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화] 실체 (1)
“몸이나 한번 풀든가.”
에단이 가벼운 어투로 말을 던졌다. 그 순간 렉사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렉사르가 시선을 돌려 에단을 응시했다. 밤하늘에선 선명한 달빛이 에단과 렉사르에게 내리쬈다.
달빛을 머금어서일까. 렉사르의 샛노란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진심입니까?”
“그럼 내가 농담하는 것 같아? 뭐, 쫄리면 관두고.”
“…….”
전형적이고 식상한 도발이었다.
하지만 렉사르는 에단의 의도를 읽었음에도 응하기로 결심했다. 렉사르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꾸했다.
“……후회하셔도 늦었습니다.”
렉사르 특유의 쇠를 긁는 것만 같은 꺼림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에단은 실소를 터트리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지랄.”
일행은 자리를 옮겼다.
꼭두새벽 마을 한복판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에단과 렉사르, 그리고 휴고는 마을을 지나 숲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걷자 널찍한 공터가 나와 그곳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이러는 거 꽤나 오랜만인 거 같은데.”
“……각오하는 게 좋으실 겁니다.”
“그딴 허접한 경고하면 진짜 없어 보인다는 거 알아?”
에단이 이죽거리면서 말하자 렉사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후우.
렉사르가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서늘한 공기가 폐부에 들어차고 밖으로 흘러나왔다. 하얀 입김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절그럭.
렉사르가 품에서 사슬낫과 톱날검을 꺼내 들었다. 렉사르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무기들이었다.
에단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특별한 능력은 없었지만, 좋은 명검이었다. 빈센트가 가문의 후계자에게 직접적으로 하사한 검이었으니.
슥. 스윽.
에단이 심드렁한 눈으로 허공에 대고 검을 몇 차례 휘두르자, 바람을 가르며 섬뜩한 소리가 났다.
렉사르는 물끄러미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을 꺼내 든 에단은 이질적이었으나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에단과 렉사르의 시선이 교차했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적막을 깨트렸다.
“안 오면 내가 간다?”
장난스러운 말투. 그 순간 렉사르의 눈이 터질 것처럼 부릅떠졌다.
파앙!
지켜보고 있던 에단의 모습이 사라졌다. 렉사르의 초인적인 동체 시력마저 에단을 놓치고 말았다.
렉사르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렉사르의 동공이 사라진 에단을 찾아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누굴 찾냐?”
스산한 목소리가 렉사르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눈을 부릅뜬 렉사르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앞으로 뛰쳐나갔다.
휘잉!
섬뜩한 절삭음과 함께 렉사르의 옷깃이 베이고 말았다. 거리를 벌린 렉사르가 잘린 옷깃을 바라봤다.
‘……일부로군.’
에단은 지금 손속에 사정을 두고 렉사르를 상대하고 있었다.
한 번의 접점. 그것만으로도 에단과 자신의 격차가 여실히 느껴졌다.
두근.
심장이 격동했다.
몸속에서 순환하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크흐.”
톱날 같은 이빨 사이에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들려오는 소리는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짐승의 것에 더 가까웠다.
렉사르의 샛노란 동공이 야성으로 번들거렸다. 꺼림직하면서도 섬뜩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스스스.
시퍼런 오러가 사슬과 톱날 검을 타고 올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이 피식 웃으며 렉사르와 마찬가지로 오러를 끌어올렸다.
스스스.
회색의 오러가 검을 휘감았다.
불규칙적으로 타오르는 렉사르의 오러와는 다른 안정적인 오러. 렉사르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그래.’
예상은 했다. 에단의 경지는 더 이상 렉사르가 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시간에 어떻게 저렇게 멀리 갈 수가 있는 것이지?
늘 견제와 경계를 받으며 이해받지 못한 삶을 살아오던 렉사르에게도 에단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도.’
렉사르가 침을 삼켰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래.
부정할 수 없었다.
이렇게 목숨을 건 전투만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렉사르는 헤어날 수 없는 중독에 빠지고 말았다.
절그럭.
‘나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지금의 경지로는 에단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냥꾼은 어떻게는 활로를 찾아내기 마련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오갔다. 그리고 이번에 먼저 움직인 자는 렉사르였다.
파밧!
렉사르가 에단을 향해 돌진했다. 오러가 둘러진 톱날 검이 매서운 궤적을 그렸다.
콰앙!
강렬한 굉음과 함께 불똥이 튀었다.
검을 부딪친 렉사르는 엄청난 반발력을 느끼고 말았다. 어깨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믿기지 않는 괴력에 렉사르는 쥐고 있던 검을 놓칠 뻔했다.
까득.
렉사르가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났다. 에단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거리를 벌리는 렉사르를 추격했다.
그 순간 눈밭에 파묻혀 있던 사슬이 에단의 발을 휘감았다. 노림수가 먹혀들자 렉사르의 흉흉한 안광이 번뜩였다.
“내가 병신으로 보이냐?”
에단이 코웃음을 치며 발을 묶으려드는 사슬을 검으로 찍었다.
콰앙!
오러를 두른 검이 번뜩이며 사슬을 박살 냈다. 그리고 에단은 자신을 향해 쇄도해 오는 렉사르를 향해 몸을 틀어 뒤차기를 날렸다.
뻐억―!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렉사르의 눈이 터질 것처럼 커졌다.
복부를 얻어맞은 렉사르가 허공을 비행했다. 에단은 멀어지는 렉사르를 향해 뛰쳐나갔다.
까득.
렉사르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이성을 붙잡은 렉사르가 공중에서 자세를 갖췄다. 그러고는 에단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난폭한 궤적이 만들어졌다. 에단은 씨익 웃으며 렉사르가 만든 궤적을 정면에서 맞상대했다.
콰앙!
렉사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손목과 어깨에서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힘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졌다.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에단의 검격에 렉사르가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아직 렉사르는 타격을 전부 회복하지도 못했다.
그 순간 에단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덥석.
빈틈을 포착한 에단이 검을 놓고는 렉사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당황한 렉사르가 에단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지만, 에단의 왼손이 렉사르의 톱날 검을 붙잡았다.
카가강!
타이탄의 장갑과 오러가 부딪치면서 불똥이 거칠게 피어올랐다. 렉사르와 에단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에단이 사납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잡혔네.”
“……제기랄.”
렉사르가 욕설을 내뱉자 에단이 웃음을 터트렸다.
후웅!
렉사르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그러고는 눈 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곤두박질쳐졌다.
콰앙!
강렬한 굉음과 함께 렉사르의 입이 벌어졌다. 에단은 허망한 눈을 한 채 대자로 쓰러진 렉사르를 바라봤다.
“괜찮냐?”
“……안 괜찮습니다.”
“엄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에단의 말에 렉사르가 기막힌 눈으로 올려다봤다.
잠시 기묘한 표정을 짓던 렉사르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던 것 같군요.”
“그래.”
히죽 웃은 에단이 렉사르를 향해 손을 건넸다. 렉사르는 에단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몸 이곳저곳에서 삐걱거리며 통증이 일자 렉사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렉사르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남자였다.
자신이 해 왔던 고뇌들이 아주 작게 느껴졌다.
‘……정말 가주를 넘을 수도 있겠군.’
렉사르가 결코 넘거나 도달할 수 없다고 인정한 남자가 바로 블란테의 가주인 빈센트였다.
에단은 아직 그 정도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빈센트와 같은 위치에 도달하거나, 넘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골적인 렉사르의 시선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부담스럽게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닙니다.”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린 렉사르가 몸에 묻은 눈을 털어 냈다.
“마음의 정리는 좀 끝났나?”
“네.”
렉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렉사르의 홀가분한 표정에 에단이 잔잔하게 웃었다.
“마음의 정리를 끝냈으면 이제 결정을 해야겠지.”
“……도련님의 계획은 뭡니까.”
“특별한 건 없어.”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그냥 정면에서 부숴 버리려는 것뿐이지.”
바스락.
그때 휴고가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다가왔다.
에단과 렉사르는 물끄러미 휴고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 * *
다음날이 밝았다. 렉사르는 본격적으로 수인들을 실전에 투입시켰다. 수인들은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수인들 특유의 회복력으로 인해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상황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 보이자, 에단은 호르잔을 찾아갔다.
“물어볼 게 있는데.”
“편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너, 이게 뭔지 알고 있지?”
에단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호르잔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에단은 호르잔의 동요를 감지해 냈다.
“알고 있군.”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단편적인 거라도 충분해.”
“……상당히 오래된 과거. 제가 아주 어린 나이일 때 봤던 저희 수인들의 보물. 그것과 매우 비슷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그게 전부라고?”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호르잔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저희는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습니다. 대부분 구전을 통해 선대의 유지가 이어지죠. 그리고 저희 선대는 아시다시피…….”
호르잔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에단은 이맛살을 구기며 수긍했다.
“다른 부족에도 이것에 대해 알고 있을 만한 녀석이 있나?”
“……정확한 답은 드리지 못합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에단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크리스토의 즉위식이 벌어지기 전에 북부에서 복귀를 해야만 했다.
에단이 품에서 커다란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탁상에 펼쳐 놨다.
“다른 부족들의 위치. 짐작 가는 구석이 있다면 전부 적어.”
“…….”
에단의 말을 들은 호르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리 어렴풋이 알고 있다지만 다른 부족의 위치는 가볍게 발설할 수는 없는 정보였다.
‘……신용하여도 되는가?’
자칫하면 마을의 피해로 끝나는 것이 아닌 모든 수인들이 또다시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다.
호르잔은 마을 사람들의 안위를 추구해 왔다. 과거의 영광을 잊고 척박한 북부에서 숨어서 살아갈지언정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하지만 바뀌어 가는 마을 수인들을 보며 생각을 달리했다. 자신의 방식은 수인들에게 족쇄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고민에 빠져 있던 호르잔이 결단을 내렸다.
“……정말 복수를 생각하십니까?”
“난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에단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호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호르잔이 펜을 들어 간략한 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슬슬 수인들을 규합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