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화] 세력 규합 (2)
포위망이 좁혀 오고 있었다. 녀석들의 존재를 뒤늦게 인지한 아란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굽고 있던 고기를 놓치자 에단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던 고기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어이쿠, 아까운 고기를 놓쳐서야 쓰나.”
에단이 히죽 웃으며 붙잡은 고기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에단의 입가가 육즙과 핏물로 번들거렸다.
정체 모를 고기였지만 맛은 꽤나 그럴듯했다. 에단은 입안에 가득 베어 문 고기를 꿀꺽 삼킨 후 말했다.
“잘 굽네?”
그 말을 내뱉은 직후 에단이 뛰쳐나갔다. 좁혀 오던 포위망이 에단에게 집중되었다.
‘예상보다는 괜찮은 수준이네.’
처음 조우했던 마을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수인들은 예상보다 체계적이었으면서 어느 정도의 경험도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에단은 이미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까지 올라가 있었다.
콰가가가가―!
에단이 송곳니를 드러냄과 동시에 기세를 표출했다. 형태를 갖춘 피어와 마나가 포위망을 가볍게 찢어발겼다.
“잡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상컨대 고함을 내지른 이가 통솔자로 보였다.
녀석을 제압하면 상황을 정리하기 수월하겠지만 에단은 생각을 달리했다.
‘어디 실력 한번 봐 볼까?’
에단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파바박!
수인들이 달려온다.
에단은 의도적으로 기세를 조절했다.
너무 강렬한 피어를 쏟아 낸다면 제대로 된 실력을 파악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목, 가슴, 다리.
녀석들이 노리는 부위였다. 에단이 아니었다면 꽤나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이렇게 해 볼까.’
힘으로 찍어 누를 생각은 없었다.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장단을 맞춰 줄 필요성이 있었다.
휘익.
에단이 지면을 박차고 가볍게 도약했다. 공격해 오던 놈들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에단은 유려하면서도 가벼운 움직임을 보이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화살을 에단은 보지도 않은 채 붙잡았다.
“좀 더 분발해 보시지?”
에단이 사납게 웃었다.
지면에 착지한 순간 녀석들이 다시금 달려들었다. 에단은 선두에 있던 수인을 발로 걷어찼다.
뻐억!
에단의 발에 얻어맞은 수인의 눈이 터질 것처럼 부릅떠졌다. 그 순간 수인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호오.’
섬뜩하게 빛나는 샛노란 안광. 그리고 화려한 줄무늬.
‘호랑이인가?’
에단의 머릿속에 연상되는 것은 하나였다. 에단은 재밌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제대로 한번 해볼까?”
에단이 사납게 웃으며 녀석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쾅! 콰광!
수인들이 저항을 시작했다. 이 녀석들은 야수화를 컨트롤할 수 있었는지 모두 호랑이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변화했다고 한들 에단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에단은 수인들의 수준을 확인하고부터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쾅! 콰직! 우드득!
검을 뽑아 들지는 않았다. 전부 죽일 생각은 없었으니.
하지만 에단의 육체는 무기나 매한가지였다. 주먹과 발에 얻어맞는 순간 치명상이었다.
호족들이 추풍낙엽과도 같이 나가떨어졌다.
맹렬한 기세와 날카로움으로 무장한 호족들이었지만, 에단의 노련함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쾅!
미들 킥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호족이 사정없이 나뒹굴었다.
그때 에단의 배후를 노리며 호족이 달려들었다.
휘릭!
에단의 몸이 회전했다. 그리고 달려든 호족의 관자놀이에 그대로 백스핀 엘보우가 적중했다.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호족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호족의 숫자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었다. 더 이상 수적 우위는 의미가 없었다.
호족들을 지휘하던 전사장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에단을 상대로 어떠한 판단을 내려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치 괴물과 상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벌써 대부분의 전사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에단은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호족들의 전사장은 섬뜩함을 느꼈다. 순간 에단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에단의 눈은 귀화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파밧!
에단은 호족의 전사장인 라가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황한 라가르가 다급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팍! 파바바바바박!
찰나의 순간 동안 수십 번이 넘는 공방이 오갔다. 예상외의 대처를 보여 준 라가르에게 에단은 상당히 감탄했다.
움직임에서 규칙이나 법칙 따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정형화가 되어 있지 않은 움직임.
‘본능이란 건가.’
확실히 수인들의 재능은 에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씨익 웃은 에단이 속도를 더욱 끌어올렸다.
파바박!
에단의 공격 옵션이 다양해졌다. 공격에 과도한 힘을 싣지는 않았다. 에단은 아직 라가르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실체화 허상을 오가는 공격.
셋업과 페이크.
라가르의 머리가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라가르가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노란 동공이 쉬지 않고 움직였지만 결국 한계가 찾아온다.
동체 시력과 반응속도에 의존한다면 단기간은 어찌하여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지속적으로 견뎌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단은 다양한 공격 옵션들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다. 라가르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뻑! 뻐억!
라가르가 조금씩 타격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송곳처럼 날카롭게 꽂히는 공격에 헛숨을 들이마셨다.
빠악!
순간적으로 들어간 리버 샷.
라가르의 눈이 부릅떠졌다. 들숨이 틀어막혔다. 라가르는 생존을 위해 에단을 감싸 안으려 들었지만, 그건 실책이었다.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린 에단이 그대로 라가르를 메다꽂았다.
하얀 눈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에단은 눈을 까뒤집은 라가르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아직까지 서 있는 호족의 숫자는 총 둘이었다. 에단은 겁에 질린 녀석들을 향해 말했다.
“어떻게, 계속할래?”
호족들은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 * *
렉사르와 휴고는 약도에 그려진 목적지에 근접했다. 기척을 죽이고 잠입하는 것은 렉사르의 주특기나 다름없었다.
렉사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휴고도 자연스럽게 렉사르의 기술들을 흡수했다.
기척을 죽인다. 날카로운 야성을 누그러트리고 누린내를 지운다.
배경에 녹아드는 감각.
렉사르는 그렇게 말했다.
― 내가 하는 모든 기술은 너도 쓸 수 있다. 단지 기술로 승화시킬 수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다.
휴고는 렉사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호흡이 느려지며 동공이 좁혀진다.
무릇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은 존재감을 지울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
렉사르와 휴고는 수인들의 흔적을 쫓아 점점 마을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발걸음 소리조차 조심하며 다가갔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어느덧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규모는 엇비슷하고, 외향을 보면…….’
인간의 모습을 띠고 있는 지금은 구별 짓기 어려워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렉사르는 판단을 끝냈다.
마을의 분위기는 엇비슷했다. 그렇다면 이 마을도 마찬가지로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강할 것이다.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온건한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렉사르는 그러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
렉사르가 휴고를 향해 손짓해 수신호를 전달했다. 렉사르의 의도를 읽은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렉사르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쿠웅!
눈이 휘날렸다. 수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모든 수인들이 렉사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르.
렉사르가 으르렁거렸다. 복잡한 계산보다는 이게 더 성미에 맞았다. 짐승에게는 짐승만의 방식이 있는 법이었다.
* * *
타미가 잭슨을 번쩍 들고 움직이자 이동 속도가 엄청나게 빨리 증가했다.
타미는 장성한 성인 남성인 잭슨을 짊어지고도 사뿐하기 그지없게 움직였다.
폴짝폴짝 뛰며 눈길을 이동하는 타미에게 올라탄 잭슨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정보원으로 활동하면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은 잭슨이었지만 지금 느끼는 승차감은 적응할 수가 없는 종류였다.
부력감을 느끼면 바로 수직하강, 그리고 다시금 도약.
머리와 내장이 진탕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쪽. 맞아?”
그 와중에 타미가 길을 물어보자 잭슨은 입을 틀어막으며 약도를 펼쳤다.
눈과 머리가 팽팽 돌아서 뭐가 뭔지를 모르겠지만, 이를 악물며 방향을 가리켰다.
“이, 이쪽?”
“알겠어.”
폴짝.
“우욱!”
잭슨이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그래도 딸뻘 되는 타미에게 토사물을 쏟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흐르고 대충 목적지 근처에 다다르자, 타미는 잭슨을 바닥에 내려놨다.
잭슨은 지면을 밟는 순간 그대로 엎어졌다. 안색이 노란 게 영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엎드린 채 끙끙거리고 있는 잭슨을 보던 타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아? 어디 아파?”
순진무구한 질문.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던 잭슨이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괘, 괜찮아…….”
심호흡을 한 잭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당히 비틀거리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일어났으니 괜찮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자 팽팽 돌던 시야가 조금 돌아왔다.
‘일단 흔적부터.’
변덕이 심한 북부의 날씨가 안정화되었다. 이곳이 목적지 인근이 맞다면, 잭슨이 해야 할 일은 마을의 흔적을 찾는 일이었다.
다행히 정보원으로 활동하면서 얻은 관록이 사라지지는 않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수인들의 마을에 지내면서 얻은 경험 덕이었다.
잭슨이 기척을 죽이며 천천히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언제 불의의 습격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잭슨의 손은 칼자루 위에 얹어져 있었다.
스읍. 후우.
잭슨의 숨소리가 예민해졌다.
지금만큼은 추위도 잊어버렸다. 잭슨이 조심스레 이동하자 타미도 잭슨을 따라 하듯 쫄랑거리며 뒤쫓았다.
잭슨은 애매한 표정으로 뒤따라오는 타미를 바라봤다. 기분이 오묘했다.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였지만 타미의 무력은 잭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잭슨은 타미가 붉은곰으로서 어떻게 명성을 쌓았는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는 앙증맞은 외모가 엄청난 괴리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잭슨이 타미를 응시하고 있자 타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당한 타격을 입은 잭슨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잭슨이 다시 몸을 돌려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타미가 잭슨의 등 위에 올라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타미의 돌발 행동에 목소리를 낼 뻔한 잭슨이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고개를 빼꼼 내민 타미의 눈이 점점 커져 갔다.
그러고는 잭슨의 위에서 내려 마을을 향해 후다닥 달려 나갔다.
“타, 타미야?”
잭슨이 황망한 표정으로 타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