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실체 (1)
타미가 무작정 내달렸다. 마을 인근에 있던 수인들이 타미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수인들의 얼굴에는 당혹과 경계가 공존해 있었다.
외지인에 대한 경계는 수인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타미의 외향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고, 친숙한 동족의 냄새까지 느껴진 탓이었다.
크르르.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폐쇄성은 그들이 송곳니를 드러내게 만들었다.
“……타미?”
수인 중 하나가 타미를 알아봤다.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수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는 사이야?”
“……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작정 다가서면…… 토리!”
토리는 친구의 말을 무시한 채 타미 앞으로 다가갔다.
수인들은 모두가 뛰어난 후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억할 때 머릿속에 각인된 냄새로 판별한다.
여러 냄새가 뒤섞여 있었지만 타미에게서는 분명히 수인의 냄새가 났고, 토리는 타미의 냄새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타미 맞아?”
“응.”
“……어떻게?”
토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떻게 혼자서만 살아 있어……?”
“……어?”
타미가 되물었다. 때가 묻지 않은 물음이었다. 그 모습을 본 토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네가 설령 내가 아는 타미가 맞다고 한들 너를 마을에 데리고 갈 수는 없어.”
“……응.”
토리의 날카로운 말에 타미는 상처를 받았으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타미의 얼굴에는 감정의 변화가 그대로 드러났다.
“…….”
타미를 지그시 지켜보던 토리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획 하고 몸을 돌려 마을 쪽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토리 곁에 있던 안절부절못하던 수인도 토리를 뒤쫓아 갔다.
잭슨은 그 상황을 멀리서 몸을 숨긴 채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흐릿하게 윤곽만 보일 뿐 대화는 일절 들리지 않았다.
잭슨은 답답한 마음이 일었지만 일단 여기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거리는 멀었지만 혹시나 모른다는 생각에 잭슨은 숨을 죽인 채 인기척을 지웠다.
하지만 잠시 후 잭슨의 등줄기에 소름이 질주했다. 잭슨은 본능적으로 판단했다.
‘발각됐다.’
형체만 간신히 보이는 거리였지만 수인들의 시선이 똑똑히 느껴졌다.
‘어떡하지?’
가장 이성적인 판단은 이 자리에서 몸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 지형에서 저들을 상대로?’
잭슨은 수인들의 기동성을 질리도록 지켜봤었다. 사방이 눈에 뒤덮인 이곳은 수인들의 터전이자 영역이었다.
잭슨이 전력을 다해 움직여 봤자 수인들의 추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제기랄.’
방도가 없었다. 잭슨이 허리춤에 채워진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저항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없었다. 한 명씩 상대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다수를 상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봐야 했다.
잭슨의 무력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에단과 렉사르, 휴고와 같이 일반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수준은 아니었다.
잭슨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리고 있을 때.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잭슨의 눈이 부릅떠졌다. 쏘아진 화살이 육안으로 보였다.
홱!
잭슨이 다급하게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뒤에 있던 나무에 화살이 틀어박혔다.
찰나의 순간에 목숨을 잃을 뻔한 잭슨이 굳은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더는 이곳에 있는 게 의미가 없었다.
잭슨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되는 일이 없네.”
착잡한 한숨을 푹 내쉰 잭슨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정보원으로 일하면서 목숨을 잃을 각오는 늘 하고 있었다. 설령 여기서 죽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다.
잭슨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오히려 마음을 내려놓으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미의 동공이 떨렸다. 타미의 머릿속에 에단의 당부가 떠올랐다.
― 네가 지켜 줘.
타미는 그 말에 답했다. 약한 인간을 지켜 주겠다고.
‘내가 지켜야 해.’
타미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손톱이 길어지고 매서운 야성이 흘러넘쳤다.
파바밧!
타미가 눈길을 질주했다. 순식간에 앞서 나간 수인들을 제치고 잭슨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
타미가 말했고, 수인들이 눈매를 좁혔다.
“……타미, 네가 데려왔어?”
토리가 한 발짝 다가와 물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타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얘는 내 친구야.”
타미의 대답을 들은 토리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역시 너는…….”
수인들의 살기가 타미에게로 향했다. 타미는 슬픈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긴장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약해.’
수인들의 수준이 가늠되었다. 용병으로서 싸움터를 전전했고, 에단과 지내면서 수없는 실전을 겪었다.
타미는 아직 어렸지만 노련하고도 완숙한 한 명의 전사였다.
크르르.
타미가 진득한 야성을 흘리기 시작했다.
* * *
에단은 폭력으로 마을을 정리했다.
호족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에단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평화적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단이 택한 방법은 난폭한 방법이었다.
에단은 호족들에게 서열을 각인시켰다. 처음 조우했던 호르잔의 마을과 달리 호족들의 마을에서는 모두가 전사였다.
에단은 피어와 마나를 끌어올려 마을의 모든 수인들을 압도적으로 찍어 눌렀다.
전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힘의 격차였다.
호족들은 공포와 증오가 공존하는 눈으로 에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에단에게는 익숙한 시선이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에단은 곧장 마을의 장로와 대면해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굳은 표정으로 계획을 들은 장로는 격분을 감추지 않았다.
“고작 그딴 되도 않는 계획 때문에 우리 마을을 습격해?!”
장로가 폭발했지만 에단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피어를 일으켰다.
압도적인 기세.
감히 범접하거나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존재감.
그것이 바로 에단이 지닌 피어의 힘이었다.
덜덜덜덜.
장로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에단은 지그시 장로를 응시하다 삭막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그냥 전부 죽였어야 하나?”
“……뭐?”
“협력할 생각이 없으면. 괜히 위험부담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애당초 먼저 습격한 건 너희들 아니었나?”
“그건 너희들이 우리 영역을 침범해서!”
“웃기는군.”
에단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고는 같잖다는 듯한 표정으로 호족의 장로를 바라봤다.
“나 하나도 상대하지 못한 버러지 새끼들에게 영역이 어디 있지? 너희들은 지렁이들의 영역까지도 고려 대상에 넣냐?”
“…….”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에 장로는 잠시 황망한 표정을 짓다가 실성한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애당초 너희에게 선택지는 없어. 대충 수준 한번 보니까.”
에단이 굳은 얼굴을 한 채 뒤편에 서 있는 아란을 끌고 왔다.
“이 녀석 수준도 안 되는 것 같은데. 호랑이 수준이 고작 이 정도였나? 전력은커녕 방해만 되겠군.”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빠득.
이를 갈며 말하는 장로를 본 에단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주 재밌는 광경을 봤다는 듯이 눈가를 닦는 시늉까지 했다.
“책임은 지랄. 책임을 묻는 것도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나 하나도 못 당해서 다 정리된 놈들이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해?”
에단이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회색의 기운이 손 위에서 넘실거렸다. 에단의 몸속에 내포되어 있던 방대한 마나가 일제히 방출되었다.
퍼엉!
고막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천장을 비롯한 구조물이 모두 증발했다. 장로는 멍한 표정으로 휑한 주위를 바라봤다.
“다시 한번 말하지. 꼬우면 덤벼.”
에단의 눈이 유리알처럼 번들거렸다. 장로는 차마 광기로 번들거리는 에단과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
한편 아란은 그 모습을 착잡한 표정을 한 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마을은 정말 양호한 편이었다. 지금 에단의 모습은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로 폭력적이고 야만적이었다.
에단은 호족들을 힘으로 찍어 눌렀다.
‘대체 어째서?’
호족들의 수준은 늑대족인 자신들보다 확연히 뛰어났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그런 호족들도 아무렇지 않게 상대했다.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고, 모두 순식간에 제압했다.
에단은 그 와중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란은 에단의 이해 못 할 행보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고, 에단은 씨익 웃으며 아란을 앞으로 내세웠다.
“아무 전사 한 명 데려와 봐. 내 말이 사실인지 증명해 줄 테니까.”
“…….”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아란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에단을 바라봤다.
그런 아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한테는 그렇게 개기더니. 왜? 이제 와서 쫄려?”
“…….”
반박할 수 없는 에단의 말에 아란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부릴 자존심이 있다면 지금 부려. 여기서 지면 얼굴도 못 들고 다닐 테니까.”
자존심을 긁어 대는 에단의 말에 아란이 이를 악물었다.
청각이 뛰어난 장로는 에단의 대화를 들었는지 입술을 비틀었다.
“그 늑대족 전사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궁금하군.”
“그래. 한번 확인해 보라고.”
* * *
갑작스럽게 벌어진 대련. 에단은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고, 상처 입은 호족들은 그런 에단과 알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에단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삐딱한 자세로 귀를 후볐고, 그 태도가 호족들의 감정을 더 상하게 만들었는지 주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알리는 에단이 더 이상 호족들을 도발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아무래도 무리인 모양이었다.
한숨을 깊게 내쉰 아란이 정면의 상대를 바라봤다.
아란의 앞에 선 수인의 체구는 거대했다. 풍기는 기세와 살기만 봐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복수인가?’
에단이 자신을 골탕 먹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자신이 부린 만용과 객기.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요량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어.’
아란이 이를 갈았다.
아란이 야성을 일으켰다. 송곳니가 날카로워지며 전신의 털이 수북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골격이 거대해지며 양손에도 치명적이고 예리한 무기를 갖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호족이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설마 늑대족 따위가 우리한테 송곳니를 드러내다니.”
“가오를 잡을 거면 처맞기 전에 잡든가.”
“…….”
뒤편에서 에단이 조롱하듯 이죽거리자, 도발하던 호족이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