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북부 (1)
“……이걸 타라고요?”
휴고가 넋 나간 표정으로 마룡을 바라봤다.
이전에 봤던 압도적인 위압감은 퇴색되었지만, 그 웅장한 크기와 그것에서 비롯된 위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맞아. 기대되지 않냐?”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휴고가 간절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러나 에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에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
“…….”
휴고의 안색이 거무무죽 하게 죽어갔다. 저걸 타고 하늘을 날아간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정을 내리는 건 에단의 몫이었고, 자신은 그걸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하아…….”
휴고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나, 타? 저거?”
반면 휴고랑 달리 타미는 마룡을 타고 간다고 하니, 꽤나 기분이 좋아졌는지 제자리에서 콩콩 뛰고 있었다.
“어. 지금 출발할 거야.”
에단이 가장 먼저 마룡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곧바로 에단의 뒷자리에 타미가 안착했다.
에단의 허리를 꼬옥 붙잡은 타미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
“…….”
렉사르와 휴고가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위에 올라타고 하늘을 날 생각을 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방도가 없었다.
망설이던 휴고와 렉사르가 마룡 위에 안착했다.
“좌표를 말해라.”
오르번이 권위적인 목소리로 묻자, 에단이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말했다.
“이걸로 가능한가?”
“내가 한 말을 잊었느냐? 나는 오래된 흑마법사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늙다리라는 걸 참 길게도 말한다.”
“……지금 뭐라 했지?”
“뭐야, 늙다리가 귀는 또 왜 이렇게 밝아.”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오르번이 섬뜩한 눈길로 에단을 노려봤다. 피식 웃은 에단이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시간 없어. 슬슬 출발하지?”
“쯧.”
오르번이 지팡이를 지면에 내려찍었다.
쿵.
작은 파문이 일며 감고 있던 마룡의 눈이 부릅떠졌다.
쿠구구구구.
드래곤이 거대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아.”
타미는 신이 났는지 발을 흔들었고, 하얗게 질린 렉사르와 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에단은 히죽 웃으며 오르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간다.”
“빨리 꺼져 버려라.”
마룡의 거대한 날개가 펴졌다.
드래곤의 무거운 몸은 날개로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르번이 욱여넣은 술식이 드래곤 하트를 대신해 마나를 운용했다.
“부족한 마나는 네가 보충하거라.”
“그쯤이야.”
후웅!
날갯짓 한 번에 거친 광풍과 함께 흙먼지가 휘몰아쳤다. 그리고 마룡의 몸에서 죽은 마나가 흘러나오며 기묘한 부력감에 휩싸였다.
“으아아악!”
마룡이 순식간에 공중에 떠올랐다. 휴고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누가 보면 곤란하니까 최대한 높이 올라가자고.”
에단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마룡이 하늘을 향해 끝없이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구름까지 넘어서자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후우웅―!
에단이 마룡을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자칫하면 바닥에 떨어질 것 같은 풍압을 느꼈기 때문이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속도였다. 오르번이 자신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하하!”
에단이 소리 내어 웃었다. 간만에 느끼는 상쾌함이었다. 여객기나 전용기는 수도 없이 탔지만 지금 겪는 경험과는 차원이 달랐다.
강렬한 바람이 피부를 스쳐 지나갔다. 에단이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 * *
황제가 죽은 당시.
크리스토는 황제를 찾아갔다. 황제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크리스토는 누워 있는 황제를 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의 실권은 이미 1황자인 크리스토의 손에 떨어졌다. 황제는 모든 권력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
크리스토의 말에도 황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황제는 지금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조금 실망했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꽤 즐거웠습니다. 이제 그만 편히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보다도 더 즐거운 것을 찾아버렸거든요.”
마지막 말을 내뱉은 크리스토는 이질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황제의 침실.
이곳에는 크리스토와 황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의 근위 기사들은 모두 크리스토가 제거하거나 흡수했다.
황제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 또한 크리스토의 여흥일 뿐이었다.
스릉.
크리스토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황제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하얀 침상에 붉은 피가 피어올랐다. 크리스토가 검을 뽑자 얼굴에 피가 조금 튀었다.
옷소매로 피를 대강 닦은 크리스토는 검집에 검을 밀어 넣었다.
뚜벅.
크리스토가 몸을 돌렸다. 친부를 죽였음에도 크리스토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침실의 문을 열자 근위 기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크리스토를 지켜보고 있었다. 크리스토는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가 암살당했다. 범인을 잡아.”
크리스토의 명령에 고개를 숙인 근위 기사들이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크리스토는 근위 기사들을 지나 복도를 걸었다.
‘한 명이 남았나.’
크리스토의 입가에는 아직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황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일파만파 퍼졌다. 황성에서 종사하는 일원들은 주동자이자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감히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간 큰 이는 없었다.
황성의 알현실. 호화스러운 옥좌에 크리스토가 앉아 있었다.
넓은 알현실에 아무도 없이 홀로 고독하게 앉아 있는 크리스토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팔걸이에 기댄 채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는 크리스토.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쾅!
굉음과 함께 알현실의 거대한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알렉스가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크리스토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 인사가 꽤나 격렬한데?”
크리스토가 감탄한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봤다. 알렉스는 그 시선이 불쾌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알렉스의 뒤편에는 알현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자네 설마 저들을 죽인 건가? 우리는 그쪽이랑 달리 기사들이 꽤나 고급 인력이라서 말이야.”
“……지금 나랑 농담을 하자는 건가?”
“농담이라니. 그것참 서운한 소리를 하는군. 내가 왜 자네에게 그런 쓸데없는 농을 던지겠는가? 기사가 부족한 건 엄연한 사실인데 말이야.”
크리스토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알렉스를 바라보자, 알렉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는지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죽이지는 않았다. 아직은 말이야.”
“오, 그것참 고마운 일이군. 죽지만 않았으면 된 거지.”
크리스토가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알렉스를 응시했다.
“그나저나 가뜩이나 바쁠 텐데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하,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우리 사이에 질문이라는 단어는 너무 딱딱하지 않나? 그냥 친우 간의 만담 정도로 하면 어떨까 싶은데.”
“친우? 지금 친우라고 했나?”
알렉스에게서부터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기사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마스터의 경지. 거기에 오른 이답게 기세를 방출하는 것만으로도 장내가 진동했다.
하지만 살갗이 베일 것 같은 살기 속에서도 크리스토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이런, 친우라고 생각했던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이것 참 섭섭한 일이군. 혹시 내가 뭔 실수라도 했나?”
“……너 같은 놈을 믿은 게 내 실책이다. 협력 관계는 오늘부터 끝이다. 그리고 나는 가문이 입을 피해를 배상받아야겠어.”
“배상? 그것참 이상하군. 자네 가문이 입은 피해를 대체 왜 우리가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지? 참 재미난 소리를 다 듣는군.”
“지금 내가 농담을 하는 것으로 보이나?”
“농담이 아니었나?”
“그 여유로운 웃음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궁금하군.”
알렉스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맹렬한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팽팽한 긴장감이 내리깔렸다.
“아, 내가 웃는 게 보기 싫었나 보군. 또 사과해야겠어. 허 참, 오늘 사과할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네.”
크리스토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기지개를 켜듯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했다.
알렉스는 말없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크리스토를 노려보고 있었다.
“꽤나 심기가 안 좋은 거 같은데, 검이나 한번 맞대 보겠는가?”
크리스토가 검을 뽑아 들었다. 뽑아 든 검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허.”
알렉스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크리스토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지금 그 말 진심인가? 진심으로 그 알량한 실력이 내게도 통할 것이라 생각한 거냐?”
“그럴 리가. 내 미천한 실력이 어떻게 자네같이 고강한 기사에게 닿을 수 있겠나. 하하, 어림도 없는 소리지. 자네가 그래도…… 블란테의 주인을 제외하고는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가 아닌가? 아, 첸 경도 있었군. 그 발언은 잊어 주게.”
히죽.
크리스토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알렉스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억누르고 있던 살기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크리스토는 그의 역린을 건드렸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소원대로 해 주지.”
크리스토가 검술에 있어 뛰어난 소질을 보인다는 것?
알렉스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토의 나이는 고작해야 이십 대 중반에 불과했다.
그 나이대라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마스터의 경지에는 오를 수 없었다.
선택받은 자라고 불리는 마스터의 경지는 하늘이 내려 준 재능과 함께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노력, 그리고 수많은 실전과 함께 사선을 건너야만 간신히 발을 들일 수 있는 경지였다.
크리스토는 재능이 있었지만, 나태했고, 오만했다.
한 집단의 가주이며 전설적인 검술 명가인 블란테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가받는 알렉스는 수많은 천재들을 경험했다.
“너 따위의 천재는 세상에 차고 넘친다.”
우러러보는 하늘 위에는 또다시 하늘이 펼쳐지는 법이다. 알렉스는 그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좌절. 절망.
그리고 무릎 꿇은 자신의 앞에는 검은 정복을 입은 기사가 서 있었다.
머리가 하얘질 만큼 강렬한 분노가 치밀었다.
빠드득.
이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알렉스가 뽑아 든 검에서 시퍼런 오러가 흘러나왔다.
“이거 모골이 송연해지는구먼.”
알렉스의 폭력적인 기세 앞에서도 크리스토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크리스토가 대충 허공에 검을 휘두르다가 알렉스를 향해 검을 겨눴다.
“한 수 배우지.”
씨익.
크리스토가 미소 지었다. 그 순간 크리스토의 검에서 푸른 오러가 솟구쳤다.
콰가가가!
농축된 마나의 기운이 불타오르듯 피어올랐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 본 알렉스의 눈이 터질 것처럼 부릅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