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실체 (3)
부르르.
아란의 흐릿한 동공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은 완전히 풀렸지만 전의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아란이 천천히 에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쓰럽게 바들거리는 손이 흐느적거리며 에단의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에단의 얼굴에 닿기 직전. 아란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내가 이긴 거다?”
에단이 기절한 아란을 보며 씨익 웃었다.
* * *
반나절이 흐르자 아란이 눈을 떴다. 대련이라고 치부하기에도 민망한 일방적인 폭행의 현장이었다.
눈을 뜬 아란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혹사당한 몸뚱이가 비명을 내질렀다.
“끄윽.”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린 아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한심하군.’
살갗조차 스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실력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조차 가늠이 되지가 않았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노력했음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압도적인 격차를 느끼고 말았다.
‘과연 넘을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다. 에단을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이 연상됐다.
바스락.
아란은 곁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알리가 아란의 곁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물끄러미 알리를 바라보던 아란이 알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아란은 몸을 일으켜 알리를 침구 위에 살포시 얹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뇌리에 치밀었지만, 아란은 이를 악물고 통증을 견뎌 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와 에단이 머물고 있는 건물 쪽으로 향했다.
성한 곳이 없는 몸은 제멋대로 비척거렸지만, 아란은 불만을 토해 내지 않고 꿋꿋이 움직였다.
그렇게 걷다 보니 문밖에서 아란을 기다리고 있는 에단을 볼 수 있었다.
“몸은 좀 괜찮냐?”
에단이 씨익 웃으며 묻자, 아란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죽을 것 같군.”
아란이 대답했다.
* * *
휴고와 렉사르는 약도에 적힌 장소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며칠간 마을 인근에서 생활하면서 대략적인 기후나 환경, 지리는 익힌 상태였다.
둘은 눈길에서도 평지를 지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속도로 움직였다. 지형을 이용하며 빠르게 주파했다.
지나가면서 보이는 몬스터들의 대부분은 피하면서 움직였고, 그럼에도 쫓아오거나 하는 몬스터는 토벌했다.
식량은 대부분 사냥으로 해결했다.
보존식을 챙겨 오기는 하였으나 보존식보다는 멧돼지나 사슴, 토끼 따위를 잡아서 끼니를 해결하는 게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었다.
밤눈이 밝은 렉사르와 휴고는 날이 어두워지는 것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땅거미가 침습할 때쯤에는 이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불을 피워 잡은 사냥감을 조리했다.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올랐다.
휴고는 눈치를 살피듯 렉사르를 힐긋거리며 바라봤다. 렉사르는 말없이 모닥불을 지켜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거슬리게 그만하고.”
“아, 그런 건 아니고요…….”
렉사르가 날카롭게 째려보자 휴고가 찌그러졌다. 휴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렉사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단순해서 좋겠군.”
“아…… 혹시 칭찬인가요?”
“…….”
렉사르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 휴고를 응시했고, 휴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너도 들었을 텐데.”
“네?”
대뜸 레사르가 입을 열자 휴고가 고개를 돌렸다. 렉사르는 모닥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야.”
“……아.”
휴고는 이제야 렉사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저희가 같은 곳에서 왔다는 소리 말인가요? 그것참 신기하더라고요.”
“……그게 끝이냐?”
렉사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생의 비밀을 들었음에도 너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기 때문이다.
“달라질 게 있나요? 저한테 수인이 좀 섞여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조금 충격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는 저니까요.”
“…….”
렉사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멍하니 휴고를 바라보던 렉사르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강하군.”
“사실 수인이다 뭐다 하지만 주변에 특이한 사람들이 한둘인가요? 엘프도 있고, 드워프도 있고…… 사실 제일 괴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련님이에요.”
“그건 나도 동감하는 바군.”
렉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렉사르가 생각하기에도 에단의 강함과 성장세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우리보다 괴물 같은 건…….’
씨익 미소 짓는 에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고민하던 것들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신기하군.’
렉사르가 미묘한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단순하기만 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닌 모양이다.
‘더 놀라운 것은.’
휴고의 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었다. 렉사르는 자신의 기억을 되짚었다.
렉사르의 기억은 모두 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모든 기억들은 선명하지 않고 흐릿했다.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가기 시작하자 뇌를 찌르는 듯한 두통이 치밀었다.
“크윽!”
렉사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리자 휴고가 놀란 표정으로 렉사르를 바라봤다.
“괘, 괜찮으신가요……?”
“……괜찮으니까 신경 꺼.”
통증이 가라앉자 렉사르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휘잉.
꽤나 강한 바람이 일었다. 모닥불이 춤을 추며 불똥이 이리저리 튀었다. 북부의 바람은 싸늘했다.
“너는 어디서부터 기억이 나는 거지?”
“기억이요? 음…….”
휴고가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억이 흐릿한 것은 휴고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는…… 태생부터 하인 출신인 줄 알았어요. 이런저런 잡일을 도맡아서 했지만 생각보다 손재주가 없어서 타박을 많이 받았죠. 하하…….”
휴고가 멋쩍은 얼굴을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제 몸에 흉터가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도 좀 보기 흉해서…….”
휴고가 자신의 얼굴에 있는 흉터 부위를 매만졌다.
“……내 인상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건가?”
렉사르가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매끈한 민머리와 얼굴과 전신에 가득한 흉터들이 보였다. 정말 인상이 사납다 정도로 표현할 수 없는 섬뜩함이 느껴졌다.
휴고는 렉사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여러 감정이 뒤섞인 탄식을 흘렸다.
“아…….”
“재수 없으니까 고개 돌려라.”
“넵.”
휴고가 잠자고 고개를 돌렸다.
둘 사이에 다시금 적막이 내리깔렸다. 숨 막히는 듯한 어색함을 느낀 휴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요즘 들어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
렉사르가 삭막한 시선으로 휴고를 응시했다. 휴고는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동안은 조금 외로웠거든요. 아무도 제게 다가와 주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마구간으로 가서 일을 할 때도 말이 저를 피하더라고요.”
“…….”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요. 아, 나는 모두가 기피하는 녀석이구나…… 하고 말이죠. 근데 도련님을 만난 뒤로 달라졌어요.”
“뭐가 달라졌지?”
휴고가 렉사르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모든 게 바뀌었죠. 저는 일개 하인에서 블란테의 기사가 되었고, 전우이자 친구도 생겼어요. 섬기는 주군이 생겼고, 주군의 임무를 이행하고 있고요.”
휴고가 외투를 살짝 벌려 가슴팍에 새겨진 흑사자의 문양을 바라봤다.
“……저는 이제 마구간지기였던 머저리 휴고가 아닌, 블란테의 기사이자 에단 님을 섬기고 있는 휴고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휴고의 금빛 동공은 흔들리지 않았다. 결의에 차 있는 눈. 렉사르는 휴고를 말없이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먹어라.”
렉사르가 적절하게 익힌 고깃덩어리를 휴고에게 던졌다. 휴고는 화색하며 고기를 받아들었다.
* * *
잭슨과 타미는 눈보라를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추위를 대비해 두꺼운 털옷을 여러 겹 걸쳐 입었지만 힘든 것은 매한가지였다.
‘아…….’
마음속에서 메이를 향한 원망이 무럭무럭 치솟아 올랐다. 북부의 기후는 적응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노출되어 있는 살갗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은 체력을 순식간에 갉아먹었다.
“허억, 허억.”
잭슨이 힘겨운 숨을 토해 내는 반면, 잭슨의 반도 안 되는 체격의 타미는 폴짝거리며 가볍게 눈길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
순식간에 멀어지는 타미의 모습에 뭔가 억울해진 잭슨은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타미는 잭슨이 따라오지 않자 뒤를 돌아봤다.
‘왜 안 따라오지?’
타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에단이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챙겨야 해.’
저 인간은 나약했다.
파리한 안색만 보더라도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타미는 다시 폴짝거리며 눈밭을 건너 잭슨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잭슨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잭슨을 번쩍 들어 올렸다.
“허, 허억!”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잭슨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타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길. 제대로 확인해.”
“뭐, 뭐라고?”
타미가 폴짝거리며 눈보라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잭슨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꽤나 오랜 시간을 이동하고 날이 저물자 타미는 잭슨을 내려놓았다.
비록 눈 위였지만, 육지를 밟은 잭슨은 폭삭 늙은 얼굴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래?”
타미가 갸우뚱거리며 물었지만 잭슨은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피로에 찌든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불부터 피우자.”
타닥, 타닥.
불이 타올랐다. 물끄러미 불을 바라보던 타미가 어디론가 훌쩍 사라지더니 집채만 한 멧돼지 하나를 잡아 왔다.
“배고파. 나.”
“…….”
잭슨은 복잡한 눈으로 타미가 잡아온 멧돼지를 바라봤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해체와 손질은 내 몫이구나.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잭슨이 허리춤에 메어 둔 검을 꺼내 들었다.
블란테에 방문했을 때 선물로 얻게 된, 잭슨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검이었다.
달빛을 머금은 검이 한기를 내뿜었다.
‘……이런 용도로 써서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품 안에 챙겨 둔 주먹만 한 단검으로는 이 괴물 같은 멧돼지를 해체할 자신이 없었다.
잭슨이 정신을 집중하자 검 표면에 미약한 오러가 맺혔다. 어디 가서 실력을 뽐낼 수준은 아니었지만 잭슨은 오러를 다룰 수 있었다.
“우라질.”
잭슨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멧돼지의 뱃가죽을 열자 내장이 쏟아져 나와 수북이 쌓였다.
혼자서 하기에는 영 힘겨운 작업이었기에 타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이었다.
하지만 타미는 천진하면서도 해맑은 아이의 미소를 지은 채 잭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본 잭슨은 차마 타미에게 도축 작업을 도와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 팔자야.’
잭슨이 한숨을 내쉬며 작업을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