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북부 (4)
크르릉.
짐승의 소리가 들려오자 렉사르와 휴고가 반응했다. 렉사르가 품에서 꺼내 든 사슬낫에서는 푸른빛의 마나가 감돌았다.
“…….”
침묵이 내리깔리며 대치가 오갔다. 렉사르가 곁눈질로 휴고를 바라봤다.
끄덕.
렉사르의 시선을 느낀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을 처음 마주한 그 순간부터 휴고도 눈치채고 있었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다.
‘아마도 수인.’
일행이 이 추운 북부까지 찾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정적이 지속되자 저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렉사르와 휴고는 경계를 풀지 않고 나서는 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쪽도 수인인가? 어느 일족이지?”
예상과 다른, 가는 목소리.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성이었다.
그녀는 몸과 얼굴을 두꺼운 외투로 완전히 가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렉사르와 휴고는 그녀의 시선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
휴고와 렉사르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옳았다.
평생을 블란테에서 생활한 둘은 일족에 관한 질문이든, 수인에 관한 질문이든 답할 수 있는 지식이 없었다.
렉사르와 휴고가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고수하자, 무리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더욱 냉담해졌다.
“……그 복장, 이 근방 녀석들은 아니군.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엮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냥 조용히 사냥감만 넘긴다면…… 이대로 떠나 줄 용의가 있는데.”
그녀의 제안에 렉사르가 코웃음을 쳤다.
“그럴 수는 없겠는데.”
특유의 거친 음성이 낮게 내리깔렸다.
렉사르를 경계하고 있던 자들이 움직이려고 들었다. 그러자 앞에 나서 있던 여성이 팔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억지를 부리는군. 저 사냥감의 사냥은 우리가 했다. 목덜미에 박힌 화살을 보고도 권리를 주장할 생각인가?”
나름의 합리성을 띤 말이었지만 렉사르는 콧방귀를 뀌었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데 억지를 부리는 건 그쪽이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리지?”
“너희들도 사냥을 해 봤으면 알 텐데. 사냥이라는 행위보다 사냥감을 몰아넣는 게 더 힘들다는 것을. 저 사냥감은 우리가 몰아넣었어. 그리고 사냥을 하기 직전 너희가 우리의 사냥감을 가로챈 것이지.”
“…….”
그녀는 침묵한 채 고개를 돌려 일행을 바라봤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후우, 그래. 너희들의 말도 합당한 부분이 있어. 그 부분은 우리도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사과하도록 하지.”
그녀는 의외로 자신의 실수를 순순히 인정했다.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염치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양보해 줄 수 없겠나? 이게 마지막 제의일 것 같은데.”
온화한 말투 속에서 느껴지는 싸늘함.
친숙한 감각을 느낀 렉사르의 입이 주욱 찢어졌다.
“이번에는 나와 생각이 같군.”
크르르.
그 순간 억눌러 둔 야성이 폭발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렉사르와 휴고가 자리에서 튀어 나갔다.
대치하고 있던 이들도 곧장 대응했다.
쾅!
강렬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에는 렉사르의 의도도 서려 있었다.
스스스.
렉사르가 쥐고 있는 사슬낫에서 시퍼런 마나가 흘러나왔다. 렉사르의 동공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상대의 숫자는 총 넷.
아직 적들의 실력은 측정되지 않았다.
파바밧!
쾌속한 검격이 렉사르를 노렸다. 렉사르의 샛노란 동공이 꿈틀거렸다.
‘뭐지?’
묘한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렉사르가 목덜미를 노리는 공격들을 피해 냈다.
촤르르륵!
“크윽!”
첫 번째 공격의 회피는 렉사르의 의도이자 상대방을 유도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빤히 보이는 노림수, 그리고 그것에 대응하는 공격.
전투에 있어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촤르르륵!
저들은 렉사르의 공격에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겨울은 대비한 두꺼운 외투가 찢어지며 피가 튀었다.
“알리!”
동료가 상처 입는 것을 지켜본 누군가 소리쳤다. 그가 렉사르를 향한 적의를 불태웠다.
‘연기인가?’
렉사르는 순간 그렇지 않고서는 납득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파바밧!
크아앙!
적들이 야성을 토해 냈다. 피부가 아려오는 기세였지만, 렉사르의 감정은 차갑게 식어 갔다.
‘상처 입은 녀석은 배제.’
그렇다면 적들은 셋. 그리고 그 셋은 동료를 상처 입힌 렉사르에게 강렬한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머저리 같은 놈들.’
렉사르의 입가가 비틀렸다.
분노에 이성을 잃은 적들은 지금 자신들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를 잊었다.
타닷!
휴고가 멀어지는 적의 발목을 붙잡았다. 야수화가 진행된 상대의 힘은 강했지만 기교가 없었다.
뻐엉!
휴고가 저항하는 상대의 복부를 걷어차자 상대가 눈밭을 사정없이 굴렀다.
“……어라?”
휴고도 저렇게 손쉽게 나가떨어질 줄은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끄으으…….”
바닥에 쓰러진 적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기는 하였으나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위태롭기 그지없는 모습.
그것을 지켜본 렉사르가 혀를 찼다.
그래,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너희들…… 도대체 뭐지?”
저들은 너무 약했다.
* * *
에단은 원인 모를 굉음을 감지하는 순간 곧장 몸을 일으켰다.
“움직인다.”
에단의 말에 야영을 준비하던 잭슨도,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너는…….”
에단이 잭슨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잭슨의 무력은 나름 쓸 만한 편이었지만, 높게 쌓인 눈길에서는 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짐 덩이가 따로 없네.”
“……네?”
에단의 가슴을 찌르는 비난에 잭슨이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에단은 잭슨이 상처를 입든지 말든지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지금의 잭슨이 짐 덩어리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에단이 난데없이 잭슨을 들쳐 맸다. 잭슨이 당황해했지만, 지금 그딴 걸 배려할 시간은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에 두고 이동한다면 그 뒤로 잭슨은 조난당할 운명이었다.
“타미, 따라올 수 있지?”
“응.”
힘겹게 깐 사탕을 우물거리고 있던 타미가 대답했다. 에단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질주했다.
에단이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저 멀리서 적들의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짙게 내리깔린 어둠 속,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달빛만이 길을 밝혀 주었다.
하지만 어둠에 제약을 받지 않는 에단의 두 눈은 멀리 있는 적들의 윤곽을 인지했다.
‘뭐야.’
의외의 상황이다.
굉음을 인지했을 때 수인과 조우했으리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에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에단이 장소에 도착하자, 수인들의 포박을 끝낸 렉사르가 에단에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그래, 상황 설명부터 간략하게.”
곧장 본론을 요구하는 에단의 말에 렉사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있었던 상황을 요약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상입니다.”
렉사르의 설명을 들은 에단이 턱을 매만졌다.
“흠, 그렇단 말이지.”
녀석들은 어설픈 수인화를 한 채로 완전히 포박당해 있었다. 상처 입은 짐승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에단과 일행들을 경계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쯧.”
에단이 그들을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러고는 렉사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두머리는 누구야.”
“저 녀석으로 추측됩니다.”
렉사르가 가리킨 방향에는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한 여자가 포박되어 있었다.
에단은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틀어막은 재갈을 풀었다.
재갈을 푸는 순간 곧장 반항하며 욕설을 내뱉으려 하자, 에단이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꽈아아악!
이미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에단의 악력에 그녀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부르르.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순간 턱이 이대로 부서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단이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깊고 고요한 동공, 그곳에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름.”
에단이 묻는 순간 대답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알리.”
“그래, 너희들은 수인인가?”
두 번째 질문.
그러자 알리의 얼굴에 경계심이 짙게 깔렸다. 강렬하게 적의를 불태우는 모습이 의외였지만, 안타깝게도 에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지?”
에단이 다시 턱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 달랐다. 알리는 두려워하면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
‘흐음.’
그 모습을 지켜본 에단이 잠시 고민했다.
어찌하는 게 좋을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 이상 원만한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힘으로 굴복시키고, 굴복당한 것으로 시작한 관계였다.
에단은 복잡한 생각을 그만뒀다.
이 먼 북부까지 찾아온 이유는 그만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
‘위선을 떨 생각은 없어.’
에단이 움켜쥐던 턱을 놓자 알리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나를 놓아준 거지?’
그 의문이 해소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에단이 알리의 곁에 포박되어 있는 수인들에게 다가갔기 때문이다.
스르릉.
허리춤에 매달아 둔 검이 뽑혔다. 칼집에서 뽑히는 검이 맑고 스산한 소리를 내었다.
에단이 뽑아 든 검은 밤하늘에서 내리쬐는 달빛을 머금었다. 서늘한 달빛을 머금은 검의 예기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내가 무슨 짓을 할지를 왜 나에게 묻는 거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앞으로 내가 할 행동은 네 입에 달려 있다는 것을.”
에단이 칼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알리의 눈이 터질 것처럼 부릅떠졌다.
푸욱!
검이 눈 바닥에 내리꽂혔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에단의 검은 수인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두 번은 없을 거야.”
에단의 고압적인 겁박에 알리는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알리가 정보를 불기 시작하자, 에단의 일행은 조금 충격받은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대체…….’
능숙한 협박, 정보를 끄집어내는 에단의 태도는 잭슨이 보기에도 섬뜩할 정도였다.
에단의 태도는 단순한 위협용이 아니었다. 그 표정은 진심이 아니라면 나올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만일 알리가 거기서 입을 열지 않았다면 에단은 정말 수인 중 한 명을 죽였을 것이다.
그 무정함과 단호함에 잭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잭슨은 정보 길드의 간부로서 수많은 정보를 취급해 왔다.
원하는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더없이 잔혹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훈련과 경험으로 감정이 무뎌진 것이었다.
에단의 나이는 고작해야 20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에단은 결단을 내리는 데에 있어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다.
잭슨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런 에단에게 적대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만일 자칫했다가는.’
정말로 정보 길드는 이 세상에서 지워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