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화] 북부 (3)
일행은 에단을 선두로 두고 앞으로 나아갔다.
앞을 가로막는 것을 모조리 갈아 버리며 나아가고 있어 속도에 탄력은 붙었지만, 그래도 평소의 속도와 비교하면 미진한 수준이었다.
“저기…… 에단 님?”
그때 잭슨이 에단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단이 획 하고 고개를 돌리자 움찔하기는 했지만.
“뭔데.”
퉁명스러운 물음에 잭슨이 침을 꼴깍 삼키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슬슬 노숙을 준비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이동 방식은 효율적이기는 하나, 저희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수인의 흔적을 찾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이렇게 눈사태를 일으키며 만나는 몬스터들과 짐승들도 죄다 지워 버리면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 수인들은 감각이 상당히 예민한 걸로 알고 있는데 수시로 이런 굉음과 산사태를 일으키면…… 도망가지 않을까요?”
최대한 에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말하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이야기를 듣던 에단은 잭슨의 말이 합리적이라고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그럼 뭐…… 어딜 가든 상황은 비슷하니까 여기서 준비하자고.”
에단이 칼질을 멈추자, 다시 거대한 눈 더미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리 좀 만들어.”
잭슨과 일행들이 암울한 표정을 지으며 야영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에단의 무식한 공격들로 인해 주위가 평평해져 그리 어렵지 않았다.
노숙이나 야영을 진저리가 날 정도로 해 온 잭슨이 능숙하게 배낭을 열어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 저도 도울게요.”
휴고가 잭슨의 곁에 다가가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 잭슨이 감격에 젖은 눈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촉촉하게 젖은 눈이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네.”
뭔가 부담스러운 눈길에 시선을 회피한 휴고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렉사르와 타미, 그리고 에단까지 나서자 순식간에 그럴듯한 야영지가 마련되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에단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고, 수인인 휴고와 타미, 그리고 렉사르도 별달리 추위를 타지 않았다.
유일하게 추위에 약한 잭슨이 오들오들 떨면서 장작불 지필 자리를 만들었다.
부싯깃도 준비했지만 애석하게도 장작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에단이 지나오면서 근방의 나무란 나무를 죄다 갈아 버렸기 때문이다.
잭슨이 에단을 지그시 바라봤다.
“뭐.”
“아닙니다.”
에단이 미간을 찌푸리자 잭슨은 곧바로 찌그러졌다.
에단은 몸을 움츠린 채 덜덜 떨고 있는 잭슨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혀를 찬 에단은 휴고와 렉사르를 불렀다.
“짐승 몇 마리랑 장작으로 쓸 만한 것 좀 찾아와.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
“……알겠습니다.”
“넵.”
육포나 비스킷 같은 보존식은 넉넉하게 챙겨 왔지만, 그런 것들로 끼니를 때우는 것 자체를 즐기지는 않았다.
“가자.”
렉사르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도약했다.
걷는 것만으로도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쳐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렉사르와 휴고는 아무렇지 않게 눈을 지나갔다.
마치 자신의 고향에 온 것 같았다.
둘이 순식간에 시야에 사라지자 남은 일행들 사이에 정적이 내리깔렸다.
에단의 시선이 타미에게로 향했다. 바닥에 끌리는 두꺼운 털옷을 머리까지 눌러쓴 타미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사탕 줘?”
에단의 말에 타미가 곧바로 반응했다. 고개를 들어 에단을 바라보는 눈빛이 반짝였다.
‘역시 애를 구슬리는 데에는 먹을 것만 한 게 없네.’
에단이 품에서 알사탕 몇 개를 꺼내 그중 하나의 껍질을 까려는 순간 타미가 손을 뻗었다.
“내가 할래.”
“……그래라.”
에단이 타미에게 껍질이 씌워져 있는 사탕을 건네자 타미는 신나게 만지작거렸다.
하는 짓이 썩 귀여워 에단과 잭슨 모두 피식 웃었다.
흠칫한 잭슨이 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미간을 찌푸리며 잭슨을 바라봤다.
“왜 너도 줘?”
“하하.”
잭슨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다. 에단이 품에서 사탕 하나를 건넸다. 가볍게 받은 잭슨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래.”
에단과 잭슨 둘 다 사탕을 까 입안에 집어넣었다. 사탕을 입안에 넣은 잭슨이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맛이죠?”
씁쓸하면서도 쌉쌀한 사탕의 맛은 잭슨이 알고 있는 것과는 뭔가 달랐다.
“홍삼 맛……은 아니고 그거랑 비슷한 거.”
나름 힘겹게 공수한 녀석이었다. 에단은 쌉싸름한 사탕이 입에 맞았다.
콰직.
에단이 사탕을 깨물자 사탕이 으스러지며 파편이 튀었다.
* * *
휴고와 렉사르가 빠르게 눈을 가로지르며 달려갔다.
발이 눈에 닿는 면적과 무게 중심을 컨트롤하자 눈 위를 달리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어째서지?’
휴고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란테의 영지는 따뜻한 곳이었다.
겨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북부와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의 겨울이었다.
그럼에도 휴고는 지금 달리는 눈길이 어색하지 않았다.
휴고의 기억은 블란테의 영지에서 시작되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휴고는 하인의 생활 양식들을 배워왔다.
썩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가족도 없고, 전신에 흉터가 가득한 아이를 편견 없이 대할 어른은 드물었다.
화목한 가정을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매일같이 목검을 휘두르며 기사라는 목적을 위해 정진하는 수습 기사들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도 했었다.
‘신기하네.’
휴고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여전히 흉터가 있는 손이었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탓에 머리가 휘날렸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얼굴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 허둥거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휴고는 더 이상 자신의 흉터가 드러나는 것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과거에 비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휴고는 더 이상 돌아갈 곳 없는 하인이 아닌, 어엿한 블란테의 일원이자 기사였다.
에단과 가토, 그 밖에도 인물들이 생각났다.
처음 기사 서임을 받을 때, 흥분과 긴장으로 가득 찬 가토의 얼굴이 떠오르자 웃음이 피식 흘러나왔다.
‘더 강해져야 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휴고는 혼자가 아니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블란테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많은 수습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죽어 나갔다. 에단이 분노한 이유와 블란테가 이전한 이유도 그 때문일 터.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격렬한 분노가 치미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휴고는 수습 기사나 하인들과의 유대가 없었으니까.
하아.
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만일 죽은 것이 다른 이들이었다면.
휴고가 돌아갈 보금자리가 없어졌다면.
그것을 가정하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억눌러 뒀던 야성이 흘러넘쳤다.
힐긋.
휴고의 변화를 눈치챈 렉사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휴고가 야성을 짓눌렀다.
크르르.
길어졌던 송곳니와 발톱이 사라졌다. 그러자 렉사르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순한 가정이었지만, 휴고는 컨트롤할 수 없는 격분을 느꼈다.
휴고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앞서가는 렉사르를 따라갔다.
하얗게 물들어 있던 길을 따라가자 어느덧 아름다운 설산을 마주하게 되었다.
렉사르가 먼저 설산 안에 진입했고, 휴고도 그 뒤를 쫓았다.
렉사르는 먼저 근처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들을 모았다. 눈에 뒤덮여 있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란 판단이었다.
뽀드득.
근방에서 눈이 밟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렉사의 동공이 돌아갔다. 휴고 또한 같은 것에 반응했는지 렉사르를 응시했다.
킁킁.
렉사르와 휴고가 코를 벌렁거렸다. 몬스터 특유의 코를 찌르는 누린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마 동물일 터.
렉사르가 챙기던 나뭇가지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휴고를 돌아보며 말했다.
“쫓는다.”
휴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휴고는 하루 종일 공복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타닷.
렉사르와 휴고가 멀어지는 산짐승을 재빠르게 쫓았다. 렉사르의 뛰어난 시력이 산짐승의 모습을 파악했다.
‘멧돼지인 것 같군.’
일반적인 멧돼지보다는 덩치가 상당히 비대한 녀석이었다.
‘살코기는 충분하겠어.’
렉사르가 입맛을 다셨다. 정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몬스터도 섭취하던 렉사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었다.
몬스터는 아무리 깔끔하게 손질한다고 한들 숨길 수 없는 누린내가 진동했다.
멧돼지나 사슴 따위의 대체재가 있을 경우에 몬스터는 선택지가 되지 않았다.
렉사르와 휴고가 빠른 발놀림으로 멧돼지를 쫓았다.
생존을 갈망하는 멧돼지가 전력으로 도주했지만, 둘의 추격을 떨쳐 내기는 부족했다.
쐐액!
렉사르가 멧돼지를 덮치려던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멧돼지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렉사르의 고개가 돌아갔다. 누군가 접근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렉사르는 사슬낫을 꺼내 들었다.
절그럭.
섬뜩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휴고와 렉사르의 동공이 움직였다. 기척은 느껴졌지만 아직 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뽀드득.
눈을 지르밟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렉사르와 휴고의 눈빛이 빛났다.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 장소에서 몇 명의 신형이 보였다.
“……누구지?”
가죽 외투를 둘러싼 이들이 질문했다. 질문을 들은 렉사르의 이마에 선이 그어졌다.
* * *
에단과 일행은 야영을 준비했다. 어느덧 해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날이 저물었다.
에단이 자리에 앉았다. 기감을 넓게 퍼트려 봤지만 몬스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애당초 에단의 난폭하고도 파괴적인 기운에 몬스터들은 진즉의 자리를 떴을 것이다.
“쯧.”
순식간에 깔리는 땅거미를 보며 에단이 혀를 찼다.
아직 즉위식까지는 시간이 있었으나, 이렇게 허비하는 시간은 아깝게 느껴졌다.
북부의 어둠은 이르고도 빨랐다.
에단은 어둠의 제약을 받지 않았고, 타미 또한 딱히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덜덜 떠는 잭슨의 상태는 영 위태로워 보였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잭슨이 걸친 것은 그저 적당히 두꺼운 털옷이 전부였고, 그것만으로는 지금처럼 살을 에는 혹한을 견뎌 내기에 무리가 있었다.
입술이 새파래진 잭슨이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단이 손을 뻗었다.
“배낭 이리 내.”
잭슨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으로 에단에게 배낭을 건네주었다.
잭슨의 배낭 안에는 단출한 준비물들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에단은 그중 마법이 부여되어 있는 스크롤을 하나 꺼냈다.
특출 난 마법이 부여되어 있는 스크롤은 아니었지만, 잠시 몸을 데우는 용도로는 쓸 만한 녀석이었다.
부욱.
에단이 스크롤을 찢자 스크롤에 부여되어 있던 마법이 발현되었다.
화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비록 추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온기였지만, 창백한 잭슨의 얼굴이 한껏 부드러워졌다.
잭슨은 전해지는 온기에 안도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해했다.
마법 스크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희소성이 높아 가격이 비싼 데다가, 무엇보다 이것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신경 쓰지 마.”
잭슨의 시선을 느낀 에단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정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잭슨을 이끌고 아카데미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쾅!
그 순간, 어디선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에단이 몸을 일으켜 굉음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시선을 던진 방향은 렉사르와 휴고가 향한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