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습격 (4)
“쯧, 이제 한계인가.”
오르번이 혀를 찼다.
언데드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에단의 마나를 사용한 것은 임시방편이었다. 언제까지고 그런 식으로 버틸 수는 없었다.
평원을 가득 채운 언데드가 성기사들의 대응에 쓸려 가기 시작했다.
“이제 신성력이 먹힌다!”
“사악한 마물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
사제들이 합세하자 눈부신 광채가 휘몰아쳤다.
드레이가 신성력을 토해 내며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지만,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드레이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동작이 둔해지고 있었다. 버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지금.’
오르번이 술식을 해제했다.
들끓던 언데드들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거칠게 신성력을 쏟아붓던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그들이 사태를 파악하기 전, 2차 습격이 시작되었다.
“사냥을 시작해라!”
쇠를 긁는 것 같은 거칠면서도 불쾌한 목소리.
렉사르가 호통치자 수인들이 달려들었다. 성기사들을 향해 달려드는 수인들은 모두 흉흉한 기세를 토해 내고 있었다.
크르르르!
수인들이 성기사들을 덮쳤다. 수인들과 함께 전장에 참전한 가토와 휴고가 드레이 앞에 섰다.
“이제 물러나도 됩니다.”
“하지만…….”
“같은 말 반복할 시간 없습니다.”
가토가 싸늘한 눈초리로 드레이를 응시했다.
드레이는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투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여력이 있으면 빨리 자리를 피하세요.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참전하시면 됩니다.”
“……네.”
드레이가 비틀거리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배신자 놈! 감히 어딜 가려고!”
성기사가 멀어지는 드레이를 쫓으려고 했지만, 가토가 성기사 앞을 막아섰다.
“당신의 상대는 접니다.”
가토의 서슬 퍼런 기세에 성기사가 움찔거렸다.
“감히…….”
성기사의 이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가토는 건조한 표정으로 성기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토가 검을 쥐었다.
분위기가 돌변하자 성기사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앳된 외모를 보고 방심해선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가토도 상대를 얕잡아보지 않았다. 성기사의 위험성은 드레이와의 대련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성기사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압도적인 신성력이 곧 그들의 방패이자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기사들은 많은 기교를 단련하는 대신 신성력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반면 가토는 순수한 검사였다.
끝없이 검을 휘둘러 왔다. 가토는 비록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지도 못했고, 보유하고 있는 마나의 양도 보잘것없었지만 기교는 절정에 이르렀다.
가토의 검에서 서슬 퍼런 기운이 흘러나온다.
오러였다.
에단의 것처럼 폭발적인 기세로 분출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러가 검을 살짝 두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살상력이 생겨난다.
성기사들의 표정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가토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앞으로는 단 한 명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
* * *
휴고는 렉사르와 함께 수인들 사이에 섞여서 적들을 헤집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단순했다.
체력이 빠진 적들의 몰살.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개인의 실수가 집단의 몰살로 이어진다.
휴고의 눈에 분노에 사로잡힌 수인의 모습이 보였다. 휴고가 달려 나갔다.
콰직!
휴고는 성기사를 죽인 뒤, 수인의 뒷덜미를 붙잡고 멀리 집어 던졌다.
“정신 차려!”
휴고가 으르렁거렸다.
이건 훈련이 아닌 실전이었다. 실수를 저질러도 자기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뿐만 아닌 내 친구가, 내 동료가 죽는다.
수인들이 지닌 분노는 알고 있었다. 그간 쌓아 온 원한과 설움.
간신히 잡은 복수의 기회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늘 실패하면 두 번은 없으리라는 것도.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냉정해져야만 한다. 그렇기에 실수란 용납되지 않는다.
두 번은 없었다.
휴고가 흉성을 터트렸다. 심령을 뒤흔드는 포효에 모든 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큭큭큭.”
렉사르가 웃음을 흘렸다. 그는 품에서 사슬낫과 톱날검을 꺼내 들었다.
하룻강아지 녀석이 많은 성장을 이뤘다. 이제 휴고는 어엿한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뭣들 하는 거냐!”
렉사르의 노호성에 수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렉사르가 성기사 하나의 목을 잘랐다. 성기사와 사제들이 격렬하게 저항한다.
신성력은 까다롭다.
스스로가 고결하다고 여기는 성기사들은 신성력에서 비롯되는 무한한 체력과 회복력으로 싸운다.
신성력이 바닥나기 전까지 성기사는 지치지 않는다.
목숨을 잃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죽음은 기피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렉사르가 보기에 그것은 ‘광기’였다.
성기사들이 목숨을 불사르며 저항하자 형국이 뒤바뀐다. 성기사들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침착하게 죽여!”
성기사들은 더 이상 휘둘리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성기사들은 노련한 전사였다. 싸움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반면 수인들은 미숙했다.
실전 경험은 단기간 내에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훈련으로 최대한 몰아붙이며 몸에 각인시켰지만 그 한계는 명확했다.
마치 벽을 상대하는 기분에 수인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점차 수인들이 입는 상처가 많아졌다.
“배운 것을 잊었나?!”
렉사르가 소리쳤다. 렉사르는 긴 사슬을 던져 눈을 흩뿌렸다. 그러고는 미리 숨겨 둔 다른 사슬로 성기사의 발목을 붙잡았다.
촤르륵!
성기사가 사슬에 묶여 끌려온다. 성기사는 급하게 사슬을 끊어 내려고 들었지만 휴고가 먼저였다.
콰직!
휴고가 성기사를 덮쳤다. 신성력의 회복력도 죽은 이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크르르.
휴고가 샛노란 안광을 빛냈다. 매서운 흉성에 성기사들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렉사르와 휴고 덕에 수인들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들은 배운 것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수인들이 지닌 장점은 기동력이다. 발을 붙인 채 맞붙는 지속적인 교전은 성기사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수인들이 적들을 바쁘게 교란했다. 먼저 사제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비열한 놈들!”
성기사들이 분기탱천했다.
수인들의 움직임은 교활하기 그지없었다. 과연 저주받은 종족답다고 생각했다.
사제의 수가 줄어 간다.
신성력도 부작용 없는 체력만 선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성력은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고, 한계에 다다른 심신은 더욱 큰 반발을 일으킨다.
성기사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한다. 뒤를 보지 않고 신성력을 남발한 대가였다.
성기사들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수인들을 노려봤다.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그래.”
수인들이 으르렁거리며 성기사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성기사들의 숫자가 줄자 전세가 확 기울었다.
이곳은 북부였다.
두 번의 기회는 없었다. 당연히 보급조차 없었다. 이번 기회에 상대를 몰살해야 한다.
“크아아아아!”
수인들이 포효했다. 진득한 야성이 수인들을 더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성기사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몸을 사리지 않는 수인들의 협공에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얀 눈밭에 붉은 피가 흩뿌려진다.
“아…… 신이시여…….”
수인들은 신을 찾는 사제와 성기사들에게 더욱 큰 분노를 느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죄를 짓지 않은 건 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들에게 가족과 친구들이 몰살당했다. 그리고 이들의 눈을 피해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어야만 했다.
발각될까 두려움에 떨면서, 그렇게 살아가야만 했다.
수인들은 단 한 번도 그 원한과 분노를 잊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수인들이 영악하게 움직인다고 한들 피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성기사가 쓰러지는 만큼 수인들도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부상자와 전사자가 속출했다. 이곳은 지금 아수라장이었다.
그래, 이것이 전쟁이었다.
크르르르.
렉사르가 웃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 순간의 판단이 생사를 결정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독적이다.
렉사르는 싸움에 매료되었다. 그간 해 오던 고뇌와 상념들이 모두 지워진다.
전투의 환히 속에서.
렉사르는 흥분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더욱 예리해지고 침착해졌다.
자아를 갖춘 사슬들은 끔찍한 급소를 노리며 움직였고, 이내 성기사들의 관절과 머리통이 부쉈다.
날카로운 톱날검에 절단된 기사들은 내장을 흩뿌리며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렉사르의 몸에도 상처가 늘어났다.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
수인들은 렉사르의 주변에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성기사들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렉사르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렉사르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으며, 성기사들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전세가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종지부를 찍은 것이 바로 가토와 드레이의 등장이었다.
“하아…… 하아…….”
상처투성이인 가토가 끈적한 숨을 토해 내며 전장에 다가왔다.
왼쪽 어깨에 난 상처는 깊이가 너무 깊어 쉬지 않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드레이는 상처가 보이지 않았지만, 하얗게 질려 있는 안색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토와 드레이는 검을 들었다. 둘은 성기사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지칠 대로 지친 둘의 발은 아직 빨랐다.
가토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싸워나갔다. 성기사들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무한할 것 같은 드레이의 신성력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드레이는 성기사들에게 미약한 신성력을 휘둘렀다.
마치 타오를 대로 타오르고 희미하게 남은 잔불처럼 보였다.
“크아아아아!”
드레이가 괴성을 내질렀다. 울분과 원한, 분노가 뒤섞인 괴성이었다.
하얀 배경이 붉게 물들었다. 성기사들과 수인들이 뒤엉켜 바닥에 쓰러졌다. 시체가 산을 이루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마지막 성기사가 드레이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드레이가 비틀거리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드레이의 시야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자가치유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쓰, 쓰러져서는 안 돼.’
북부의 날씨는 혹독했다.
매서운 추위가 덮치고 있는 상황이다.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아 부상자를 치유해야만 했다.
얼핏 봐도 부상자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수인들의 자가치유력이 인간보다 월등하다 한들, 이 날씨에서 방치하면 모조리 죽는다.
당장 가토만 보더라도 바닥에 쓰러진 채 가느다란 호흡만 내쉬고 있었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흐르는 피와 혹한의 날씨가 체온을 앗아간다. 체온이 더 떨어지면 죽음뿐이었다.
‘제발…….’
속이 진탕되는 기분이 들었다. 드레이가 성검을 붙잡았다. 피에 물든 성검은 응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