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해보자고 (2)
에단이 주도했던 작전이 종료되고, 제국과 카이제르, 그리고 신성 왕국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셋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신성 왕국이었다.
믿음과 신앙이라는 신성 왕국을 지탱하던 뿌리가 흔들릴 정도였다.
명망받던 성기사단장 라오나드의 사망과 성녀의 납치.
아니, 이제 그녀를 성녀라고 부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사라진 성녀를 마녀라고 비난했다.
신성 왕국은 즉각적인 해명에 나섰다. 대대적인 해명에도 대륙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번 사태에 피해를 입은 것은 평민뿐이 아니었다.
성녀의 순례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왕족과 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많은 국가들이 신성 왕국과 단교하기 시작했다. 단교를 하지 않은 국가도 신성 왕국을 향해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대륙의 분노와 질타가 거세지자 결국 신성 왕국은 침묵했다. 사실상 봉쇄나 다름없는 조치에 들어간 것이다.
제국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국은 신성 왕국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함부로 신성 왕국을 옹호하기에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제국은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끓는 물에 손을 담구면 화상을 입기 마련이었다.
카이제르는 신성 왕국과 결탁했다는 증언이 쏟아지자 곧장 반박에 들어갔다.
나름의 논리성을 타당함을 갖춘 반박이었지만 여론을 잠재우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여론전의 중심에는 정보 길드가 있었다. 시민 곳곳에 숨어든 정보 길드원들은 타오르는 불씨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 내가 직접 봤는데…….
― 아니, 글쎄 신성 왕국이…….
― 애초에 거기 모인 애들은 다 제물이었다니까?
― 때마침 용사가 안 오셨다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해.
― 설마 카이제르의 해명을 믿는 머저리는 없지?
주점부터 시작해서 용병 길드까지. 정보 길드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소문이 몸집을 불리며,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커져갔다.
시민들은 용사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와 동행한 블란테도.
그때, 침묵하던 아카데미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오늘 중대한 발표를 할 겁니다.”
단상 위에 오른 에단이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검술 명가라고 불리는 저희 블란테가 어째서 아카데미를 점거하였는지 아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에단은 비통하면서도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선수 시절 성사된 경기의 규모를 키우고 관심을 모으기 위해서 수도 없이 마이크를 잡아 오고 연기해 왔다.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쯤은 에단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단은 블란테가 아카데미를 손에 쥘 수밖에 없던 이유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애당초 아카데미가 설립된 목적은 본래의 취지와 달랐으며, 모두 레벨린 개인의 욕망과 목적을 위한 단체였다.
에단이 증인들을 단상으로 불렀다.
동굴에서의 사건, 로만의 죽음, 그것에 대해서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단은 여러 증인을 앞에 내세웠다.
그 자리에 있던 리사와 율리,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나섰던 에밀라까지. 그리고 희생당하는 학생들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드레이.
드레이가 앞에 나서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레이는 에단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좌중을 훑어보다가 눈을 감았다.
숭고한 모습에 환호성을 내지르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눈을 감고 있던 드레이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먼저 제가 구해 내지 못한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 지금.
적절한 상황에 에단이 신호를 보냈다. 근처에 자리해 있던 에르미온과 데아티르가 한숨을 내쉬며 마법을 발동했다.
드레이 근처에서 은은한 후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드레이도 자신의 의지로 적절한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신성력은 사람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학생들과 사람들은 감격에 젖은 눈으로 드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레이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신성 왕국에 대해서 입을 열겠습니다.”
드레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자신이 보고 겪었던 신성 왕국의 만행들. 그리고 미처 구하지 못한 여동생.
부패한 신성 왕국은 성자와 성녀를 마인과 마녀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며 토로하는 드레이의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드레이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갔다.
“……저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성자가 아닙니다.”
드레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드레이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저는 성자의 본분을 뒤로한 채 도망쳐 나왔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두렵고도 끔찍한 존재였습니다. 그때 저를 지켜 준 분들이 계십니다.”
드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에단을 바라봤다.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표정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감추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제가 몸을 숨긴 아카데미 또한 결국 신성 왕국과 한통속이었습니다. 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을 느꼈죠. 하지만…… 온전히 저를 위해. 아니, 대륙을 위해 수많은 이들의 눈총과 비난을 감수하고 나서신 분들이 바로 블란테입니다.”
드레이는 감정이 북받쳤는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드레이의 목소리가 먹먹해졌다.
드레이는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블란테는 저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친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저에게 ‘검’을 알려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블란테를 비난하고 질타할 때도 저를 친구로서, 제자로서, 학생으로서 대했습니다. 이번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벌어진 참사.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드레이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드레이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신성 왕국은 모두의 신망을 받았고, 저는 한낱 학생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때 블란테는 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드레이가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드레이의 곁에 섰다.
“다시금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방금 드레이가 한 말 그대로입니다. 분명 믿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만…… 저희 블란테는 친구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믿는 것과는 별개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정보가 새어 나간다면 오히려 저희가 함정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카이제르, 신성 왕국, 그리고 제국과 아카데미까지. 이 넷이 꾸민 일들을 지금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에단이 품에서 레벨린이 정리해 둔 장부와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장부와 수첩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수첩의 내용 중에서는 레벨린의 사연은 모두 배제시켰다.
에단은 천천히 모든 것을 읊어 나갔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에단은 이야기를 마쳤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저희는 블란테입니다. 그 어떤 적이 오더라도 두려워하거나 몸을 숨기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블란테는 강하지만 일개 가문에 불과하고, 상대는 대륙 전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패한 세력들과 상대해 승리하려면……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에단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건조한 눈가를 훑으며 그대로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침묵하던 인파들이 하나둘씩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 * *
“하하하.”
쾅!
크리스토가 팔걸이를 내려쳤다. 화려하고 고풍스럽던 팔걸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다.
“정말 재밌는데.”
완전히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 녀석의 입장이라면 방도가 없었다.
제아무리 무력에 자신감을 보이는 블란테라고 한들 대륙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명분 없는 전쟁은 파멸뿐.
그렇기에 크리스토는 블란테를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신성 왕국이라는 명분과 카이제르라는 무력, 더불어 제국 자체가 가진 입지.
“설마 이런 방식으로 위기를 타개할 줄이야. 큭큭.”
반쪽짜리 성자에 대해서는 크리스토 또한 알고 있었다. 제국의 정보력은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 큰 스케일로 여론을 뒤바꿀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재밌는데.’
크리소트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더 이상 방심할 수는 없었다. 상대방의 대한 시험은 끝났다.
더 이상의 실수는 용납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제 약점을 드러낸다면 그대로 물어뜯길 것이다.
“아버지를 알현하러 간다.”
크리스토가 몸을 일으켰다. 주위에 있던 호위기사들이 작게 고개를 숙이며 크리스토의 발걸음을 따르기 시작했다.
* * *
“…….”
레미아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드레이는 착잡한 얼굴로 그런 레미아을 응시했다.
레미아의 구출은 무사히 성공했다. 별다른 외상은 없었지만, 레미아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후우.”
드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토록 원망하던 라오나드를 죽이고, 그토록 꿈꿔 오던 여동생의 구출을 성공했다.
드레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진즉에 했어야 할 일이다. 복수와 구출도 자신의 힘으로 일군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드레이를 칭송했다. 성자라고, 용사라고 부르며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드레이는 그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난 이기적인 놈이야.’
드레이는 자신의 이기심을 알고 있었다. 혼자 살기 위해서 도망쳤다.
여동생에 대한 걱정은 늘 마음속의 짐이 되었지만, 행동으로 옮길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정체를 숨기고, 학생들 사이에 숨어들었다. 그건 기만이었다. 그 기만행위는 이번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여동생을 구하고 싶다는 이기심을 위해 대륙 전체를 속였다.
희생자가 나왔고, 그 희생자의 피로 인해 명성이 올랐다.
전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에단이 준 검으로 부족한 신성력을 증폭했다. 마룡을 토벌할 때 내지른 일격은 자신의 힘이 아니었다.
‘난 뭐지?’
실소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자신을 용사라고 칭송한다.
‘이딴 놈을 보고 용사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드레이가 복잡한 표정으로 레미아를 바라봤다.
그녀를 구출하고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 레미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
꾸우욱.
“나는 약해.”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 다시금 뇌리에 떠올랐다.
숨이 가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분노의 화살이 향한 곳은 자기 자신이었다.
“강해져야 한다.”
드레이는 더 이상 레미아를 바라보지 않았다. 어디를 보는 건지 모를 드레이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