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북부 (6)
일행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기를 굽고 있었다. 에단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사한 설산 트롤을 아무렇게나 놔두고는 모닥불 옆에 앉았다.
“드시겠습니까?”
잭슨이 고기를 내밀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그러고는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잭슨은 에단이 우물거리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마치 칭찬을 바라는 모습이었다.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에단이 피식 웃었다.
“먹을 만하네.”
“그쵸?”
잭슨이 뿌듯하다는 듯 웃고는 자신도 고기를 뜯었다. 즉석에서 급하게 준비한 식사치고는 썩 그럴듯했다.
잭슨과 에단이 수인들에게 음식을 권했다. 알리와 다른 수인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음식을 받아 들었다.
에단은 고기를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저거 사체 필요하냐?”
에단의 물음에 알리가 고개를 돌려 죽은 설산 트롤을 바라봤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네.”
알리는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설산 트롤의 사체가 지닌 값어치는 결코 적지 않았다.
가죽은 튼튼한 방어구로 쓸 수 있었고, 이빨과 뼈는 좋은 무기 재료가 되었다.
심지어 질긴 힘줄도 탄력적인 활시위로 만들 수 있었다.
사냥하기 힘들 뿐, 사냥만 성공시킬 수 있다면 설산 트롤은 정말 버릴 게 없었다.
“뭐, 방문 선물로 괜찮으면 됐지. 다 먹고 적당히 손질 좀 해 놔.”
“알겠습니다.”
렉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대화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수인들은 멍청한 표정들로 고기를 씹었다.
그 뒤로는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에단은 먼저 식사를 끝내고 손에 묻은 고기 기름을 닦아 냈다.
입이 워낙 많아서 좀 부족해서 그렇지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렉사르도 에단과 거의 동시에 식사를 끝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방금 멧돼지를 도축할 때 사용했던 칼을 꺼냈다.
“제가 도울 게 있을까요?”
이번에도 휴고가 렉사르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설산 트롤과 휴고를 번갈아 본 렉사르가 말했다.
“……도와라.”
설산 트롤은 혼자 손질하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소매를 걷어붙인 렉사르는 피를 빼기 위해 손목과 발목 쪽에 칼을 찔러 넣으려고 시도했지만, 워낙 질긴 탓에 쉽게 박히지 않았다.
“…….”
렉사르가 말없이 설산 트롤을 노려봤다. 대충 예상한 부분이지만 생각보다 설산 트롤의 가죽이 질겼다.
렉사르가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은 에단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거 하나 못 해?”
“……누가 못 한다고 했습니까?”
렉사르의 말투가 저도 모르게 까칠해졌다. 깊은 한숨을 내쉰 렉사르가 다시 한번 칼을 들었다.
스스스.
렉사르의 칼에서 시퍼런 오러가 흘러나왔다.
제아무리 설산 트롤의 가죽이 질기다고 해도, 오러에는 버틸 수 없었는지 손쉽게 벌어졌다. 그리고 두꺼운 동맥과 힘줄도 끊어 냈다.
에단은 렉사르를 지켜보다가 다시 불로 시선을 옮겼다.
설산 트롤의 채취가 풍기는 이상, 잡스러운 몬스터나 짐승들이 접근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인간인가요?”
알리의 물음에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에단의 눈빛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에단은 말없이 알리를 응시했다.
“그게 왜 궁금하지?”
“……인간인 것 같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냄새가 나서요.”
냄새라.
참으로 수인스러운 대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과연 지금의 자신을 보고 인간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에단은 확신할 수 없었고, 그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글쎄.”
에단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알리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 마을을 가려는 이유가 무엇이죠?”
“궁금하게 많군.”
“외지인을 경계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이제 와서 경계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는 않은데.”
“…….”
“어차피 말해도 모를 테니 신경 꺼.”
에단의 말에 알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 * *
하루가 지났다.
타미를 제외한 모두가 잠을 자지 않았다. 에단은 날이 밝자마자 알리의 안내를 받아 마을로 향했다.
부피가 큰 설산 트롤은 나무를 이용해 썰매처럼 만들어 끌기 시작했다. 끄는 것은 휴고가 맡았다.
썰매를 끄는 휴고는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수인들은 길을 안내하면서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에단 일행은 어디까지나 외지인이었고, 마을로 데려가는 것도 협박으로 인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이동하면서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무거운 적막이 내리깔려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기척이 느껴졌다. 감각이 예민한 에단과 렉사르는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응시했다.
“누가 있군.”
경계의 기척이 느껴졌다. 알리가 그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빠…….”
쐐액!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화살이 날아오고 있었다. 에단은 콧방귀를 뀌며 날아오는 화살을 그대로 낚아챘다.
“환대가 격렬한데.”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어린 수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살수를 망설이지 않았다.
외지인에 대한 강렬한 적의가 엿보였다.
“렉사르.”
에단의 부름에 렉사르가 앞으로 나섰다.
“격렬한 환대에는 그에 걸맞은 보답을 해 줘야겠지?”
“알겠습니다.”
렉사르가 톱날 같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파밧!
렉사르가 질주했다. 느껴지는 기척은 하나가 아니었다.
렉사르가 사라진 직후 몇 차례 폭발음이 울렸다. 에단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이동했다.
알리를 포함한 수인들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설마 마을 쪽에 발을 들이자마자 싸움이 벌어질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마을 어른들이 외지인을 경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심지어 같은 수인 부족과의 교류도 꺼려 할 정도였으니까.
알리와 수인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눈빛을 한 채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를 지켜보고 있었다.
렉사르가 품에서 사슬낫을 꺼내 들었다. 사슬이 절그럭거린다. 렉사르의 금빛 동공이 멀어지는 신형을 좇는다.
‘일단은 하나.’
근처에 추가적인 적들이 있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곳은 상대의 본거지였다.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크흐.
렉사르의 입에서 끈적한 야성이 흘러나왔다.
피부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과 함께, 혈액을 밀어내는 맥동 소리가 뚜렷해지고 감각이 예민해졌다.
삶과 죽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는 행위는 엄청난 흥분과 중독감을 동반했다.
렉사르는 전투에 들어갈 때마다 살아 있음을 느꼈다.
촤르르륵!
렉사르의 사슬이 날아간다. 시퍼런 마나를 두르고 있는 사슬은 마치 자아가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도망치는 적, 그리고 추적하는 사슬.
크릉!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렉사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쾅!
도망치던 적이 렉사르의 사슬을 쳐 냈다. 렉사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어린 수인들을 상대할 때는 상황이 순식간에 종료된 탓에 이렇다 할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당시에는 흥분을 느끼기도 전에 감정이 식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파바밧!
렉사르가 품에서 꺼낸 여러 자루의 단검들을 동시에 투척했다. 오러를 머금은 단검들.
고개를 돌린 적이 날아드는 단검을 빠르게 피해 냈다.
“크하하!”
렉사르가 광소를 터트리며 쫓았다. 적은 이내 도주를 포기한 것인지 렉사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둘의 무기가 부딪쳤다. 렉사르는 사슬낫을 품에 밀어 넣고 칼을 뽑아 들었다.
쾅!
쇠가 부딪치면서 강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렉사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착각인가?’
뭔가가 이상했다. 렉사르는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재차 달려들었다.
칼이 번뜩이며 검극이 오간다. 렉사르는 노련한 사냥꾼이자 전사였다.
렉사르의 검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실체와 허상을 오가는 교묘한 공격들.
이것이 바로 렉사르가 쌓아 올린 역량이자 실력이었다.
“크윽!”
신음이 터져 나오며 피가 비산했다.
적의 움직임은 민첩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빠르기만 한 것은 렉사르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역시.’
혹시나 했던 생각이 확신이 되었다. 렉사르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쯧.”
렉사르가 혀를 찼다.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실력이다. 상대의 기량은 검을 섞자마자 확인이 되었다.
차르륵!
렉사르는 사슬을 꺼내 들었다. 상처를 입으며 한층 둔해진 상대는 렉사르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뱀처럼 날아간 사슬이 적을 포박했다. 그는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헛된 발악에 불과했다.
완전히 제압당한 수인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렉사르를 노려봤다.
렉사르의 눈이 차게 식었다. 달아오르려던 몸과 감정이 미지근해졌다.
“끝났냐?”
포박이 끝난 직후에 에단이 다가왔다. 렉사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네, 생각보다…… 수준이 낮더군요.”
“그런 것 같네.”
포박된 수인을 바라보는 에단의 눈이 가늘어진다. 원하던 상황은 아니다.
에단이 수인을 찾는 이유는 신성 왕국에 대해 파헤치려는 것도 있었지만, 전쟁을 대비해 전력을 확보하기 위함도 있었다.
“전부 이 정도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정말 실망이다. 기껏 시간을 할애해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을 테니.
에단이 포박되어 있는 수인에게 다가가더니 쪼그려 앉았다.
“꽤나 상황이 갑작스러울 텐데 우리는 그쪽이랑 딱히 싸울 생각이…….”
퉤.
에단을 노려보던 수인이 침을 뱉었다. 에단은 고개를 젖히며 날아오는 침을 피해 냈다.
“성격은 확실하군.”
피식 웃은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알리에게 물었다.
“딸도 있는데 다짜고짜 화살부터 날릴 줄은 몰랐는데.”
“어떤 이유더라도 외지인은 마을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외지인의 대한 경계와 적의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에단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것 같았어. 그런데 미안하지만 내 성격이 그렇게 온화하지가 않아.”
시간이 넉넉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크리스토의 즉위식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진 않았다.
에단은 그 전에 크리스토의 지지 세력 중 하나인 신성 왕국을 완전히 무너트릴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수인들의 힘이 필요했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에 맞는 명분을 준비해야 했다.
‘녀석들이 수인들로 뭘 준비하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레미아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지금 신성 왕국은 문을 틀어막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그들은 곧장 사라진 성녀를 찾아다닐 것이고, 그렇게 되면 충돌은 피할 수가 없다.
에단은 그 전에 신성 왕국을 박살 낼 생각이었다. 다시는 감히 고개를 쳐들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적당히 쓸 만한 녀석들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휴고와 타미를 떠올리며 조금 기대했지만, 지금 보이는 이들의 실력은 너무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에단이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그때, 여러 기척이 접근하고 있었다.
에단을 포함한 일행도 다가오는 기척을 감지했는지 표정을 굳혔다.
“이번에는 좀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에단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