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습격 (1)
에단은 적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을 선포한 이후에도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하지만 에단은 확신이 있었다.
‘먼저 움직이는 건 내가 아니야.’
상대가 조금이라도 덜미를 주는 순간.
그 순간 자비 없이 휘몰아칠 생각이었다.
창문 사이로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붉은 석양이 어둠에 잠식당한다.
에단은 말없이 수정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직감이 지금 무슨 사건이 일어날 듯하다는 걸 알려 주었다.
우웅.
수정에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에단은 곧바로 수정구를 쥐었다.
― 습격입니다!
수정구 너머에 등장한 르니엘의 얼굴. 에단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지원이 필요하나?”
― ……아니요. 충분합니다.
르니엘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전부 죽여.”
에단의 명령이 떨어지고, 수정구와의 회신이 끊어졌다.
전쟁의 서막이었다.
* * *
“크아아악―!”
인간들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숲은 엘프들의 구역이었다. 숲에서 엘프들을 적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엘프들은 더 이상 자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한 사냥꾼이자 도살자가 되었다.
정령의 힘이 깃든 화살이 적군의 머리통을 관통했다.
지휘관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신뢰할 수 없는 지휘관을 버리고 도망갔다.
도망가는 이들은 엘프들이 사전에 설치해 둔 함정에 빠졌고, 그것마저 빠져나온 적들은 에밀라와 네이드가 처리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상대는 어둠에 스며들어 엘프들을 습격할 계획이었지만, 어둠과 더 친숙한 이들은 그들이 아닌 어쌔신들이었다.
이제 에밀라와 네이드는 사사로운 대화를 주고받지 않아도 합이 맞을 정도로 성장했다.
에밀라의 수준은 아직 네이드와 비견할 수는 없었지만, 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다.
나무가 울창한 지형은 어쌔신들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몸을 숨기고 발을 디딜 수 있는 것이 사방천지에 깔려 있었다.
어둠 속에서 섬뜩한 빛이 번쩍거릴 때마다 사람이 죽어 나갔다.
엘프들과 어쌔신은 철저한 사냥꾼이 되었다.
대열에 함께해 있는 마법사들이 급하게 마법을 영창하려 들었지만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정령들의 방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엘프들은 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더는 이전처럼 바보같이 당할 생각이 없었다.
엘프들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다들 비켜라!”
그때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기사가 정면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치켜든 검에서 사나운 오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무 위에서 활을 겨누고 있던 엘프들의 눈이 가늘어진다.
“비키세요.”
르니엘이 명령하자 엘프들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르니엘의 곁에서 헨리가 나타났다.
“도와줄게요.”
“……감사합니다.”
르니엘은 사양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존심보다 효율을 중시해야 할 순간이다.
“쥐새끼 놈! 거기 있었구나!”
기사와 르니엘의 시선이 마주쳤다. 르니엘은 침착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방대한 마나가 화살을 감쌌다.
정령들도 가세했다.
팽팽한 활시위가 위태롭게 떨린다.
르니엘은 동요하지 않고 기사를 응시했다. 기사가 질주한다. 목표물이 빠른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기사는 자신의 무력을 과신하고 있었다. 타오르는 것처럼 피어나는 오러는 성취의 증명과도 같았다.
아무리 위협적인 화살을 쏘아 보낸다고 한들 단번에 베어 낼 자신이 있던 것이다.
‘건방진 놈.’
르니엘이 코끝을 찡그렸다. 그녀는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대지가 격동한다. 엄청난 지각변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헨리는 힘을 개화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세계수의 영역이었다.
‘세계수의 수호자’였던 헨리에게는 최적의 장소라는 소리였다.
사정없이 움직이는 지면이 병사들을 가둬 놨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나무뿌리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기사의 경로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같잖은!”
기사는 분노하며 검을 휘둘렀다. 나무뿌리는 속절없이 잘려 나갔다.
하지만 헨리의 노림수는 그것이 아니었다. 찰나의 빈틈.
아주 짧은 순간, 주의를 끈다면 그걸로 족했다.
패앵!
르니엘이 활시위를 놓았다. 마나와 정령의 힘을 머금은 화살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쏘아졌다.
어찌나 기세가 살벌했는지 화살이 지나가면서 발생한 바람에 거대한 나무가 흔들렸다.
위협을 느낀 기세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기사의 얼굴에서 당황이 스쳤다. 기사가 검을 움켜쥐었다.
“이까짓!”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인 이답게 기사는 순식간에 자세를 취하고 검을 휘둘렀다.
르니엘와 화살과 오러를 두른 검이 부딪쳤다.
쩌엉―!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기사는 르니엘의 화살을 부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죽음이 드리우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푸욱.
은밀하게 후방을 잡은 네이드가 기사의 등에 단검을 밀어넣었다. 기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네이드는 곧바로 자리를 피했다. 그러자 곧 르니엘의 화살이 오러를 깨부수고 기사의 가슴을 관통했다.
기사는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맞이한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듯 두 눈은 부릅뜬 채였다.
네이드는 죄책감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이게 바로 어쌔신의 방식이었다. 네이드는 확인 사살까지 끝내고 기사의 목을 잘랐다.
그러고는 잘라 낸 머리를 치켜들자 잔당들의 사기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모두 죽었다.
* * *
교전이 끝났다. 완벽한 압승이었다. 아군 사상자의 숫자는 매우 적었다.
백에 달하는 적군을 몰살시킨 반면에 엘프 측의 피해는 매우 경미했다.
엘프들은 죽은 이들에 대한 조의를 표한 뒤, 승리를 만끽했다.
“…….”
툰나는 씁쓸하면서도 복잡한 눈으로 기뻐하는 엘프들을 바라봤다.
승리는 물론 기쁜 것이었지만,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것을 진정으로 기뻐해도 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무언가 본질에서 어긋나는 듯했다.
엘프는 본디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마치…….’
툰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엘프들의 지도자는 자신이 아니었다. 르니엘에게 전권을 일임한 이상 혼란을 가중시켜서는 안 된다.
툰나는 옆에서 수정구를 꺼내 드는 르니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르니엘은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고 있었다.
에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르니엘은 밝게 상기된 얼굴로 승리를 전했다.
“이겼습니다.”
― 그래.
에단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르니엘의 눈에는 옅은 에단의 미소가 보였다.
― 고생했다.
“네.”
― 방심하지 말고 있어.
“알겠습니다.”
통신이 끊어졌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마을을 지켰고, 명령을 수행했다.
충족감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 * *
에단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첫 번째 습격이 끝났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이쪽은 본대이니.’
이곳을 습격하면 바로 전면전으로 번진다. 황제에게는 상당한 부담일 터다.
‘대륙이 혼란스러울 때.’
지금이 적기였다. 에단은 수정구를 들어 사미라에게 연결했다.
― 용무 있으십니까?
“용병 길드.”
― …….
“지금 먹어.”
― 알겠습니다.
간단한 전달을 끝으로 회신이 끝났다.
에단은 몸을 일으켜 외투를 입었다. 블란테를 상징하는 검은 정복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몸을 사리고 있었다. 이제는 움직일 때였다.
에단이 집무실을 나서 수인들이 있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집합.”
고저 없는 한마디.
렉사르와 모든 수인들이 집합했다.
“지금 신성 왕국을 친다.”
“…….”
수인들의 표정에 경악이 서렸다.
에단은 차게 식은 눈으로 수인들을 훑어봤다. 시선이 닿을 때마다 수인의 몸이 움찔거렸다.
“왜? 두렵나?”
에단이 물었다.
수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까지 틀어박힌 공포는 그리 쉽게 이겨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심하기는.”
에단은 실망한 눈으로 수인들을 바라봤다.
“병력의 이동은 최소화한다. 신성 왕국을 치는 것은…… 너희들과 나, 그리고 렉사르를 포함한 몇 명이 전부야.”
렉사르와 수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표정에는 절망이 서려 있었다.
고작 이 숫자로 신성 왕국과 전쟁을 벌인다고?
그러한 물음이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에단은 그런 수인들의 반응이 이해된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지원군도 있으니 그렇게 긴장하지 마.”
준비해 왔던 것들을 꺼내 올 시간이었다.
* * *
에단은 에르미온과 오르번, 그리고 드레이를 호출했다.
늦은 시간 이루어진 호출에 에르미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아…… 또 무슨 일인데.”
“전이 마법 좀 부탁하려고.”
“또? 이번에는 뭔데? 또 어디서 이상한 짓을 벌이려고…….”
“전쟁.”
“……어?”
“전쟁이라고.”
에르미온은 멍한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에단은 무덤덤하게 오르번에게 시선을 돌렸다.
“준비는 됐나?”
“어느 정도는.”
“그걸로는 안 돼.”
오르번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느 정도 수준을 원하는 거지?”
“상대를 전멸시킬 정도까지.”
“……쯧, 바라는 게 많군.”
“위대한 흑마법사 아니었나?”
“한번 해 보지. 마석을 전부 사용해도 상관없나?”
“어. 어차피 나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야.”
원한다면 무한대로 마석을 생산할 수 있는 게 바로 에단이었다.
가지고 있는 마석을 전부 사용해도 부담 따윈 없었다.
패배는 결국 모든 걸 잃을 뿐이었다. 지금 에단에게는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했다.
말없이 에단의 눈을 응시하던 오르번이 한숨을 내쉬었다. 보면 볼수록 상대하기 어려운 녀석이었다.
‘나이가 전부가 아닌가.’
쓴웃음을 지은 오르번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나?”
“한 시간이면 충분하겠군.”
“그러지.”
준비를 갖췄다. 수인들은 장구류를 챙겼다. 이제 더 이상 수인들에게 갑옷과 무기는 어색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능숙하게 채비를 갖췄다.
“보급로 따위를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식량은 최소한으로 챙긴다.”
이곳과 북부의 거리는 매우 멀었다.
에단은 전형적인 공성전은 펼칠 생각이 없었다. 부족한 식량은 약탈과 자급자족으로 감수할 생각이었다.
수인들과 에단, 렉사르가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대규모 이동이기에 마법진의 규모를 더욱 늘렸다.
늦은 시간 벌어진 소란에 휴고와 가토, 그리고 리사와 첸이 찾아왔다.
그들은 상황을 파악하고 참전 의사를 밝혔다.
“첸 경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첸은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있어야만 기사들의 원활한 통제가 가능했다. 첸은 블란테의 기둥이었다.
“휴고, 가토.”
“……네.”
“자신 있나?”
잠시 고민하던 둘이 서로를 마주 봤다. 그러고는 동시에 에단을 응시했다.
둘의 눈빛에는 결의에 차 있었다.
“네!”
에단은 씨익 웃으며 손짓했다.
가토와 첸이 마법진 위에 몸을 올렸다.
리사는 불안해하면서도 초조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리사가 에단을 향해 말했다.
“……갑자기 이러기 있어?”
“말이 짧다?”
“끝까지…….”
“어쭈.”
“……무사히 돌아와. 그러면 약속 지킬게.”
리사가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눈을 끔뻑거리던 에단이 피식 웃었다.
“이번만 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