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이것 봐라? (2)
“……진짜 뒈지겠네.”
잭슨이 벌벌 떠는 몸을 붙든 채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보였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서러웠다.
지금 잭슨이 가지고 있는 건 두꺼운 털옷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털옷이 유의미한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북부의 냉기는 털옷을 뚫고 피부를 찔렀다.
“제, 제기랄…….”
이빨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본래라면 이렇게 먼 거리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넉넉한 지원금을 받았겠지만, 메이에게 찍혀 있는 잭슨은 거의 빈손으로 북부로 올라왔다.
결국 얼마 없는 자금으로 살 수 있는 건 북부 쪽 현지인들이 입은 털옷 한 벌.
보온 마법이 걸려 있는 장비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앞으로 한 발짝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이 두껍게 쌓인 눈 속에 푹푹 빠졌다. 거동조차 쉽지 않았다. 이제는 마을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칫하면 진짜 죽겠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잭슨은 경험 많은 정보원이었지만, 온통 하얀색으로 점철되어 있는 설산에서까지 길을 찾는 능력은 지니지 못했다.
잭슨이 깊은 좌절에 빠져 있을 때, 가방 안에 넣어 둔 수정구에서 신호가 왔다.
두꺼운 털옷 탓에 움직임의 제약이 많던 잭슨이 수정구를 꺼냈다.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자, 메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추위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잭슨이 뾰로통한 얼굴로 메이를 바라봤다.
― 어떻게 진척은 좀 있으신가요.
“……아직 없습니다.”
― 벌써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아예 성과가 없단 말씀입니까?
메이의 질책에 잭슨이 살짝 움찔거렸다.
“아시다시피 수인들이 워낙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생활하는지라…….”
― 흐음…… 변명은 그다지 듣고 싶지 않군요. 어차피 책임을 지는 것은 제가 될 테니까요.
“……죄송합니다.”
― 괜찮습니다. 지금 그분이 그쪽으로 향한다고 하네요. 수정구의 연결을 끊지 말고 계세요.
“네? 그분이 누구길래…….”
― 에단 님입니다.
“아…….”
잭슨이 탄식을 흘렸다. 그에게 있어 에단이란 존재는 상당히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한데 이쪽으로 오기가 꽤나 쉽지 않을 텐…….”
잭슨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쑤우우욱!
하늘에서부터 시작되는 소음.
당황한 잭슨이 고개를 들었다. 잭슨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하고 벌렸다.
“저, 저게 무슨…….”
쐐애애애애액!
거대한 무언가가 낙하하고 있었다. 잭슨이 질겁하며 얼굴을 가렸다.
쾅!
거대한 충격과 함께 굉음이 일어났다. 두껍게 쌓인 눈더미들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잭슨은 질끈 감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에단 님?”
잭슨의 앞에는 에단과 함께 몇 명의 무리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다?”
에단이 잭슨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 * *
잭슨을 만나기 며칠 전.
에단은 오르번에게 수인들의 위치를 특정받은 후 렉사르와 휴고, 타미를 소집했다.
에단의 집무실에 셋 모두가 들어왔다. 렉사르는 말없이 형형한 눈을 빛냈고, 휴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타미는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에단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에단이 모호한 표정으로 타미를 바라보다가 뭔가가 떠올랐는지 호주머니를 뒤졌다.
“옛다.”
비닐에 싸여 있는 사탕을 받아 든 타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렉사르는 묘한 표정으로 타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부럽냐?”
“……아닙니다.”
“부러우면 너도 사탕 좀 챙겨 다녀. 얼굴이 그렇게 험악해서야 애들이 좋아하겠어? 쯧쯧.”
렉사르가 기막힌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됐고, 그럼 슬슬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저번 일들은 수고 많았다. 특히 렉사르…… 큭큭큭, 연기가 아주 기깔나던데.”
“…….”
수치심을 느낀 렉사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기억이었다.
휴고는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삐져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웃음을 참는 휴고를 향해 렉사르가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라오나드가 죽고, 신성 왕국의 입지가 많이 좁아졌어. 북부를 틀어쥐던 패권이 옅어졌다는 의미기도 하지. 아마 상황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야.”
“…….”
“조금 안심해도 될까 싶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걸 터트렸네?”
에단이 책상 위에 있던 서신을 흔들었다. 렉사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뭡니까?”
에단이 종이를 뒤집자 제국의 직인이 새겨져 있었다.
“황제가 타계했어. 그리고 한 달 뒤, 1황자의 즉위식이 있지.”
“……!”
충격적인 소식의 렉사르의 눈이 커졌다.
“그것뿐이 아니야. 카이제르의 가주 알렉스가 죽었어. 뭐, 대충 짐작할 수는 있겠지? 아마 1황자의 짓일 거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겠군요.”
“그래.”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가진 패는 아직 남아 있어. 용사도 있고, 정통성을 지닌 2황자도 있지. 하지만 이미 실권을 틀어쥐고 있는 1황자가 즉위식을 강행하면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 이번 사건을 통해 신성 왕국은 제대로 짓밟을 수 있었지만, 제국은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했어. 전쟁을 벌인다면…… 승산은 있다고 보지만, 선전포고를 하기는 힘든 상황이지. 아직 우리는 명분이 부족해.”
“……저희가 뭘 하면 됩니까.”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지?”
에단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복수라는 말에 렉사르의 눈이 깊어졌다.
“지금 너에 대한 비밀을 말해 주지. 그리고 지금이 그 복수를 할 적기야.”
“……알겠습니다.”
렉사르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최대한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확실한 정보는 아니야.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들도 전부 추측에 불과하지. 정확한 정보는 추후에 따로 검증해야 해. 그래도 상관없나?”
“상관없습니다.”
“그래. 먼저…… 렉사르 너는 인간이 아니다. 대충 알고 있었겠지?”
갑작스럽게 던져진 말에 흠칫한 렉사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진 기억은 언제부터?”
“어린 시절의 기억은 없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블란테의 뇌옥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가 처음 발견된 것은 신성 왕국의 지하실이었다고 하더군.”
“……지하실 말입니까?”
“그래. 지하실.”
에단은 천천히 빈센트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에단이 태어난 직후의 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스.
블란테의 안주인이자 에단의 친모인 엘리스는 병을 앓았다. 진귀한 포션을 아무리 들이부어도 호전되지 않는 병이었다.
수많은 의사를 불렀다. 대륙을 뒤지며 뛰어난 명의를 불러 봐도 병의 진단조차 내리지 못했다.
빈센트는 분노했다. 엘리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쇠약해지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깊은 절망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빈센트는 간절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치료법을 찾아다녔다. 선조 때부터 쌓아온 재화를 쏟아부으며 의사들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부른 의사가 빈센트를 향해 말했다.
― ……이건 병이 아닙니다.
― 그게 무슨 소리지? 병이 아니라고? 병이 아니라면 어째서 아내의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안 좋아진다는 말이냐!
―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다른 의사들 역시 병명을 규정하지 못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건…… 병이 아닌, 저주입니다.
의사의 말에 빈센트는 곧장 채비를 갖췄다. 대륙의 변두리에 있는 블란테와 신성 왕국과의 거리는 극과 극이었다.
늦지 않게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갖춰야 했다.
그리고 신성 왕국에 도착한 빈센트는 아내를 잃고, 신성 왕국과 완전히 척을 지는 사건이 생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종의 협약을 맺는다.
“녀석들은 뭔가를 꾸미고 있다. 그리고 그 타깃은 수인이 대부분이었고. 휴고, 그래서 너의 존재가 조금 이상한 거야.”
갑자기 지목을 받은 휴고가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크게 떴다.
“……제가요?”
“어. 렉사르는 그날 아버지가 구출한 녀석들 중 하나였지만, 너는 전혀 관계성이 없거든. 과거에 대한 기억은 없나?”
“어…… 저도 잘…….”
휴고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에단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거 같았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녀석들이 정확히 뭘 연구하는지, 아버지가 신성 왕국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구체적인 협약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어.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걸 듣는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으니까.”
“……뭐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죠?”
렉사르의 물음에 에단이 히죽 웃었다.
“우리가 신성 왕국을 개박살 낼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왜? 이제 와서 겁나나?”
잠시 얼이 빠진 표정을 짓던 렉사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샛노란 안광이 빛을 품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오히려 흥분이 주체가 안 되는군요.”
“그래, 잘됐군. 하지만 무턱대고 블란테의 인원들을 움직일 수 없어. 그렇게 나가면 곧바로 대륙에 피바람이 불 테니까. 그렇다고 한 국가를 상대로 고작 이 인원으로 대적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에단은 렉사르, 휴고, 타미를 스윽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에겐 승리뿐만이 아닌, 명분도 필요해.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수인들을 찾아야지.”
“……방법이 있습니까?”
에단이 렉사르를 향해 지도를 던졌다. 수인들이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빨간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곳은…….”
“그래, 북부야. 하필 더럽게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 근방에 가면 타미가 찾을 수 있다고 말을 하긴 하는데…… 가능하겠어?”
타미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할 수 있어.”
“좋아, 그럼 채비를 갖춰. 알다시피 시간이 없어. 왕국의 즉위식까지 얼마 안 남았거든? 그 전에 수인들을 이끌고 복귀할 거야.”
“불가능합니다. 북부 쪽에는 게이트 마법진도…….”
불가능하다는 렉사르의 반박에 에단이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봤다.
“내가 진짜 불가능하면 말을 꺼냈겠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채비나 갖춰. 더럽게 춥다고 하니까. 출발은 한 시간 뒤. 해산해.”
에단은 곧장 오르번을 찾아갔다. 확실히 오르번의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절반이 소실된 드래곤이 어느새 제 형체를 되찾았다.
이전에 봤던 압도적인 위용의 마룡에는 손색이 있었지만, 마룡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비주얼도 충분히 충격 그 자체였다.
“얘 좀 빌리자.”
“……지금 나랑 장난하나?”
“아니, 내가 뭐 나 달래? 그냥 좀 빌려달라고. 그쪽도 알잖아 시간 없는 거.”
“허,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군.”
“지금 입에서 나오는 건 말이 아닌가? 어차피 시험 삼아 움직여 봐야 하잖아. 테스트에는 장거리 비행만 한 게 또 없지.”
에단이 마룡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설마, 이 녀석 보기랑 다르게 느리냐?”
“……나를 뭘로 보는 거지?”
오르번이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찍자 마룡의 눈이 번뜩였다. 거대한 눈동자가 에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타라. 스피드가 뭔지를 보여 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