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전쟁 준비 (4)
“니들 여기서 뭐 하냐?”
에단이 기막힌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가토와 휴고를 바라봤다.
둘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연무장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틀어막았다. 연무장이 땀으로 인해 흥건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녀석들이 어디 갔길래 얼굴이 안 보이나 했더니 둘이서 하루 종일 대련을 하고 있었다.
에단이 헛웃음을 둘의 목덜미를 붙잡고 질질 끌며 밖으로 나왔다. 완전히 곯아떨어졌는지 둘은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근처 벤치까지 가토와 휴고를 끌고 간 에단은 둘은 적당히 던져 놨다.
“……골 때리네.”
가만히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둘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고는 했다.
편안함이라.
에단에게는 낯선 감정이었다. 그는 어디에서나 독보적이었기에 늘 고독했다.
딱히 외로움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에단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타인은 늘 귀찮은 짐덩어리라고 여겼다.
한데 지금은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안정감은…… 썩 나쁘지 않았다.
‘내 선택이.’
이들의 목숨을 결정한다. 늘 가볍던 어깨가 무거워졌다.
에단은 한 번 실수를 저질렀다. 가신들과 수습 기사들의 목숨으로 오만한 판단의 대가를 실감했다.
운이 좋았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늦었거나, 벨몬트와 타미가 나서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에단은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실낱같은 감정이 흘러나오며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에단은 살기를 갈무리했다.
살기를 표출해야 할 녀석들은 따로 있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어느 방향을 바라봤다.
에단이 보는 방향에는 신성 왕국이 있었다.
* * *
수인들의 혹독한 훈련은 지속되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혹독하게 훈련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성 왕국은 소규모로 상대한다.’
제국을 놔두고 전면전을 펼치는 건 위험하다. 병력이 대거 이탈하는 순간, 본거지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그 녀석이 그때를 놓칠 리가 없지.’
에단은 크리스토가 어떤 녀석인지 알고 있었다. 늘 생글생글 웃으며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내면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이미 황자의 신분일 때도 실권을 쥐고 흔들던 크리스토였다.
황제의 직위를 얻은 지금은 완전히 제국을 틀어쥐고 있을 터였다.
‘빈틈을 보여서는 안 돼.’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신성 왕국이 먼저 급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한 채 문을 걸어 잠갔다.
병력의 이동도 문제였다. 북부의 혹독한 기후는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를 갉아먹는다.
강한 정신력을 지닌 블란테의 기사들이라면 북부의 날씨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겠지만, 불리한 환경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극한의 날씨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녀석들로 인원을 구성하면 그만이다.
뛰어난 체력과 눈밭에서도 줄지 않는 기동력. 추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신체 조건.
북부에서 살아온 수인들이 제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조건들이 있다고 한들, 체계적인 훈련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건 전쟁이었다.
대륙에 성기사들의 강함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신의 가호라 할 수 있는 신성력을 온몸에 두른 성기사들의 위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싸워도 지치지 않고, 상처 입어도 다치지 않으며,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기사.
그것이 바로 성기사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불굴의 전사들을 준비해야지.’
에단은 이미 오르번에게 얘기를 끝냈다.
처음에는 거부감을 보이던 오르번도 곧장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수인들은 모두 뛰어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잠재력이 진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치가 필요했다.
수인들은 원석이나 다름없었다.
보석이 되기 위해서는 표면을 깎아 내고 다듬어야만 했다.
그를 위해 수인들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수인들에게는 인간의 방식을 체득할 필요가 있었다.
무지는 죄였다. 적에 대해 알지 못하면 허무한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렉사르는 수많은 아수라장에서 살아온 전사였다. 경험과 노련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반면 첸은 기사단장으로서 온갖 전술과 전법에 능했다. 전선의 흐름과 양상을 습득하기 위해 같은 훈련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자존심 강한 수인들은 둘에게 감히 반기를 들지 못했다.
처음에는 인간에게 훈련을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한 수인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첸은 무력으로 반발을 찍어 눌렀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상대해 주마.”
냉막한 한기가 흐르는 눈길에 수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세상은 넓었고, 괴물들은 넘쳐났다. 수인들은 좁은 우물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너무 오랜 시간 살아왔다.
인간의 교활함을 배워야 한다. 패자의 변명 따위는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수인들은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았다. 비록 인간에게 패해 몰락했지만, 복수심까지 잊은 것은 아니었다.
가슴속에는 늘 칼을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장에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다.
렉사르는 수인의 가장 큰 장점인 기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게릴라전을 훈련시켰다.
“지형을 이용해라! 북부는 너희들의 고향이 아니었나? 욕심부리지 말고 엄폐물을 활용해! 필요하면 흙이나 돌이라도 던지란 말이야!”
렉사르의 언성이 높아졌다. 수인들은 더 이상 자존심을 부리지 않았다. 렉사르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첸은 사소한 실수들을 지적했다. 엄폐의 능한 수인들도 첸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휴식은 최소한으로 주어졌다. 수인들은 짧은 휴식에도 몸을 회복했다.
근력 훈련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미 에단을 통해 체계적인 웨이트와 체력 훈련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바벨과 원판이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피로의 찌든 수인들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졌지만, 한편으로는 활기가 넘쳤다.
한편 에단에게는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생겨났다.
에단은 르니엘과 엘프들을 찾아갔다. 엘프들은 주어진 객실이 아닌 교정에 있는 숲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정형화된 건물보다 숲이 편하고 안락했기 때문이다.
에단은 르니엘과 엘프들에게 숲으로 돌아가라 말했다.
“번거롭기야 하겠지만 여기 있는 것보다 숲이 나아. 변수에 대응하기도 수월하고, 기사도 추가적으로 붙여 둘 테니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엘프들을 이끌고 바로 채비를 갖추겠습니다.”
르니엘은 순순히 에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더는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 헨리도 보낼 테니 습격이 있더라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야. 이동할 때는 마법진을 이용해.”
엘프들은 본디 마법에 관해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었지만, 아카데미에서 동화되어 생활하며 거부감이 상당히 옅어졌다.
르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 에단은 헨리에게 찾아갔다.
최근 두문불출한 헨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카데미 밖 주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잘 취하지도 않는 체질이 되었는데도 헨리는 술을 놓지 못했다. 이제는 습관의 영역이었다.
바 테이블에 맥주병을 쌓아 두고 쓰러져 있는 헨리.
에단은 한심함이 가득 묻어 나오는 시선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에단이 헨리 뒤에 다가가 그대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빠악―!
통렬한 타격음과 함께 헨리가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에단 님?”
“좋냐?”
경멸 어린 눈초리.
빠르게 사태 파악을 마친 헨리가 맥주병을 몸으로 가리며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하…… 최근에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 네가 스트레스받을 일이 뭐가 있는데.”
“그…….”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에단의 말대로 스트레스받을 일 따위는 없었다. 헨리의 생활양식은 그야말로 한량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에단이 정신없이 대륙을 쏘다닐 때도 헨리는 아카데미에 남아서 백수 짓을 즐겼다. 그러는 와중에도 봉급은 꼬박꼬박 지급되었다.
유일하게 스트레스받는 일이라고 하면, 다음 날 숙취가 좀 짜증 난다 정도?
헨리가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자 에단의 이마에 선이 그어졌다.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출장이나 다녀와.”
“……네? 저 말고 다른…… 아, 아닙니다. 다녀올게요. 어디로 가면 되죠?”
“네 고향.”
“고, 고향이라면…….”
헨리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거긴 진짜 너무 할 게 없는데요. 온통 나무밖에…… 하하. 고향에서 편히 휴양, 아니, 열심히 일하다가 돌아오겠습니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그럼 지금 바로 준비해.”
“지, 지금이요? 그건 너무 촉박…… 하지가 않네요. 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골이야…….”
헨리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바삐 움직였다. 비틀거리는 건 덤이었다.
헨리와 엘프들을 보낸 뒤, 리사가 에단에게 찾아왔다.
에단은 묘한 눈초리로 리사를 바라봤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내가 못 찾아올 곳이라도 온 건가?”
“말이 짧다? 넌 재학생 신분이 아니었나?”
“치사하게……!”
언성을 높이려던 리사가 포기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깐 나 좀 도와줘.”
바닥을 기는 목소리.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뭐?”
“아, 좀 도와달라고!”
얼굴을 붉힌 리사가 대뜸 소리쳤다. 에단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뜸 찾아와 놓고 뭐라는 거야? 주어를 말해야지. 아카데미에서 그것도 안 배웠냐?”
“아…… 진짜 열 받게 만드네…….”
리사가 뾰족한 눈초리로 에단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나 좀 강해지게 해 달라고. 오빠가 그거 잘한다며…… 그래도 교수잖아.”
리사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에단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수치스러웠는지 고개를 들지조차 못했다.
붉게 상기된 얼굴은 마치 불타는 것 같았다.
말없이 리사를 지그시 바라보던 에단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에단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아…… 최근에 가토한테 뒈지게 처맞았다고 들었는데, 그것 때문에 왔구나? 이거 오빠인 게 쪽팔려서 고개를 어떻게 들고 다녀야 할지 모르겠네.”
“이익!”
리사가 발끈하며 성을 냈지만 지금 자존심을 굽혀야 하는 입장인 것은 리사였다.
리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단은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리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불평 안 할 자신은?”
“확실해.”
“한마디라도 불평하면.”
“없던 일도 해도 좋아.”
“뭔 개소리야? 그러면 수지타산이 안 맞지. 바쁜 사람 귀찮게 해 놓고 없던 일로 하면 끝이야? 아주 지 좋을 대로 해석하네.”
까득.
“……그래. 그럼 어떻게 해 줄까?”
“앞으로 나를 부를 때 ‘존경하는 오라버니’라고 호칭해.”
에단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내 조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