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화] 전쟁 준비 (1)
신성 왕국.
원탁.
고성이 오간다. 수많은 추기경들과 대주교들이 언성을 높였다. 원탁의 중심에 앉아 있던 교황이 깊은 한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정숙하시오.”
교황의 한마디에 정적이 내리깔렸다. 교황은 차게 식은 눈으로 추기경들과 대주교들을 바라봤다.
“쓸데없는 일로 언성을 높이는 게 해결 방안인가?”
“…….”
교황의 지적에 추기경과 대주교들이 고개를 숙였다.
저번 사건으로 신성 왕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성기사단장인 라오나드가 사망하고 성녀를 빼앗겼다.
민심은 추락했고, 신성 왕국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교황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방도가 없다.
도무지 해결 방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녀석이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되면.’
신성 왕국에 목줄을 채우려 들거나 버리는 패로 쓸 것이다.
무엇 하나 안 될 일이다. 신성 왕국과 제국은 협력 관계였지만,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교황은 황태자 크리스토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인지하고 있었다.
교황은 고민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계획은 틀어지고, 황태자는 혼란을 틈타 기회를 얻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녀석들을 깨워라.”
“교황님!”
“지금 그 말씀은!”
곧바로 반발이 튀어나온다. 교황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추기경과 대주교들을 바라봤다.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한번 들어 보도록 하지.”
“그, 그것이…….”
“서, 성기사들을 추려서 특무대를 구성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비록 라오나드는 사망했지만, 남은 성기사들을 이용한다면…….”
“지금 장난하나?”
교황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아직도 상대가 누군지를 판단하지 못한 건가? 녀석들이 일개 도적단이라고 여기는 거야?”
“…….”
교황의 질타에 추기경과 대주교들이 입을 다물었다.
“벌써 그날의 기억들을 모두 잊어 버렸나? 정신 차려. 녀석들은 블란테야. 도적단이나 용병 나부랭이가 아닌 대륙 제일의 무력 집단이라고.”
“……죄송합니다.”
추기경 하나가 고개 숙여 사죄했다. 교황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며 뒷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 이제 녀석들을 깨울 때다.”
이제는 정말 전쟁을 대비할 시기였다.
* * *
메이와 한니발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에단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실종된 수인의 관하여 메이와 한니발은 서로 협력해 각본을 만들었다.
블란테는 절대적인 선역으로, 반대로 신성 왕국은 최악의 악역으로 설정했다.
“……수인이라고?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해?”
“그러니까…… 블란테가…….”
사실과 허구를 적절하게 섞은 각본은 대륙 각지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대륙은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거기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있었다.
블란테가 공식적인 발표를 낸 것이다.
“저희는 이제 악행을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에단이 단상 위에 올라섰다.
에단의 옆에는 이제 성자이자 용사로 알려진 드레이와 제국의 2황자인 칼베리안도 같이 서 있었다.
“부패한 신성 왕국과 제국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증인들이 하나씩 단상 위에 올라섰다. 엘프들의 장로를 맡은 르니엘과 두드리는 망치 부족의 족장 바크락.
그리고 각 수인 부족의 족장들도 전부 단상 위에 올라 그동안 쌓아 온 울분을 토해 냈다.
모든 원망은 신성 왕국과 제국에게 집중되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더는 묵인할 수 없습니다. 많은 피해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더 이상 이러한 참극을 되풀이할 생각이 없습니다.”
연설을 지켜보던 좌중들이 긴장했다. 뒤이어 나올 말이 예상되는 것 같았다.
“블란테는 오늘부로 신성 왕국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 * *
“……진짜 전쟁이야.”
가토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손이 보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쟁.
전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가토가 주변에 있는 기사들을 바라봤다. 여유로웠던 기사들의 표정도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카데미의 분위기도 흉흉했다. 모든 수업이 일시 중단되었다.
반면 전면전을 선포한 당사자인 에단은 여유로웠다. 전쟁을 대비하는 모습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듯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크리스토의 즉위식 날이 되었다.
에단은 제도로 갈 채비를 갖췄다.
에단과 동행하는 이는 칼베리안 혼자였다. 에단은 즉위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다른 이들에게 몇 가지를 당부를 해 뒀다.
“세계의 중심은 지금 누가 지키고 있지?”
“그것이…….”
르니엘이 말끝을 흐리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본분을 잊지 마. 네 본분은 어디까지나 세계수를 지키는 것이니.”
지금 당장은 세계수의 역할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언제나 만약을 대비해야만 했다.
에단은 엘프들의 숲에 블란테의 기사들을 파견했다.
지금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병력을 배분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에단은 강행했다.
‘내가 녀석이라면.’
지금 노릴 수 있는 곳은 세계의 중심밖에 없었다. 녀석들은 지속적으로 그곳을 노려 왔으니.
일을 끝낸 에단은 칼베리안과 함께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럼 다녀오지.”
에단은 짤막한 인사와 함께 제국으로 이동했다.
* * *
인파는 적었다. 성녀의 순례 때와 비교하면 더욱 대비되었다.
제국의 황제가 탄생하는 즉위식이었지만 제도는 한산했다.
블란테의 정복을 입은 에단과 칼베리안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제도를 지나갔다.
이목이 집중되었다. 블란테가 전쟁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에단은 시민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 앞에 다다랐다.
성문은 경비병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에단과 칼베리안의 모습을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병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길을 열었다. 블란테가 방문한다면 길을 열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단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성문을 지났다. 그러고는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성의 강당으로 향했다.
강당에서는 즉위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약식으로 진행되는 즉위식은 간소했다.
칼베리안은 굳은 표정으로 크리스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토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졌다. 그는 뚜벅뚜벅 황제의 옥좌를 향해 다가갔다.
크리스토가 옥좌에 앉았다.
젊은 나이에 제국을 통치하는 지도자가 되었지만 어색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크리스토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크리스토의 시선이 칼베리안에게 향했다.
칼베리안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시선은 무관심에 더욱 가까웠다.
크리스토의 눈이 이번에는 에단에게로 향했다. 칼베리안과는 반대로 에단에게는 관심을 보였다.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오긴 와야지. 오기 전에는 깽판이라도 한번 칠까 했는데…… 별로 필요는 없을 것 같네.”
피식 웃은 에단이 싸늘한 시선으로 강당을 훑어봤다.
강당 안에 있는 귀족들의 표정은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든 이가 현 황제인 크리스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황자의 신분으로도 실권을 장악한 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크리스토였다. 그런 크리스토가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크리스토는 폭군의 기질이 다분했다. 판단력과 통찰력은 뛰어났지만, 오히려 그 점이 귀족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명망 높고 위세를 떨치는 귀족이라고 한들 현 황제 앞에서는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었다.
꿀꺽.
꺼림칙한 적막 속에서 침을 넘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즉위식에 참여한 모든 귀족들이 황제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발악했다.
황제의 변덕에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단은 모두가 몸을 사리고 있을 때 황제에게 정면으로 들이박았다.
“어때. 아버지를 죽이고 자리를 차지한 기분은. 상쾌한가?”
귀족들의 눈이 터질 것처럼 부릅떠졌다. 에단의 곁에 있던 칼베리안도 경악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면전에서 엄청난 모욕을 들었음에도 크리스토는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갑자기 모함을 들으니 가슴이 쓰리군.”
“퍽이나.”
고깝다는 듯 코웃음 친 에단이 싸늘한 눈초리로 좌중을 훑었다.
“나는 끝까지 얘를 밀어붙일 생각이거든. 아비를 죽인 패륜아보다는 명분이 있잖아?”
“역모를 꾸미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나?”
“듣기 나름이지.”
에단은 반박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맞는 사실이었으니까.
“사실 좀 궁금하단 말이야. 네가 원하는 게 뭐야?”
“글쎄.”
크리스토는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표정 한번 재수 없군.”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혹시 머리가 이상한가? 칭찬으로 한 소리는 아닌데 말이야.”
“그보다 전쟁을 벌인다고?”
“어.”
에단은 사납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처신 잘하는 게 좋을 거야. 불똥 튀는 걸 원하지 않으면.”
“쉽지 않을 텐데.”
“어려울 것도 없지…….”
에단은 자신 있었다. 전쟁을 벌이는 것은 맞았지만 크리스토의 예상과는 달리 흘러갈 것이다.
“이미 시작됐거든.”
“그런가?”
“가만히 결과나 지켜보라고.”
에단은 칼베리안과 함께 강당을 빠져나갔다.
크리스토는 에단을 붙잡지 않았다. 그저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멀어지는 에단과 칼베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하지.”
크리스토의 말에 에단이 중지를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본 크리스토가 대소를 터트렸다.
* * *
크리스토는 황제가 되었다.
즉위식이 끝나고 에단과 칼베리안은 곧장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아카데미로 복귀한 에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르번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평소에 연구실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는 오르번은 에단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여긴 또 무슨 일이지?”
오르번은 불청객을 봤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에단은 태연하게 본론을 꺼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너는 진짜 양심이 없는 건가?”
“별건 아니야.”
“……후우, 들어나 보지.”
오르번이 포기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마법사면 혹시 언데드나 그런 쪽도 곧잘 다루나?”
“그걸 묻는 이유는?”
오르번의 눈이 가늘어졌다.
묘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시선이었지만, 에단은 삐딱한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혹시 그쪽 분야에는 영 소질이 없나?”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건가?”
오르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쾌해하는 것이 표정에서 드러났다.
“그래서 할 수 있어, 없어.”
“허.”
기막힌 표정을 지은 오르번이 지팡이를 들었다.
쿵.
꺼림칙한 기운이 일렁이며 그림자가 바닥을 잠식하고, 죽은 마나가 요동친다.
케게게게게게―!
보는 것만으로도 흉측한 괴물들이 그림자를 비집고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매우 이질적이고 혐오스러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놀라거나 혐오하기는커녕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오.”
“……쯧.”
“할 수 있었네.”
“그래서 용건이 뭐냐.”
“그걸로 전쟁 좀 하자.”
“……뭐?”
오르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에단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신성 왕국, 그 새끼들 엎어 버리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