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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격투천재-297화 (297/398)

◈ [297화] 전쟁 준비 (2)

에단이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아카데미 내부의 분위기는 상당히 흉흉했다.

블란테와 신성 왕국.

모두 막강한 힘과 위명을 떨치는 세력들이었다. 학생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난 잠깐 휴학하려고.”

“너도?”

“응. 부모님께서도 걱정하시고…… 수업도 제대로 진행이 안 되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

아카데미를 이탈하는 학생들의 숫자도 많았다.

블란테와 아카데미가 명분을 얻으며 좋은 이미지를 얻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전쟁 자체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그런 우려도 나왔다. 아카데미의 공립성이 흐려지고 블란테의 개인 사유화가 된 것 아니냐고.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블란테가 합리성을 띠고 움직이고, 명분을 쥐고 있다고는 해도, 블란테는 결국 아카데미를 흡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근 영주들 입장에서는 부담되는 상황이었다. 깊은 산중에 틀어박혀 있던 사나운 맹수가 갑자기 곁으로 이사를 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래도 난 남아 있을래.”

하지만 그럼에도 잔류하는 학생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그래?”

“응. 난 블란테가 옳다고 생각하거든.”

자부심.

그것이 학생들을 아카데미에 남아 있도록 만들었다. 학생의 얼굴은 결의에 차 있었다.

블란테의 행보는 마치 영웅의 서사시와도 같았다.

부패한 세력과 맞서 싸우는 영웅들.

용사이자 성자인 드레이.

드워프와 엘프, 수인같은 이종족들.

처음에는 낯설고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나이가 어린 학생들은 금세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기피하는 학생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이종족들에게 호의를 느끼는 학생들의 수가 더 많았다.

학생들은 아카데미에 소속감과 함께 명예와 자부심을 느꼈고, 신성 왕국과 제국에는 반감과 분노를 느꼈다.

리사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변화하는 분위기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바뀌고 있어.’

은연중에 만연하던 차별과 멸시가 옅어지고 있었다.

카이제르의 방계 출신으로 타 학생들을 멸시하던 라프는 아예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고 잠적하고 있었다.

‘쯧.’

꼴불견이라고만 여기던 녀석이었지만, 막상 출석조차 하지 않고 소식이 끊기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교정은 한산했다.

리사는 복잡한 감정을 조금이라도 환기시키기 위해 산책을 나왔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였으면 옆에서 율리가 쉼 없이 재잘거렸을 텐데 그녀는 지금 본가로 돌아간 상태였다.

부모님의 우려 때문이다.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 폭풍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자녀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으니.

‘……나만 멈춰 있어.’

형국은 빠르게 뒤바뀌고 있었고, 선두에는 에단이 있었다.

자신의 오빠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경멸하고 혐오하던 혈육이 바로 에단이었다.

그런 에단이 대륙을 뒤흔들고 있었다. 블란테의 정식 후계자로 임명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당황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오빠 같으니.’

리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가주의 자리에 욕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딘가에 얽매이거나 누군가를 책임지는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았다.

단지 자신만 정체되어 있다는 이 상황이 엿 같았다.

모룬은 사망했다.

모룬이 가문을 배반했고, 모룬을 처형한 이는 빈센트였다.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리사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모룬과 딱히 친밀한 교류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가문의 계승권을 두고 벌이는 이권 다툼에 진저리가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룬도 리사의 혈육이었다.

그 사실은 빈센트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거고.

마음이 무거웠다. 기분 전환을 위해 교정을 거닐고 있었지만,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블란테가 아카데미로 이주하면서 리사는 카론과 만났다.

카론은 더 이상 이전까지 봐 왔던 치기 어린 애송이가 아니었다. 눈빛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참극을 겪은 카론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두 눈에는 독기를 품고 있었다.

더 이상 혈통과 권위를 믿고 까불던 막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카론은 기사들의 틈바구니에서 매일 같이 뼈를 깎는 수련을 해 나간다.

리사는 초조함을 느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조급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녀의 재능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느끼는 권태는 대륙 제일의 검술 명가라고 불리는 블란테에서도 느꼈고, 대륙 각지에서 영재들이 몰려오는 아카데미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두 리사가 너무 뛰어났기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느끼는 답답함과 초조함이 적응되지 않았다.

학급의 동료라고 여기고 있던 드레이는 성자이자 용사로 모두의 칭송을 받는다.

블란테에서는 상대도 되지 않던 수습 기사 가토는 어느새 리사보다 뛰어난 검사가 되어 있었다.

처음 가토와의 대련에서 패배했을 때, 리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가토는 리사와 또래였다.

그리고 리사는 단 한 번도 또래에게 질 거라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리사는 오빠에게 패배하고 가토에게 패배했다. 부정할 수 없는 완패였다.

스스로를 자신하며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그녀의 성장은 정체되었고, 아래에 있다고 여긴 이들이 그녀를 추월했다.

그리고 그 간극은 지금도 계속 멀어지고만 있었다.

꽈아악.

리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속에서 울분이 차올랐지만 해소할 수가 없는 울분이었다.

리사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빈말로라도 아름다운 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은 흉터와 굳은살이 가득했으니.

검에 대해 소홀하게 여긴 적은 없었다. 리사는 늘 검을 휘둘러 왔다. 그것은 블란테에서도, 아카데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검의 축복.

그녀의 재능을 칭송하는 단어였다. 우스웠다.

‘뭐가 검의 축복이야.’

결국 제자리걸음 하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는데.

싸우고 싶었다.

다치고, 패배해도 좋았다. 리사에게는 지금 치열함이 필요했다.

아카데미에서의 정형화된 수업으로는 그것을 충족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학생이었다.

이제 와서 학생의 신분을 포기하고 블란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교정을 거닐고 있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가토였다.

가토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리사를 바라봤다.

“아가씨? 여기는 무슨 일로…….”

“왜? 나는 산책도 나오면 안 돼? 여기가 네 소유기라도 해?”

리사의 말투는 삐딱했고, 가토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 기분이 상하셨으면 죄송합니다.”

“쯧.”

리사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가토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열 받는 패배를 꼽으라면 단연 가토와의 대련에서 패배했을 때다.

리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가토는 눈치를 살피며 리사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정지.”

“……네?”

“너 바쁘냐?”

“아…… 바쁘……죠?”

“바쁜 녀석이 여기서 농땡이나 피우고 있어?”

“어…….”

가토는 할 말을 잃었고, 리사는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할 거 없으면 대련이나 한번 하지?”

“대련이요?”

시원찮은 가토의 반응에 리사의 이마에 주름이 그어졌다.

“왜? 나 같은 좆밥이랑은 대련도 하기 싫어?”

“아,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대련.”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리사의 어조에는 날이 서 있었다. 가토는 날카로운 리사의 태도를 보고 그녀의 감정 상태를 유추할 수 있었다.

‘……나도 비슷했으니.’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리사의 조급함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표정과 몸짓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가토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고, 그 순간 리사가 가토를 죽일 듯이 쏘아봤다.

“지금 비웃었냐?”

“아닙니다.”

가토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리사와 가토는 비어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둘은 이동하면서도 사사로운 잡담 한번 나누지 않았다.

가토는 내리깔린 침묵이 영 껄끄러웠으나, 그렇다고 함부로 말을 걸 정도의 친화력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하아…….’

이럴 때는 휴고가 그리워졌다. 휴고는 어딘가 어벙하고 얼빠진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순수했다.

하지만 최근 휴고는 정신없는 날을 보내고 있었다. 북부에서 돌아온 직후 수인들과 함께 훈련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뭔가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데미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서운함을 느낄 일도 아니었지만 가토는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연무장에 도착했다. 가토는 구석에 배치된 목검을 들고 왔다.

“오늘은 목검으로 하시죠.”

“알겠어.”

리사는 이번에까지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다. 목검을 쥔 리사가 몇 차례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공기를 찢는 살벌한 파공성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반면 가토는 몸을 풀지도 않은 채 목검을 추욱 늘어트렸다.

리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하냐?”

“저는 준비가 끝났습니다.”

리사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다. 리사가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나 상대로는 몸을 풀 필요도 없다…… 그건가?”

여전히 날을 잔뜩 세운 리사의 태도에 가토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정말로 준비가 끝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좋아. 네가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봐야겠어.”

리사가 상단세를 취했다. 리사는 또래 남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근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 번에 끝내 주지.’

리사는 전신의 감각을 집중했다. 시야가 좁아지며 가토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리사에게서부터 맹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반면 가토는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세를 취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표정에는 긴장조차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저 관조하듯 리사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리사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리사의 생각과 달리, 그게 가토의 준비였을 뿐이다.

‘고정관념을 버려라.’

가토는 빈센트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 수도 없이 생각해 왔다. 빈센트가 보여준 비기.

그것을 보자마자 가토는 발끝에서부터 전신을 휘감는 전율을 느끼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검의 정점.

‘편견을 지우고.’

시야를 넓게 가진다.

좋은 예시가 널렸다. 싸움에 들어선 휴고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유와 변칙이 곧 휴고의 무기였다.

반면 에단은 모든 것이 능숙했다. 심리전과 상대를 유도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첸은 마치 높디높은 요새를 상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가토는 조급함을 내려놓았다.

씨익.

가토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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