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화] 세력 규합 (1)
아란은 부상에서 회복하기도 전에 에단과 함께 이동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아란의 성향과는 맞지 않았다.
아란은 에단과의 동행을 승낙했다.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에단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파밧!
아란은 확실히 수인다운 민첩함을 보여 주며 빠르게 움직였다.
다만 움직임이 묘하게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직 통증은 꽤나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확실히 지리는 알아서 편하군.’
호르잔이 그려 준 약도는 말 그대로 딱 약도 수준이었다. 약도만을 의지해서 길을 찾아 나가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란은 간략한 약도만 보고도 큰 어려움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정확히 맞는 길로 향하는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에단은 묵묵히 아란의 뒤를 쫓았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도 계속 이동했다. 아란이 지친 기색을 보이면 에단이 아란을 들쳐 메고 움직였다.
처음에는 격렬하게 거부하던 아란도 에단의 사나운 눈빛을 보자 거절하지 못했다.
에단에게 짊어진 채 움직이는 아란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가득했다.
“이쪽 맞아?”
“……그래.”
에단의 어깨 위에 짐짝처럼 올려져 있는 아란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치심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피식 웃은 에단이 질주했다.
에단의 각력은 이미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이런 눈길 따위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못했다.
끼니는 전부 보존식으로 때웠다. 워낙에 추운 북부의 날씨 탓에 냉동식이나 다름없었다.
에단이라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불평 없이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었다.
‘며칠 굶어도 지장은 없겠지만.’
이미 에단의 육체는 인간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바뀌어 있었다.
몸 안에 내포하고 있는 막대한 마나로 인해 며칠 굶는 것쯤은 티도 안 날 것이다.
하지만 에단은 때가 되면 간단한 보존식이라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머릿속에 각인된 습관이었다.
우물우물.
에단이 빵빵하게 밀어 넣은 육포를 우물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수치스러운 자세로 체력을 회복한 아란은 기괴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정녕 인간이 맞는가?’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신체 능력이었다.
무릇 인간, 아니, 생명체라고 한다면 지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지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아란은 살면서 이러한 자를 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호승심이나 전의를 넘어 괴물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어느 정도 남았지?”
“……대략 이 방향으로 반나절만 더 가면 될 거다. 지금부터는 나도 정확한 길을 몰라.”
“그렇단 말이지.”
에당니 히죽 웃었다. 에단의 웃음을 보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덥석.
아니나 다를까 에단이 아란을 들쳐 멨다. 그러고는 미친 듯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끄윽!”
무지막지한 속도로 이동하면서 동반되는 엄청난 압력에 아란이 신음을 흘렸다.
에단은 아란의 상태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달려 나갔다.
* * *
“……?”
아란이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날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빛이라고는 밤하늘에서 내리쬐는 달빛이 전부였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언제 기절한 것인지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느껴지는 온기에 고개를 돌려 보니 에단이 아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타닥, 타다닥.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에단은 모닥불 앞에 앉아 적당히 고기를 익히고 있었다.
“쯧.”
에단이 숯 더미가 된 고기를 보며 혀를 찼다. 생각해 보면 에단은 요리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는 것 같았다.
단순한 고기 굽기마저도 태워 먹기 일쑤였다.
“허.”
아란은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할 테니 비켜라.”
“오, 자신 있냐?”
“그거보다 못 굽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은데.”
아란이 숯 더미가 된 고기를 바라보며 말하자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글지글.
아란이 꽤나 능숙하게 고기를 익히는 걸 본 에단은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오.”
“……이딴 걸로 그런 반응을 듣고 싶지는 않다. 그것보다 대체 무슨 고기지?”
“나도 몰라.”
“모른다고?”
아란이 기막힌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다가오는 짐승이 있길래 잡았어. 어차피 너희들은 어지간하면 탈 안 나잖아.”
“……너는 인간 아닌가?”
“나도 탈 안 나니까 걱정 마.”
에단이 씨익 웃으면서 답했다.
아란은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익어 가는 고기를 바라봤다.
고기는 생각보다 그럴듯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지?”
“네가 말한 곳. 그쪽 근방이야.”
“……잠깐. 그 근처에서 지금 이 난리를 피우고 있단 말인가?”
“뭐 어때.”
“지금 장난하는 건가.”
“오히려 이목이 끌리면 환영이지.”
에단의 광기 어린 표정을 본 아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반대로 몸을 숨기면 어쩔 작정이지?”
“글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벌써 왔잖아.”
아란의 동공이 서서히 커졌다.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다수의 기척이.
그물처럼 넓게 펼쳐진 포위망이 서서히 좁혀지고 있었다.
에단이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몸을 풀었다.
“생각보다 환대가 격렬한데?”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검은도끼 사미라는 용병들 사이에서 급격히 회자되는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사미라가 무지막지한 행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식 들었어?”
“어떤 소식.”
“이번 서부 쪽에서 벌어지던 영지전. 벌써 결판이 났다더라.”
“갑자기? 세력이 비슷해서 지지부진하지 않았나.”
“그랬었지. 그런데 한쪽에서 용병을 고용했다고 하더라고.”
“병력이 부족하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뭐, 영주들이 영지전에서 용병을 고용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애당초 고용된 용병들도 꽤 있었잖아.”
“어.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라. 용병들이 고용된 그날 영지전이 종료됐거든. 용병들이 영지전을 끝낸 거지.”
“……농담이지?”
“내가 언제 농담을 이렇게 진지하게 하는 거 봤냐?”
“아니, 그게 말이 된다고?”
“듣기로는 이번에 검은도끼가 새로 용병단을 꾸린 모양이야.”
“검은도끼? 언제 적 검은도끼야? 그 녀석 은퇴한 걸로 알고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은퇴한 용병들이 복귀하는 일들도 비일비재하잖아.”
“그렇기는 하다만…… 이름은 뭔데?”
“검은칼날.”
“……검은칼날?”
“그래. 아마 이제부터 용병계에 큰 태풍이 불 거야. 아니, 용병계 뿐만이 아니지. 대륙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니까.”
“……1황자, 아니 황태자 때문인가?”
“어. 앞으로 상황이 어찌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군.”
남자는 복잡한 심경을 해소하려는 듯 잔에 담긴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 * *
“수고했다.”
의뢰를 완료했다. 사미라는 일부로 굵직한 임무들만 수행했다.
검은도끼라는 이름이 지니고 있는 신뢰 탓에 굵직한 사건을 맡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사미라는 가장 먼저 인원을 꾸렸다.
블란테가 지원해 준 양질의 기사 다섯, 그리고 기존의 주먹 용병단과 쓸 만한 용병들을 추려 ‘검은칼날’이라는 용병단을 창단했다.
어찌 보면 갓 창단된 신생 용병단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사미라는 둥지의 보증을 통해 ‘은’ 등급으로 올라섰다.
총인원은 사십.
용병단 치고는 상당히 큰 규모라고 할 수 있었다.
‘설마 블란테의 막내까지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검은칼날이 창단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주먹 용병단 전원과 카론도 합류했다. 사미라로서는 상당히 대하기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가뜩이나 블란테의 기사들도 어찌 대해야 할지 난감했는데, 거기에 블란테의 막내까지 더해지다니.
하지만 카론은 들어오고 나서도 일절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고집이나 자존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정말 일개 평민이자 단원과 같은 모습을 보여 줬다.
기사들도 매한가지였다.
블란테의 기사로서 엄청난 자긍심을 지니고 있을 것이 분명했는데도 기사들은 순순히 사미라의 명령을 이행했다.
사미라로서는 더없이 편한 상황이었다. 자금도 부족하지 않았고, 무기도 완벽했다.
블란테의 야장들과 드워프들이 준비한 무구류는 감히 용병 따위는 구할 엄두조차 못 낼 수준의 질을 지니고 있었다.
사미라는 평생 동안 용병계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완벽에 가까운 용병단은 처음 겪었다.
처음에는 어떤 의뢰를 택해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다.
아무리 검은도끼라는 명성과 은급 용병단이라는 세력이 있었지만, 고작해야 갓 창단된 용병단이었다.
당연히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왔고, 검증되지 않는 용병단에게 선뜻 의뢰를 맡길 의뢰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예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군.’
메이와 한니발이 나섰다. 그 누구도 거상 한니발의 입김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로 인해 단원들은 굵직한 의뢰들을 단기간에 해치우며 명성을 쌓아올렸다.
처음에는 단원들을 대하기 조심스러웠던 사미라도 이제는 단원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명령을 내렸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라장에서 살아온 사미라의 관록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고, 전장에서 사미라가 내리는 판단은 늘 현명했다.
처음에는 사미라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기사들도 나중에는 사미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경험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조로웠다.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의뢰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입단 문의도 계속해서 들어왔다.
‘무작정 몸집을 불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사실 따지고 보면 사십이라는 숫자도 과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미라가 주로 맡을 의뢰가 영지전과 같이 굵직한 것들이라 그렇지, 지금도 일개 용병단이 소화하기는 쉽지 않은 숫자였다.
사미라의 몸은 하나였다.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주먹 용병단원과 기사들이 인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용병들만 있었다면 통솔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시스템을 바꿔야 해.’
용병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분방한 성향을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야만적이고 난폭했다.
강한 무력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렸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게 바로 용병들이었다.
용병들에게 명예를 기대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없었다.
난폭하고 다루기 힘든 용병들에게 목줄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목 앞에 드리워진 칼뿐이었다.
그런 용병들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전제를 바꿔야 한다. 기존 용병들을 끌어들이되 감히 배신할 수 없게끔 할 수 있는 장치는.
‘길드.’
사미라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이었다.
‘길드를 삼켜야겠어.’
조금 거대한 먹이이기는 했지만 먹지 못할 건 없어 보였다.
사미라의 혀가 입술을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