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화] 실체 (2)
수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에단은 빠르게 판단했다. 더는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흐음…….’
에단은 호르잔이 그려 준 약도를 확인했다. 약도에는 현재 위치한 마을을 제외하고 세 곳이 체크되어 있었다.
― 교류가 없어진 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확언은 드릴 수 없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소입니다.
호르잔의 첨언이었다. 에단은 호르잔의 말을 떠올리며 계획을 세워 나갔다.
‘습격한다는 이미지를 심어 줄 필요는 없지.’
효율을 생각한다면 단체로 움직이는 것도 별로 좋은 방식은 아니었다.
‘수인들의 수준을 보면 인원을 나눠도 충분하겠어.’
호르잔이 기억하고 있는 마을의 숫자도 정확히 세 군데였다.
수인들이 지닌 전체적인 무력 수준이 대동소이하다면, 인원을 쪼개더라도 위험할 확률은 적었다.
훈련을 주도하고 있는 렉사르를 제외한 휴고와 타미 잭슨을 불렀다.
“부, 부르셨습니까?”
“어. 할 말이 있어서.”
일행들 중 유일하게 추위에 면역이 없는 잭슨은 두꺼운 외투를 입은 채 오들거리며 다가왔다.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파란 것이 꽤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뭐, 집들 상태가 거의 움집 수준이니.’
수인들은 추위에 강하다.
그 예로 휴고와 타미 모두 별다른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에단에게도 추위는 별다른 지장을 주지 못했다.
파리한 안색을 본 에단이 피식 웃자 잭슨이 울상을 지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잭슨이 다시 에단을 응시했다.
“이 마을에 온 지 대략 열흘이 좀 안 된 거 같은데.”
“맞습니다.”
잭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마을에 도착한 이후로부터 9일의 시간이 흘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을의 수인들은 믿을 수 없는 성취를 보여 줬다.
수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잭슨도 그들의 성장세에 경탄할 정도였다.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생각이라서 말이야.”
“다음 단계 말입니까?”
“그럼 내가 고작 얘들 가르치려고 이러는 줄 알아?”
에단의 눈살을 찌푸리자 잭슨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자, 확인해 봐.”
에단이 잭슨에게 약도를 건넸다. 약도를 받아 든 잭슨이 천천히 약도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건…….”
“다른 수인들의 대략적인 위치.”
잭슨은 단박에 에단의 의도를 파악했다. 잭슨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에단은 곧장 본격적인 내용들은 언급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다른 마을들의 설득.”
“……설득 말인가요?”
“그래.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설득이어야 되겠지.”
에단의 섬뜩한 미소를 본 잭슨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인원을 배분시킬 거야. 수인들의 수준이 엇비슷하다고 가정했을 때, 모두가 한 번에 움직일 필요는 없으니까.”
합리적인 의견이었다. 잭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구는 문제없이 작동되겠지? 메이한테 미리 유언이라도 전해 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에단이 히죽 웃으면서 농담을 내뱉자 잭슨의 안색이 거무튀튀하게 죽어 갔다.
* * *
수인들의 훈련이 끝났다. 에단은 렉사르까지 불러 모아 계획을 다시금 설명했다.
“따로 궁금한 점은?”
“인원 배분은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너랑 휴고, 그리고 타미랑 잭슨.”
“……에단 님께서는 혼자 가실 생각입니까?”
“아니, 아무래도 혼자 가면 조금 더 경계할 확률이 높으니, 수인 하나랑 같이 갈 생각이야.”
에단의 말에 렉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시간이 아까우니 지체할 필요는 없을 테고. 밤에 움직여도 별로 지장은 없겠지?”
유일하게 잭슨만 울상을 지을 뿐, 다른 이들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추가로 준비해 둔 약도를 건넸다. 정말 간략하게만 표시되어 있는 약도였지만, 렉사르와 잭슨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 먼저 출발들 해.”
“알겠습니다.”
가장 먼저 렉사르가 움직였다.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휴고가 렉사르의 뒤를 쫓았다.
렉사르와 휴고가 사라진 자리에는 바람의 잔향만이 느껴졌다.
복잡한 표정으로 둘이 사라진 곳을 지켜보던 잭슨이 서글픈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
애처롭기 그지없는 눈빛이었지만 당연히 에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에단은 코웃음을 치며 잭슨을 향해 턱짓했다.
“뭐 해? 안 가고.”
“……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잭슨이 터덜터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잭슨이 움직이는 것을 힐긋 바라본 타미가 물끄러미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단은 잠시 타미를 지켜보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호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건넸다.
“이거 찾냐?”
“응.”
타미가 배시시 웃으며 사탕을 챙겼다. 꽤나 귀여운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으며 타미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쟤 얼굴만 삭았지 더럽게 약하니까 네가 잘 보살펴 줘야 한다.”
“알겠어.”
타미가 어깨를 활짝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지만 꽤나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타미는 총총 뛰어 터덜터덜 걷는 잭슨과 합류했다.
침울한 표정을 짓던 잭슨도 똘망똘망한 눈을 하고 있는 타미를 바라보자 피식 웃으며 구부정한 자세를 다잡았다.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에단은 누구를 데리고 갈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잠깐 얼굴 좀 보지.”
훈련이 끝난 후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아란을 호출했다.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아란이 문밖으로 나와 에단을 바라봤다.
역시나 에단을 바라보는 아란의 눈초리는 곱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였기에 에단은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용무지?”
아란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지만, 에단은 곧장 본론으로 돌아갔다.
“나랑 어디 좀 가지.”
“……뭐?”
갑작스러운 말에 아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뜸 찾아와서 그게 무슨 소리지?”
“지도 대뜸 붙자고 까불어 댔으면서.”
“……시비를 걸고 싶어서 온 건가?”
아란의 이마에 줄이 그어지자 에단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내가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에단은 곧바로 아란에게 자신들의 목적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너의 말인즉 다른 마을을 급습할 예정이니 안내원이 필요하다…… 이 말인가?”
“어허, 내가 언제 급습이라고 했어?”
에단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설득이지.”
“……지금 그쪽의 표정이 설득하는 녀석의 얼굴인가?”
“글쎄, 선입견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에단이 능글거리면서 대꾸하자 아란은 이를 악물었다.
“……나는 협력할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다른 녀석을 알아봐라.”
“뭐 나는 별로 상관은 없다만, 그렇게 계속 회피하기만 해서야, 내 옷 끝이라도 스칠 수 있겠어?”
“지금 나를 도발하는 건가?”
“어.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붙어 줄까?”
크르릉.
아란의 입에서 짐승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란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도발, 응해 주지.”
* * *
콰앙!
아란이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아란은 허망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일 합이었다.
아란은 본인의 실력을 드러낼 기회조차 없었다. 그저 정신을 차리니 바닥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당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아란이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그러자 등과 허리 부근에서 뻐근한 통증이 일기 시작했다.
“왜. 계속해 보려고?”
“……그래.”
아란이 이를 갈았다. 이대로 끝내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에단은 아직 검조차 뽑아 들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아란을 우롱했다.
“이딴 수준이면 별로 도움 안 될 것 같은데.”
히죽.
에단의 웃음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아란은 사나운 야성을 토해 내며 몸을 일으켰다.
크르르르.
휴고와 렉사르가 연상되는 금빛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 눈빛조차도 두 사람보단 미숙하다.
단기간의 훈련으로 체력과 조금의 실전은 경험했을 뿐이니 당연한 일.
‘방심할 생각은 없지만.’
에단은 수인의 생태를 이해하고 있었다. 한번 밟을 때 제대로 밟지 않는다면 끝없이 도전할 것이다.
감히 승부욕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패배.
자신의 이름이 공포로 새겨질 때까지 밟아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앞으로가 수월하거든.’
에단이 섬뜩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콰앙!
“커헉!”
아란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바닥에 처박힌 횟수를 기억하지도 못할 정도로 수도 없이 쓰러졌다.
부들부들.
아란이 무릎을 부여잡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에단은 팔장을 낀 채 그 모습을 무심히 관조하고 있었다.
‘종족의 차이인가. 개체의 차이인가.’
아란의 정신력은 에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저 정도의 격차를 보여 준다면 마음이 꺾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동공은 풀리고 입은 벌어져 있었다.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팔과 다리만 보더라도 아란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독기의 기반은 분노인가.’
인간을 향한 분노.
에단은 아란의 사연을 알지 못한다.
구태여 묻지도 않았다. 세상에 사연 없는 이는 없었다.
원한이든, 복수든.
결국 그것을 실현시키고 현실로 옮기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아란에게는 힘이 부족했다.
그래, 이전보다는 성장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란과 에단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수인들이 관중처럼 에단과 아란을 에워싸고 있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아란을 보는 수인들의 눈은 애잔함과 참담함이 공존해 있었다.
‘익숙한 시선이네.’
에단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것이 저 눈빛이었다.
잠시 회상에 잠긴 에단이 피식 웃으며 과거의 망념을 털어 냈다. 지금은 그깟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우득, 우드득.
에단이 손을 풀었다. 전처럼 부상을 입힐 생각은 없었다. 아란은 소중한 안내원이기도 했으니.
‘조금 보여 줄까.’
에단은 자신이 지닌 힘을 조금 드러낼 생각이었다.
꿈틀.
묶어 뒀던 마나와 함께 기세가 피어올랐다.
감히 대적하겠다는 생각조차 찍어 누르는 막강한 기운.
생명체의 정점에 올라 있는 드래곤의 피어가 에단에게서 흘러나왔다.
에단은 시큰둥한 눈으로 아란을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에단이 다가가자, 아란의 육체가 거부반응을 보이듯 움찔거렸다. 하지만 에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에단은 그대로 아란에게 다가가 아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아란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에단에게 멱살을 틀어잡혀 허공에 뜨게 되었다.
아란이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에단은 그저 물끄러미 아란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아란의 눈에 서려 있는 감정을 읽어 냈다.
그의 눈이 품고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한 대 쳐봐.”
에단이 웃으면서 다음 말을 내뱉었다.
“한 번만 맞아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