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화] 이것 봐라? (1)
이것 봐라?
서신을 읽은 에단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 황제를 처리하고 크리스토가 그 자리를 차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반발을 찍어 누를 자신이 있다 그건가?’
1황자가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를 암살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지금처럼 여론이 안 좋을 때 황제를 암살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 1황자를 따르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많은 말이 나올 것이다.
1황자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강행했다.
‘위기감인가?’
원작에서 크리스토는 끝까지 1황자의 자리를 고수한다. 그건 그의 여흥이자 자존심이기도 했다.
‘꽤나 마음이 급했나 본데.’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사실이었다.
만일 입장을 바꿔 자신이 지금과 같이 몰렸다면 에단의 선택도 크리스토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제르의 가주, 알렉스의 죽음은 정말 뜻밖이었다. 대륙에 몇 없는 마스터의 자리에 오른 이의 죽음.
‘연관이 있겠어.’
시기가 절묘하다. 여기에서 연관성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머저리나 다름없었다.
“강수를 뒀네.”
재밌었다.
그래, 이렇게 순순히 밀려나기만 했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에단이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연결 대상은 메이였다.
마나를 불어넣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메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에단을 만날 때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메이.”
― 네, 에단 님.
에단을 바라보는 메이의 눈에는 미약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에단은 그녀의 눈빛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소식은 들었겠지?”
에단이 수정구 앞에 황제의 직인이 새겨진 서신을 흔들었다. 그것을 바라본 메이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저희도 방금 전해 들었습니다. 이건…… 저희의 예상보다 더욱 과격한 행보군요.
“그래. 나도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 무슨 짓이든 벌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에단이 피식 웃었다.
“설마 알렉스를 이렇게 죽여 버릴 줄은 예상 못 했네.”
― ……확신하시는군요.
“딱 보면 몰라? 그래도 마스터를 이렇게 손쉽게 죽일 줄은 몰랐는데.”
― ……1황자, 아니, 황제에 대한 정보를 수정해야겠습니다.
“아직 황제는 이르지. 그렇게 평화롭게 옥좌에 앉게 해 줄 생각은 없어.”
에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적어도 발목은 붙들고 늘어져 봐야 하지 않겠어?”
에단은 1황자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 * *
대공사가 끝나고 아카데미의 수업은 체계화되었다. 검술에만 치중되어 있던 이전과는 다르게, 마법, 정령, 그 외의 학문들까지.
여러 수업의 수준과 질들이 모두 상승했다. 교직원들은 대거 보충되었고, 더 이상 높은 업무 강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드레이는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제 완전히 용사라는 지위에 앉은 드레이는 더 이상 학생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었다.
교직원도 학생도 아닌, 용사의 자리.
“하앗!”
드레이가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가토를 향해 달려들었다. 드레이를 지켜보는 가토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쐐액!
목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유려한 검의 궤적.
드레이의 검술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툭.
가토의 목검이 드레이의 손목을 가볍게 쳐냈다. 매서운 흐름이 순식간에 끊겼다. 드레이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기세는 좋으나, 너무 정직합니다.”
파바박!
가토의 검이 드레이의 가슴팍을 여러 차례 찔렀다. 흐름이 끊긴 드레이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크윽…….”
드레이가 찔린 가슴팍을 만지며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래도 훌륭합니다. 실력은 상당히 많이 늘었습니다.”
가토의 말은 진심이었다. 드레이도 자신의 실력이 처음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드레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직입니다.”
드레이의 눈빛은 꺼지지 않았다. 투지가 재점화했다. 이글거리는 드레이의 눈빛을 본 가토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투지는 합격이군요.”
가토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블란테가 이전하면서 교직원들이 대거 보충되며 여러 교육과정이 생겨났고, 빡빡하던 가토의 일정도 많은 여유가 생겼다.
가토가 수업에 참여하는 빈도도 많이 적어졌다.
이제 가토의 일과는 개인 훈련과 더불어 드레이를 전담 마크해 지도하는 것이었다.
가토는 드레이를 지도하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용사 드레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막강한 무력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그는 충분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아직 가진 재능을 모두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군.’
넘치는 투지, 뜨겁게 달아오른 몸과 머리.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가 뜨거워지면 시야가 좁아지며, 생각이 자유롭게 되지 않았다.
정직함은 승리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실전에서는 찰나의 순간에 생사가 갈리고 승자와 패자가 결정지어진다.
검을 뽑아 든 이상,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만 했다.
“싸움은 교활해야 합니다.”
자고로 검술은 교활하며 교묘하다.
상대를 속이고 기만할 줄 아는 것이 곧 실력이며 기교였다.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머리를 식히십시오.”
가토의 눈이 스산한 빛을 품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제 몸에 당신의 검이 닿을 리는 없을 겁니다.”
“…….”
드레이는 굳은 표정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방금 대련으로 터져 나간 손아귀가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드레이가 뿜어내는 치유의 힘은 그 어떤 사제보다 뛰어났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결의에 찬 드레이의 눈.
가토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가토가 다시 자세를 취했다.
‘나도 많은 걸 배우는구나.’
가토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드레이가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쏜살같이 달려온 드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사선을 그리는 궤도를 보자 가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과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묘한 실망을 품으려고 할 때 가토는 드레이의 눈을 봤다.
드레이의 눈빛에서 노림수가 느껴졌다. 그것을 보자 가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탁!
가토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드레이의 목검을 쳐냈다.
‘한번 봐 볼까?’
궁금증이 일었다. 어떤 속셈을 꾸미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 기분이었나.’
문득 대련할 때 보였던 에단의 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이 무언가를 시도할 때 에단은 언제나 웃음기를 머금었다. 가토가 피식 웃으며 드레이에게 목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드레이의 기류가 바뀌었다.
쩌엉―!
신성력이 폭발했다. 가토가 재빠르게 마나를 끌어올려 몸에 둘렀다.
가토가 뒤로 밀려난 순간 드레이가 가토에게 달려들었다.
후우.
드레이가 숨을 토해 냈다. 흥분을 가라앉혔다. 흥분하면 자세가 흐트러진다.
앞발을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군더더기 없는 경쾌한 움직임이었다.
쑤욱.
순간 가토의 신형이 사라졌다. 드레이가 눈을 부릅떴다.
팍!
“……뭣!”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충격과 함께 몸이 기울어진다. 다급하게 고개를 내려 보니 가토가 아래쪽에서 스산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시도는 좋았습니다만 조금 안일했군요. 아직은 연기가 미숙합니다.”
뻐억!
가토의 손바닥이 드레이의 턱을 후려쳤다. 뒤로 넘어가는 드레이가 눈을 까뒤집었다.
털썩.
“후우.”
드레이가 쓰러진 걸 확인한 가토가 두 손을 털며 힐긋 드레이를 바라봤다. 방금은 꽤나 위험했다.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당분간은 일어나기…….”
꿈틀.
순간 가토의 눈이 커졌다. 드레이의 몸이 움찔거렸기 때문이다.
“……아직입니다.”
드레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드레이는 몸을 일으키는 것도 힘들어했지만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후우.
드레이가 끈적한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입가에 묻은 피를 옷소매로 대충 닦아 냈다.
“…….”
가토는 멍하니 드레이를 바라보다가 검을 들었다. 가토의 입꼬리가 주욱 찢어졌다.
* * *
에단은 오르번을 찾아갔다.
오르번은 그 일이 끝난 이후, 다시 늪지로 돌아가려고 하던 걸 에단이 만류했다.
오르번은 에단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려 했지만, 에단은 드래곤의 사체를 내걸었다.
절반이 손실되었다고 한들 그래도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다.
세상에 미련을 버린 것처럼 굴던 오르번의 눈에 미약한 욕망이 깃들었다.
고민하던 오르번은 결국 에단의 제의를 승낙했다.
에단은 오르번을 위해 마룡을 제작하던 창고를 그대로 넘겨주었다.
혹여 실수로라도 누군가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마법진을 깔아 뒀다.
하지만 에단은 따로 술식에 영향을 받지 않게끔 받은 아이템으로 무리 없이 연구실로 들어섰다.
“들어간다.”
“……무례한 놈.”
창고의 앞에 선 에단이 말하자, 틱틱거리는 오르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식 웃은 에단이 들어섰다.
창고 안에 들어선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악취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창고 안에는 여러 기괴한 마법진과 처음 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마법진 위에는 드래곤의 사체가 잘게 분해되어 올라가 있었다.
“취향 한번 고약하군.”
“흑마법사에게 뭘 바라는 거지?”
“음…… 청결?”
“허.”
오르번이 기가 막힌다는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한 에단이 본론으로 돌아갔다.
“황제가 죽었어. 그리고 카이제르의 가주도 죽었지.”
“……호오.”
에단이 가지고 온 소식에 오르번이 관심을 보였다. 그만큼 상황이 급작스러웠다.
“뭐, 딱 봐도 1황자가 저지른 일이겠지. 그리고 보란 듯이 이걸 보내던데.”
제국의 직인이 찍혀 있는 서신. 서신을 받아든 오르번이 내충 내용을 훑었다.
“초대장이군.”
“맞아. 정확한 의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좀 아니꼬와서 말이야.”
“성격 한번 고약하군.”
오르번의 반응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럼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그건 그렇지.”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둘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별건 아니야. 당장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정도로 전쟁광은 아니라서.”
팔짱을 낀 채 주위를 훑어보던 에단이 말을 이었다.
“정보. 정보가 필요해. 원래라면 느긋하게 진행할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어. 수인 녀석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그걸 나한테 묻는 이유는?”
“너 말고는 알 녀석이 없을 것 같아서.”
“재수 없는 놈.”
인상을 찌푸리며 에단을 노려본 오르번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나도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봤던 기억도…… 상당히 오래되었으니.”
“충분해.”
“……지도를 가져와라. 대충 짐작 가는 위치를 알려 주겠다.”
“당연히 준비해 왔지.”
에단이 품에서 지도를 꺼내 오자 오르번의 얼굴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재수 없는 놈.”
“칭찬 고마워.”
에단이 능글맞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