불가해한 속도.
‘뭐 어쩌겠어.’
투덜거려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절망]으로 녀석을 붙잡지 못한다면 그대로 몸을 돌리고 도망갈 생각이다.
에단은 미련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승산이 낮은 싸움에 목숨을 걸 생각은 없었다.
‘이거 낯선 기분인데.’
옥타곤 위에 올라섰을 때 류태신의 상대가 느낀 기분이 이러지 않았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던 에단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덤벼, 좆만아.”
에단의 도발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는지 섬뜩한 웃음을 흘리던 괴물이 입을 다물었다.
괴물이 에단을 응시한다. 짐승처럼도 보이고, 파충류의 것처럼도 보이는 동공이었다.
에단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에단의 동공은 흔들리지 않았다.
“킥.”
짤막한 웃음소리.
괴물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저 괴물과 싸우면서 알아차린 게 있었다.
저 녀석이 학습을 한다는 사실.
에단이 몸을 회전시키며 팔꿈치를 던졌다.
백스핀 엘보우.
뻐억!
확실한 타격감이 들었다.
시선을 돌리자 괴물이 팔꿈치를 붙잡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씨익.
마치 비웃듯이 괴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어?”
에단이 코웃음을 치며 사납게 웃었다. 몸을 돌린 에단이 괴물의 손목을 낚아채며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더럽게 세네.’
근력에서 밀린 에단은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괴물의 목을 붙잡고 컨트롤을 시도했다. 오러를 두른 무릎으로 복부와 가슴을 걷어차 봤지만 괴물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쑤욱!
에단이 그립을 놓고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려 들었다. 괴물이 순간적으로 상체를 젖히며 공격을 피해 냈다.
“이제 이건 피하네?”
코웃음 친 에단이 몸을 숙이며 괴물의 다리를 붙잡았다.
이마나리 롤.
괴물의 몸이 뒤로 넘어간다. 에단은 애초에 하체 관절기 따위로 이 괴물에게서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단이 입술을 달싹이며 룬어를 중얼거렸다.
에단의 입에서 사이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괴물의 눈알이 바쁘게 움직였다. 녀석은 처음으로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녀석이 발버둥 친다. 하지만 이미 검은 기운은 괴물과 에단을 가둬 놨다.
에단이 그립을 풀었다.
‘유지 시간은 대략 5분가량.’
딱 옥타곤에서 치르는 한 개의 라운드와 동일한 시간이다. 에단은 굳이 시간을 재지 않아도 이 5분이라는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후우.”
에단이 숨을 토해 냈다.
칠흑 같은 어둠, 그리고 그 속에서 에단은 전능감과 비슷한 감각을 얻었다.
보지 않아도 보이고, 듣지 않아도 들리고, 만지지 않아도 느껴진다.
괴물의 윤곽과 호흡, 녀석이 눈을 굴리는 소리까지.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지.’
에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괴물의 동공과 에단의 눈이 마주쳤다.
‘보인다고?’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타닷.
에단이 뛰쳐나가며 무릎을 들었다.
뻐억!
에단의 플라잉 니킥이 괴물의 턱에 적중했다. 하지만 괴물은 쓰러지지 않았다.
‘진짜 괴물 새끼가 따로 없네.’
에단이 헛웃음을 지으며 괴물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번쩍 들어 바닥에 메다꽂았다.
에단은 괴물의 위에 올라서서 무차별적인 파운딩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괴물이 천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움직임이 둔했다.
에단이 호흡을 가둬 놨다. 온 집중을 괴물에게만 온전히 쏟고 있었다.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타격음이 발생하지 않는다. 타격 소리조차 어둠에 집어삼켜진다.
괴물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먹히긴 하네.’
에단으로서는 기막힐 노릇이다. 이 난리를 피워야 이 녀석에게 간신히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절망]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이 녀석이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괴물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 순간 에단이 괴물의 팔을 낚아채 암바를 걸었다.
꽈아아악!
에단이 힘을 가하자 근육과 인대가 찢어지고 관절이 으스러지는 게 느껴졌다.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지르는 비명은 모두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
역시 완전히 부러진 팔도 회복되지 않는다.
‘이제 거의 끝이군.’
결국 죽이지 못했다. 에단이 혀를 차며 거리를 벌렸다.
짙은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검은 돔이 흩어지며 사라지자 녀석이 몸을 일으켰다.
에단이 괴물을 응시했다. 녀석은 표독스러운 눈으로 에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회복이…… 안 되네?’
에단의 눈매가 좁혀졌다.
본래라면 순식간에 회복되었어야 할 얼굴과 팔이 그대로였다. 괴물은 덜렁거리는 팔을 붙잡은 채 에단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키에에에에엑!”
마치 증오와 원한을 토해 내는 듯한 괴성이었다. 에단은 잠시 고민하다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이건 혼자 상대하긴 힘들어.’
에단은 도박수를 던지지 않았다. 에단이 몸을 돌려 질주하자 녀석이 곧장 따라붙었다.
“새끼, 더럽게 빠르네.”
에단은 실소를 터트리며 이를 악물었다. 달리는 건 자신 있었다.
다리에 혈류가 몰리며 에단의 허벅지가 부풀어 올랐다. 에단은 마나를 운용하며 속도를 한 차례 더 가속했다.
파앙!
에단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속도는 녀석이 더 빨랐다.
에단은 추격하는 괴물을 향해 오러를 실은 검을 휘둘렀다. 녀석은 한쪽 팔로 날아드는 오러를 쳐 내며 쫓아왔다.
지하실을 빠져나가는 순간 지하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충격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에단은 쉬지 않고 달려 나갔다.
쫓아오는 괴물을 견제하며 내성을 빠져나가는 와중 내성에 남은 사제들과 몇 명의 성기사들이 보였다.
에단은 그들을 무시한 채 달렸고, 괴물은 에단을 쫓으면서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
경로에 시체가 즐비했다.
에단은 자신의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을 느꼈다.
성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멀리서 보이는 수많은 시체들과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오르번!”
에단이 소리쳤다.
오르번은 시선을 돌려 에단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단번에 에단이 처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인지했다. 오르번이 바닥에 지팡이를 찧으며 술식을 읊조렸다.
온갖 부정하고 사이한 말들이 오르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곁에 있던 수인들과 일행들이 당황하며 오르번을 바라봤다.
뱀처럼 검은 기운, 부정한 함정, 온갖 저주.
오르번은 오래된 흑마법사답게 다양한 흑마법과 저주들에 능통했다.
저주와 주술이 괴물에게로 향했다. 괴물이 괴성을 토해 냈다.
“키에에에에엑―!”
섬뜩한 포효.
이제 일행은 모두 괴물의 존재를 인지했다. 에단과 녀석은 엄청난 속도로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괴물이 에단을 추적하는 것을 포기하고 저주에 대응했다. 하지만 저주는 파훼하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갖 저주와 흑마법이 괴물의 몸에 달라붙었다.
“……허.”
오르번이 실소를 터트렸다. 흑마법을 시전한 당사자이기에 효과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다에 검은 물감을 떨어트려봤자 바다가 검게 물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저주가 저 녀석에게 스며들었다. 오르번의 눈매가 좁혀졌다.
“에단. 대체 뭘 데리고 온 거지?”
“나도 몰라.”
에단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하실에서 있던 일들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바 물리적이든 마법적이든, 어지간한 피해는 입지 않을 거야. 죽은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서는 신성력도 별다른 타격은 주지 못하겠지.”
에단이 시선을 돌렸다. 쓰러져 있는 가토와 일어서 있는 게 고작인 휴고와 렉사르, 그리고 성검을 부여잡고 있는 드레이가 보였다.
‘어쩔 수 없나.’
썩 내키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은 긴박했다.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혼자서도 승산이 없다고 느낀 녀석이다. 에단은 일행을 지키면서 싸울 자신이 없었다.
“드레이!”
에단이 드레이를 향해 손을 뻗자, 멍하니 에단을 바라보던 드레이가 에단을 향해 성검을 던졌다.
에단이 성검, 아니, 아슬란을 낚아챘다.
‘운 좋은 줄 알아.’
아슬란을 봉인한 것은 에단이다. 그렇기에 그 봉인을 풀 수 있는 것도 에단이었다.
봉인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웠지만.
[좌절]
에단의 입에서 꺼림칙한 룬어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저주를 회수하기 위한 룬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