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화] 실체 (2)
“크흡.”
아란이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에단에게 계속 당하기만 하던 입장에서, 반대의 상황이 되어 지켜보니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나?”
아란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인지 호족의 얼굴에 거대한 힘줄이 불거졌다.
호족의 살기등등한 기세에도 아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어, 조금.”
긴장이 옅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무거웠던 호흡도 가벼워졌다.
‘호족이라.’
수인 중에서 가장 호전적이며 뛰어난 전투력을 지니고 있는 종족.
하지만 어째서인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호족들 모두가 에단에게 달려들었지만, 에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아란은 그런 에단에게 수도 없이 도전했다가 박살 난 경험이 있었다.
그것을 상기하니 호족이 내뿜는 살기도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녀석들과 비교해 봐도.’
아란은 휴고와 렉사르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앞에 호족과 그 둘을 비교해 봤을 때.
‘별것도 아니었군.’
눈앞의 호족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아란이 제자리에서 가볍게 통통 몸을 튕겼다.
그 여유로운 모습이 거슬렸는지 호족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주제 파악을 시켜 주마.”
으르릉.
아란의 상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위압적인 울음소리였지만 아란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선공을 양보할 필요는 없으니.’
팟!
아란이 지면을 박차고 쇄도했다. 호족의 샛노란 동공이 기민하게 움직이는 아란을 맹렬하게 좇았다.
‘역시.’
호족의 동체 시력과 반응속도는 재빨랐다.
하지만 아란은 수많은 대련 끝에 반응속도와 동체 시력이 실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였다.
아란이 도약하는 시늉을 하자 호족의 몸이 움직였다.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은 행동.
‘과거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군.’
어째서 에단과 다른 이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아란은 곧장 움직임을 바꿨다.
도약하려고 한 것은 속임수였다. 아란은 상체를 깊게 숙여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촤악!
갑작스러운 아란의 행동에 상대는 당황한 듯 보였지만, 특유의 민첩한 반응속도로 아란의 공격을 피해 냈다.
하지만 아란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휘릭!
순간 아란의 몸이 회전하며 아란의 뒷발이 호족의 명치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커헉!”
호족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잡으려 들었지만, 아란은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란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마치 폭풍 같은 움직임이었다.
‘제기랄…… 호흡이…….’
호족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표정에는 당혹감과 함께 분노가 공존해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는지 감이 잡힐 것 같아.’
에단이 그동안 무슨 말을 해 왔는지 느낌이 왔다.
정직함.
그것은 싸움에 있어 의미 없는 단어였다. 결국 끝에 살아남는 건 승자였고, 승자가 곧 정의였다.
파바박!
아란이 수많은 페인트를 던졌다.
수읽기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란의 상대는 모든 공격에 정직하게 반응했다.
표정. 호흡. 시선.
아란은 에단과 휴고, 렉사르가 보여 줬던 움직임을 상기했다. 그들의 노련함과 교활함.
완벽하게 체득하지는 못 했다 하더라도 흉내를 낼 수는 있었다.
아란이 던진 수많은 허상들.
수인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베일 속에 가려진 실체를 확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저렇게 반응이 정직하다면 더더욱.
촤악!
결국 호족은 가슴팍에 큰 자상을 입으며 쓰러졌다.
아직 둘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에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전투를 중단시켰다.
“자, 여기까지.”
에단이 거만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자 쓰러진 호족이 몸을 일으키며 분노를 토해 냈다.
“나는 아직!”
콰직!
에단이 격분을 토해 내는 호족의 턱을 그대로 걷어찼다. 턱을 얻어맞은 호족이 눈을 까뒤집으며 바닥에 픽, 하고 쓰러졌다.
“끝났어. 설마 죄다 눈이 옹이구멍인 건 아니겠지? 거기서 더했으면 저 새끼는 죽었어.”
“…….”
에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설령 사실이 아니라고 한들 지금 여기서 반대의 의견을 내세울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연이은 패배에 호족들은 모두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자존심 강한 호족들은 은연중에 에단에게 심신 모두가 제압당하고 말았다.
“자, 그럼 이제 다시 대화를 좀 나눠 볼까?”
에단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 * *
휴고와 렉사르가 마을에 숨어들었다. 여러 계획들을 세우고 수정했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정면 돌파.’
애매한 방식을 택하면 더 큰 화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수인들의 폐쇄성은 이미 한 차례 경험한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몰래 잠입하여 더 강한 의심을 사는 것보다는 정면에서 적의가 없다는 사실을 고지하는 게 나았다.
‘함정들이 많군.’
렉사르는 차게 식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전 마을과 달리 이 마을 주위에는 여러 함정들이 즐비해 있었다.
나름 치밀하게 설치해 둔 것 같지만, 노련한 렉사르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렉사르가 휴고를 바라보며 입모양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지금.’
렉사르의 말을 이해한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들이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게끔 천천히 존재감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눈을 밟아 나가며 앞으로 향했다.
적의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든 둘은 천천히 마을을 향해 다가갔지만 돌아오는 것은 화살 세례였다.
“……쯧.”
바람을 가르며 쇄도하는 화살들.
렉사르는 혀를 참과 동시에 섬뜩한 미소를 드러냈다. 사실 그에게는 이러한 방식이 더욱 성미에 맞았다.
절그럭.
냉기를 머금은 사슬의 소리.
렉사르가 품에서 사슬을 꺼내 들었다. 사슬이 화려하게 움직이며 수많은 화살들을 집어삼켰다.
“나는 대화를 먼저 시도했어.”
렉사르가 톱날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휴고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 웃었다.
“……하하.”
파밧!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마을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은 상대를 제압하는 게 우선이었다.
전투가 벌어졌다. 수인들의 전투력은 역시나 보잘 것 없었다.
‘이번에는 고양이인가.’
지천에 널린 함정은 약한 전투력을 보완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묘족 전사들의 수준은 처음 대면했던 늑대족보다도 약했다.
렉사르와 휴고는 손속에 사정을 두며 묘족들을 상대했다.
사상자를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부상자가 속출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묘족들이 비명과 신음을 흘리며 나뒹굴었다. 야성을 머금은 렉사르의 동공이 이글거렸다.
크르르.
호흡에서 터져 나오는 흉성.
렉사르는 점점 전투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휴고가 렉사르의 팔을 붙잡았다.
촤악!
렉사르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휴고가 팔을 붙잡는 순간 몸을 돌리며 사슬낫을 휘둘렀다.
휴고는 렉사르의 대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상체를 젖혀 공격을 피해 냈다.
“정신 차리세요!”
휴고가 소리치자 광기에 물든 렉사르의 동공에서 초점이 되돌아왔다.
“……사과하지.”
렉사르가 주위를 둘러봤다.
주변은 난장판이 되었고, 묘족들은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전투는 끝났다. 쓰러진 묘족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렉사르와 휴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
렉사르가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수인들과의 협상이었다.
* * *
타미는 잭슨을 지켰다. 싸우기 싫어하는 것이 표정에서 드러났지만 타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타미는 노련한 전사이자 용병이었다. 용병 일을 해 오면서 이따위 난전은 수도 없이 경험해 봤다.
반면 수인들의 움직임은 어딘가 어설펐다. 타미는 그들의 빈틈과 약점을 꿰뚫으며 싸워 나갔다.
타미는 자신의 작은 체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고, 순식간에 상대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배후를 잡았다.
“이 녀석이!”
수인들이 혼란에 빠졌다. 타미는 야비하고 교활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기회가 보이는 순간.
후웅!
타미가 상대의 발목을 붙잡고 그대로 집어 던졌다. 체구에 걸맞지 않은 무지막지한 괴력이었다.
“…….”
상대방의 표정만 보더라도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타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싸우기 싫었다. 하지만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대화는 힘이 있어야 가능했다.
수인들의 폐쇄성과 외지인에 대한 적의는 상상을 초월한다.
타미가 마나를 끌어 올렸다. 푸른 마나가 손에 머물렀다.
붉은 곰 타미.
타미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힘과 민첩성, 그리고 노련한 전투의 방식.
타미는 다수를 상대할 때 어떻게 해야 상대가 혼란에 빠지는지 알고 있었다.
타미는 조급해하지 않고 침착하게 상대해 나갔다.
수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타미를 제압하려 들었지만 타미는 손쉽게 붙잡히지 않았다.
절반 이상의 숫자가 줄어들자 잭슨도 참전했다. 잭슨이 놀란 눈초리로 타미를 바라봤다. 타미의 호흡이 꽤나 거칠어졌다.
‘……제기랄.’
입맛이 썼다. 어른인 주제에 어린애에게 보호나 받고 있다니.
잭슨은 더 이상 이 작은 등 뒤에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잭슨이 칼을 휘둘렀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것은 잭슨도 마찬가지였다. 블란테에서 이 검을 얻은 뒤로 잭슨은 밤낮 할 것 없이 검을 휘두르며 수련했다.
우우웅.
잭슨의 검이 미약하게 떨리며 푸른 마나가 맴돌았다.
다른 이들과 같은 방대한 마나는 아니었지만 마나를 두르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잭슨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언제까지고 보호받는 삶을 살아갈 생각은 없었다.
꽈악!
잭슨이 칼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 * *
에단은 순식간에 호족들을 휘어잡았다. 패배에 순응한 호족들은 에단의 예상보다 순순히 말을 따랐다.
아직 호족들의 표정에는 적의와 분노가 가득했지만, 그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대적인 마을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대체로 뛰어난 체력을 가진 수인들이기에 별다른 준비와 채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이동하면서 한 번씩 확인해야겠군.’
가장 가까운 마을부터 점검하듯이 지나갈 생각이었다. 에단은 들고 있던 약도를 아란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쪽으로 가자.”
“…….”
약도를 받아 든 아란이 미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하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뭐.”
“……아니다.”
한숨을 내쉰 아란이 약도를 보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호족들은 체력뿐만이 아니라 회복력도 뛰어났다. 에단에게 얻어맞으면서 생긴 자잘한 타박상 정도는 금세 회복해 나갔다.
‘쓸 만하겠어.’
에단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었다. 전력은 아무리 많이 보충해도 부족했다.
‘전쟁이 있을 테니.’
에단은 전쟁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 포문을 여는 것이 신성 왕국일 뿐이었다.
‘한번 해보자고.’
에단의 눈이 유리알처럼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