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격투천재-284화 (284/398)

◈ [284화] 북부 (9)

“끄아아아아아악!”

에단이 수인의 손목을 비틀자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에도 에단은 태연자약한 얼굴을 유지한 채 붙잡은 손목을 놓았다.

“엄살 피우고 있어.”

에단이 손을 털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차게 식은 에단의 시선이 수인들에게로 향했다.

“남은 녀석들도 전부 나와.”

“…….”

더 이상 에단 앞으로 나서는 수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 에단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깔며 눈치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에단의 실망감 어린 눈이 일행에게로 향했다. 팔을 부여잡은 수인을 향해 알리가 달려 나갔다.

“아, 아빠!”

“끄으으윽…….”

손목이 꺾인 수인이 독기 어린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시선을 느낀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뭐 억울한 거라도 남아 있나?”

“……아니. 조만간 다시 도전할 거다.”

예상외의 대답에 에단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에단이 히죽 웃으며 수인에게 물었다.

“이름은?”

“……아란.”

“다음에 나랑 붙고 싶으면 이 녀석부터 꺾어.”

에단이 휴고를 앞으로 내세웠다. 휴고는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끔뻑거렸다.

“……저 말입니까?”

“그럼 누구한테 하는 소리겠어?”

스스로를 가리키며 되묻는 휴고를 향해 에단이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지켜보던 아란이 이를 갈았다.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건가?”

“아, 아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아란이 날카로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곁에 있던 알리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란을 바라봤다.

알리는 휴고가 전투에 돌입하면 어떻게 돌변하는지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존심을 부리고 싶으면 그에 걸맞은 실력부터 기르고 말해.”

에단이 싸늘한 눈초리로 아란을 흘겨봤다.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던 아란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에단은 몸을 돌려 호르잔을 바라봤다. 호르잔과 에단의 눈이 마주쳤다. 호르잔은 복잡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럼 하던 얘기부터 마저 할까?”

에단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호르잔에게 다가갔다.

* * *

약육강식.

인간들을 피해 촌락 수준의 마을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수인들에게도 아직 통용되는 단어였다.

힘으로 결정되는 서열.

마치 블란테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나이가 지긋한 호르잔이 마을의 장로로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는 당분간 여기서 지낼 생각이야.”

“……알겠습니다.”

호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인 대화를 하기 전, 에단은 할 일이 있다며 문밖을 나섰다.

그 할 일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청년들의 반발은 예견되어 있었다.

어리고 혈기왕성한 마을 청년들을 설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단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반발을 잠재우고 마을의 청년들을 굴복시켰다.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해 보고 짓밟힌 수인들은 불만이 있어도 내색하지는 못할 것이다.

“……저희들을 찾아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호르잔은 눈앞에 이 남자를 가늠하지 않기로 했다.

질문을 들은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성 왕국 녀석들을 대륙에서 완전히 지워 버릴 생각이야.”

호르잔을 응시하는 에단의 동공이 번들거렸다. 그 사나운 시선에 호르잔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게 무슨…….”

너무나도 황당무계한 소리에 호르잔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에단이 피식 웃으며 품에서 금패를 꺼냈다. 금패에는 검은 사자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은…….”

금패에 새겨진 블란테의 문양.

호르잔은 충격받은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호르잔의 동공이 길을 잃은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어때, 이제야 좀 신빙성이 있어 보이나?”

“당신은 대체…….”

에단은 담백하게 세워 둔 계획들을 호르잔에게 말했다. 그 말은 설명이나 설득이라기보다는 통보에 더 가까웠다.

수인들을 규합하고, 그것을 명분 삼아 신성 왕국을 급습한다.

블란테 같이 거대한 세력이 신성 왕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펼칠 경우 안 좋은 여론이 형성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에단은 블란테 대신 앞으로 내세울 집단을 찾아왔다.

‘……이것이 목적이었나.’

호르잔이 어두운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신성 왕국에 대한 복수심이 옅어진 것은 아니었다. 호르잔의 가슴 한편에는 아직 분노가 잠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일족은 쇠락한 지 오래였다.

지금의 전력으로는 감히 신성 왕국과 대적할 수 없었다.

꽈악.

호르잔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분한 감정이 들었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블란테의 기사들은 얼마나 참전합니까?”

“많지는 않아.”

에단의 대답에 호르잔은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배려 따위는 없는 에단의 물음에 호르잔이 참담한 얼굴을 한 채 대답했다.

“……저희들 수준으로는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힘을 잃었습니다. 번영하던 시절은 과거의 영광일 뿐입니다.”

“그래. 알고 있어.”

“그렇다면 어째서!”

“…….”

“……죄송합니다.”

호르잔이 언성을 높인 것을 사죄했다.

에단은 물끄러미 호르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깊고 고요한 에단의 동공이 호르잔을 응시했다.

호르잔은 늙었지만 아직 타오르는 불씨가 남아 있었다. 에단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걱정하지 마.”

“네?”

“내가 해결할 거니까.”

“……무슨 수로 해결하신다는 거죠?”

호르잔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자신은 복잡한 감정을 토해 내며 힘겹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에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말했기 때문이다.

“왜? 의심스러워?”

“…….”

호르잔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에단이 말을 이었다.

“다른 일족들의 위치는 알고 있나?”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

“일족들을 규합해야겠어. 진통이야 있겠지만, 그건 너희들이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고. 지금껏 다른 일족과의 접촉을 피한 이유도 인간들의 눈이 무서워서가 아닌가?”

“……맞습니다.”

몸집이 비대해지면 그만큼 몸을 숨기기가 어려워진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였다.

정체가 발각되고 위치가 특정되면 다시금 악몽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인들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고 있었다.

호르잔은 마을의 장로로서 수인들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인간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만일 너희를 건드리려고 하면 블란테가, 아니,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소리시죠?”

“말했지. 신성 왕국 대가리 중 하나를 내가 죽였다고.”

“……검증되지 않은 말일 뿐입니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이렇게 평생 동안 숨어서 나무뿌리나 캐 먹으려고?”

“…….”

“꽤나 기대하고 왔지만 너희들을 보자마자 실망했어. 너라면 알고 있겠지, 내가 데리고 온 녀석들이 누구인지.”

“수인들…… 말입니까?”

“그래. 장담하지. 너희들은 그 녀석들 중 한 명도 감당하지 못해.”

자존심을 사정없이 후벼 파는 말.

에단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내가 아는데 그쪽이 모를 리는 없겠지. 녀석들은 실전에 대한 경험이 없어.”

“…….”

“인간들이 무섭다고 산 깊숙이 틀어박혀 나무뿌리나 뜯어 먹는 녀석들에게 실전 경험을 기대하는 것도 잘못됐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

꾸욱.

호르잔이 다시금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절망에 빠지지 않고 분노한다는 것.

에단이 원하던 반응이었다. 에단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금 이대로 지낸다면 더 나아지는 것 없이 계속 제자리걸음이겠지.”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편하게 맡겨 놔.”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이건 내 특기니까.”

* * *

에단과 일행은 마을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생활환경은 열악했지만 설산에서 노숙을 하는 것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마을 수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으나 에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저 시선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익숙하네.’

익숙하다 못해 친근하게까지 느껴졌다. 경계와 적의가 공존하는 시선.

류태신 시절부터 블란테, 아카데미까지. 어딜 가나 받던 시선이다.

하지만 그 시선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에단은 자신 있었다. 머지않아 저 곱지 않은 시선들은 바뀔 것이다.

“가장 먼저 할 게 있다.”

에단이 입을 열자 일행들이 에단을 바라봤다.

“북부에 꽤나 괜찮은 몬스터가 많은 모양이야.”

설산 트롤부터 시작해서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꺼림칙하게 여겨지는 몬스터들.

포악한 성정과 압도적인 무력으로 인해 토벌 난이도가 매우 높은 녀석들이었다.

뛰어난 기량을 지닌 기사들이나 노련한 용병들도 쉽지 않아 했는데, 가장 큰 이유로는 이곳은 북부였기 때문이다.

극한의 날씨와 허벅지까지 들어가는 눈길 속에서는 거동조차 쉽지 않았다.

반면 북부에서 나고 자란 몬스터들은 이러한 설산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수인들의 처지도 비슷하니.’

북부에서 나고 자란 것은 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실력과 경험만 부족할 뿐 이 녀석들의 재능은 최상급이었다.

‘우리가 나서면 의미가 없어.’

몬스터 토벌? 험준한 지형? 흉포하고 사나운 몬스터?

지금 에단 일행에게는 조금도 위험하지 않은 것들이다.

당장 에단과 일행은 모든 생명체를 통틀어 정점에 올랐다고 알려진 드래곤까지 토벌했다.

조금 까칠한 몬스터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는 의미가 없었다. 에단은 수인들의 수고를 대신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에단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날은 저물지 않았다.

‘미뤄서 좋은 건 없겠지.’

결정은 빠를수록 좋았다.

“애들 모아.”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말을 덧붙였다.

“오늘부터 훈련 개시다.”

* * *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숨을 들이마시는 목과 폐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과 피부는 달아올랐고, 매 호흡이 고통스러웠다.

다리가 의지를 벗어나려 들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에서 뛰는 행위 자체가 체력을 엄청나게 갉아먹고 있었다.

수인들이 뒤처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편에서 렉사르가 사슬을 내려쳤다.

콰앙!

살벌한 굉음을 일으키며 눈들이 비산했다. 렉사르가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으르렁거렸다.

“멈추면 죽는다.”

수인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육체는 이미 한계였지만 공포가 그들을 움직이게끔 만들었다.

‘……대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앞을 바라봤다. 에단과 휴고, 그리고 타미는 아무렇지 않게 뛰고 있었다.

페이스는 그대로였고,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경이로운 광경에 수인들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