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해보자고 (3)
아카데미의 충격적인 발표.
대륙민들의 반응은 불같이 타올랐다. 어느 여관이나 주점을 가더라도 대화 내용은 블란테와 성자, 그리고 아카데미에 관한 것들이었다.
에단은 곧장 움직였다. 흐름을 탔을 때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에단은 게이트 위에 올라 곧장 블란테의 영지로 향했다.
‘뛰는 것도 이제 지겹군.’
가파른 경사를 본 에단이 피식 웃었다. 가볍게 발을 통통 구른 에단이 산을 질주했다.
순식간에 영지에 도착한 에단이 정문을 지나 곧장 빈센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들어와라.”
에단의 기척을 느꼈는지 문 너머에서 빈센트의 음성이 들려왔다. 에단은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집무실 안에 들어섰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빈센트가 눈을 빛내며 에단을 바라봤다.
“소식은 들었다.”
“그렇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깔렸다. 에단은 말없이 빈센트를 바라만 봤다. 마치 감상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건방진 놈.”
빈센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단은 뒷짐을 진 채 피식 웃었다.
“내 생각보다 일을 크게 벌였더구나.”
“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어중간해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책은 느끼지 않느냐?”
대륙 전체를 기만한 것에 대한 가책.
“글쎄요.”
에단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 이질적이면서도 기괴한 모습에 빈센트는 묘한 오싹함을 느꼈다.
“저는 증명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아버지께서도 움직이셔야 할 겁니다.”
“……그래. 그게 블란테의 방식이지.”
빈센트가 몸을 일으켰다. 마치 산을 보는 것 같은 거대한 위압감이었다.
“기사들과 영지민들을 소집해라. 중대한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 * *
영지민들과 기사들이 모였다. 빈센트는 단상 앞에 올라갔다.
별다른 말 없이 단상에 올라온 것만으로도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었다.
의도적으로 기백을 표출한 것도 아닌, 자체적으로 뿜어내는 위압감으로도 모든 이를 압도했다.
“본론부터 말하지.”
맹수의 울음소리 같은 음성.
기사들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빈센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블란테는 오늘부로 영지를 떠난다. 그리고 후계자를 발표하겠다. 올라와라.”
빈센트가 에단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고개를 끄덕인 에단이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그러고는 단상 위에 올랐다.
빈센트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이면서도 갑작스러운 발언.
기사들과 영지민들의 눈이 커졌다. 에단은 저들이 당혹감을 벗기 전에 기세를 끌어올렸다.
서서히 강해지는 피어의 기운.
모든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드래곤의 피어는 사람의 심령을 건드린다. 에단은 정신력이 약한 영지민들에게는 피어를 조절했다.
하지만 기사들에게는 피어를 조절하지 않았다. 무릎 꿇을 이는 꿇고, 기절할 일은 기절하라는 듯이,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다.
포악하고 패도적인 기세. 기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왜? 나 같은 망나니가 차기 가주라고 생각하니 막막하나?”
에단이 차게 식은 눈으로 기사들을 응시했다.
살기나 적의를 표출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미건조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을 뿐.
“아니꼬워하는 것도 이해한다. 그래, 나 같아도 허구한 날 패악질을 일삼던 쓰레기가 가문의 후계자가 된다면 배알이 뒤틀릴 것 같아.”
피식.
에단이 코웃음을 치며 기사들을 노려봤다. 기세가 강해졌다.
에단의 피어가 포악하게 날뛰었다. 기사들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우리 가문이 어떤 점에 있어서는 더럽게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걸 뛰어넘는 가훈이 있잖아?”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꼬우면 덤벼. 한 번에 덤벼도 상관없어. 내가 가주 자리에 오르는 게 싫나? 그러면 힘으로 증명해.”
쿠구구구구.
기운이 더욱 거세진다. 에단은 기사들을 바라봤다.
기사들은 아직 에단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부릅뜬 눈으로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단은 저 호기로움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에 피어를 거두지 않고 더욱 강하게 꺼내 들었다.
에단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왔다. 더 이상 막무가내로 기세를 표출하는 게 아닌, 뽑아낸 기세를 날카롭게 다듬을 줄 알았다.
“덤비지 않고 뭐 해?”
에단이 이죽거리듯 말했다. 점차 강해지는 기운에 몇몇 경지가 낮은 기사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하나둘씩 픽픽 쓰러진다.
에단은 멈추지 않았다.
점차 기사들의 눈이 내려간다. 더 이상 에단을 마주 보거나 노려보지 못했다.
에단은 모든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고, 자진해서 서열을 받아들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에단의 의도는 명백했다.
뒈지기 싫으면 눈 깔아.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기세에 결국 모든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에단의 기운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빈센트가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단은 빈센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과하구나.”
“죄송합니다.”
에단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전혀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빈센트가 황당한 미소를 머금더니 검 한 자루를 에단에게 건넸다. 언뜻 보면 수수해 보이는 검은 검.
에단은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받았다.
“너는 오늘부터 블란테의 차기 가주다.”
빈센트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영지에 퍼졌다.
* * *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영지의 청년들이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촌장은 청년의 불만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이 마을이 전부 블란테의 것입니까? 저희의 고향은 이 마을이라고요! 어떻게 저희랑 상의도 없이…….”
“이미 결정된 일이다.”
“그러니까 그 결정을 어째서 촌장님 혼자서 하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블란테의 결정을 따를 뿐이다. 그동안 많은 신세를 입으며 살았어. 블란테라는 방패가 없다면 우리는 이 척박한 곳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
청년은 인정하기 싫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촌장의 얼굴은 이미 결단을 마친 자의 것이었다.
“……저는 그래도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애당초 그 망나니가 차기 가주인 것부터가 말이 안 됩니다. 무슨…… 망나니 따위가…….”
“당시에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떠드는구나.”
“…….”
“가주의 결정이다. 기사도 반박하지 못했지. 우리는 아무 힘 없는 영지민일 뿐이고. 최대한의 배려를 받아 이주할 것이다.”
“그 말을 믿는단 말씀입니까?”
“그래, 나는 믿는다. 차기 가주…… 그분은 이제 망나니 따위가 아니야. 대업에 도움을 주지 못하겠지만, 방해가 될 생각은 없다.”
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청년은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채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에단은 산 중턱에서 사태를 관조하고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은 에단도 이미 예견하고 있던 것이었다. 평생을 살아온 고향이다.
가주의 말이 곧 율법이나 다름없는 기사들과 달리, 영지민들에게 이주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고, 에단은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데리고 오기를 잘했군.’
에단이 품에서 주먹만 한 돌멩이를 꺼냈다. 아카데미에서 챙겨온 돌멩이였는데, 이 돌 안에는 영혼들이 깃들어 있었다.
이전에 에단이 풀어 준 지박령들을 돌멩이 안에 종속시킨 것이었다. 오르번의 작품이었다.
에단은 돌멩이를 바닥에 묻었다. 그러고는 망령들을 불렀다.
“나와.”
스스스.
망령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에단을 바라보는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너희가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지?”
에단이 싸늘한 눈초리로 망령들을 응시하자, 망령들이 거칠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좀 하라고. 안 그러면 그냥 소멸하는 걸로는 안 끝날 줄 알아.”
섬뜩하기 그지없는 경고에 망령들이 울상을 지었다. 이 돌멩이에 종속되어 있는 이상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만일 어떻게 될지 궁금하면 말해. 직접 보여 줄 테니까.”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에단의 눈.
망령들이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 목숨을 걸고 하겠습니다.”
“이미 죽은 녀석들이 무슨 목숨을 걸어?”
에단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날부로 마을에서는 매일같이 귀곡성이 울려 퍼지고, 이주에 반대한 청년은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끔찍한 악몽을 꾸고, 괴현상을 겪은 청년은 결국 자신의 고향인 마을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이주에 찬성하게 되었다.
* * *
한 영지의 이전.
아카데미는 분주하게 공사를 시작했다. 넓은 부지를 지닌 아카데미였지만, 블란테의 인원을 모두 수용하려면 확장이 불가피했다.
블란테의 이주 발표에 세간이 또 한 번 떠들썩해졌다.
이전이었다면 여론이 매우 안 좋아지고 대륙 전체가 반발에 나섰겠지만, 지금 블란테의 평판은 매우 좋은 편에 속했다.
이주를 발표했음에도 비판과 비난은커녕 응원한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작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실력으로만 따지면, 대륙에서 따라올 이들이 없는 장인들이 직접 움직였기 때문이다.
블란테의 야장들과 드워프들은 건축에 매우 뛰어난 소질을 지니고 있었다.
저번 일로 인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한니발이 자재들을 공수해 왔다. 모두 최상급의 자재들이었다.
아카데미가 화려하게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대륙 전체의 공동 소유였던 취지와 어긋나게 한 집단의 소유물로 전락했지만, 학생들과 대중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당장 수업과 삶의 질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블란테가 이주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탑 또한 이주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법 가문으로 유명한 아큐르도 아카데미와의 전폭적인 교류를 선언했다.
한순간에 대륙이 뜨거워졌다. 이제는 부동의 원탑인 검술 명가 블란테와 두 마법집단이 아카데미와 함께한 것이다.
미지근했던 반응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아카데미의 입학을 희망하는 지원생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영지민들 잘 자리 잡을 수 있게 하고, 취업을 희망하는 애가 있으면 알아서 필요한 만큼 뽑아.”
“알겠습니다.”
에단은 자잘한 일들은 한니발에게 모두 일임했다.
수많은 직원을 휘하에 둔 한니발의 수완은 에단도 인정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계획했던 것들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에단은 묘한 꺼림칙함을 느꼈다.
‘너무 순조로워.’
조용했다.
신성 왕국은 소통을 차단한 채 잠적했고, 카이제르와 제국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이상했다. 에단이 알고 있는 크리스토라면 결코 당하고만 있을 녀석이 아니었다.
이빨에 가시가 낀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이 지속되었다. 공사는 순식간에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입을 다물고 있던 제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타계, 그리고 새로운 황제의 즉위.
크리스토의 즉위식이 대륙에 발표되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카이제르의 가주, 알렉스가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