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용사와 마룡 (4)
에단이 먼지를 뚫고 습격했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와 같은 매서운 손길이었다.
하지만 라오나드도 수많은 성기사를 제치고 단장의 자리에 오른 이였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 에단의 공격에 반응했다.
겉으로는 은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에단의 기세와 흐르는 마나가 맹렬했기 때문이다.
쩌엉―!
강렬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에단의 마나와 라오나드의 신성력이 격돌했다.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새끼 봐라?’
에단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역시 숨기던 게 있었다. 에단의 몸속에 있는 죽은 나무의 힘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라오나드는 신성력 사이에 숨어 있던 죽은 마나의 힘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숨겨 뒀던 비수.
에단은 그것을 사용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에단이 죽은 나무의 힘을 끌어올리자, 오르번의 술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단이 지닌 죽은 나무의 힘은 오르번의 술식과 상극이다.
‘쯧.’
오르번이 얕게 혀를 찼다. 벌써부터 은신 마법이 위태로워지고 있다.
여기서 오르번이 술식을 보강한다고 한들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르번은 에단에게 장담했었다.
마음껏 날뛰라고.
오르번은 오래된 흑마법사였고, 한 번 내뱉은 말을 회수할 생각은 없었다.
술식이 해제되어 에단의 모습이 발각될 것 같다면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분산시키면 그만이다.
마침 딱 좋은 녀석이 있었다. 오르번이 음험한 미소를 머금었다.
쿵.
지팡이를 바닥에 찍자, 파문이 인다. 창공에서 유유히 유영하던 마룡이 움직인다.
크르르르.
낮게 깔린 마룡의 울음소리에 바동거리던 시민들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에 있는 마룡을 응시했다.
크라라라라라라라―!
마룡이 울부짖었다. 귀가 멀 것 같은 맹렬한 포효였다. 사람들이 귀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딱 좋네.”
에단이 히죽 웃었다. 이렇게 되면 이제 마음껏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지직―
마법이 해제됐다. 그리고 에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오나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는!”
“왜. 반갑냐?”
에단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라오나드는 에단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 조우 때 라오나드는 에단의 명성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사자의 새끼라도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제기랄.’
라오나드가 이를 갈았다. 오판했다. 이 녀석은 하룻강아지가 아니었다.
이미 장성할 만큼 장성한, 교활한 사자였다.
카가각!
라오나드가 점점 밀리고 있었다. 에단의 출력은 압도적이었다.
효율 따위는 버린 채 압도적인 출력으로 밀어붙이니, 제아무리 성전사장을 역임하고 있는 라오나드라도 버틸 수가 없었다.
“슬슬 꺼내지 그러냐?”
에단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라오나드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라오나드는 말없이 그 힘을 끌어올렸다.
‘옳지.’
에단이 웃음을 삼켰다. 라오나드를 유도하는 것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에단은 상대를 기다려 줄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쑤욱.
에단의 상체가 사라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격렬한 기세로 찍어 누르려던 에단의 모습이 사라지자, 라오나드는 의구심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 라오나드는 상체가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에단은 어느새 라오나드의 하체를 붙잡고 있었다.
이마나리 롤.
에단은 즐겨 사용하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방심한 상대나, 그라운드의 조예가 없는 상대와 싸울 때 허점을 노리기에 최적화된 기술이었다.
라오나드의 상체가 넘어갔다.
그립은 완성되었다. 당혹한 라오나드가 신성력과 죽은 마나를 끌어올리려고 하자, 죽은 나무의 힘이 라오나드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사연? 그딴 건 궁금하지 않았다.
에단은 라오나드가 수를 꺼내는 걸 두고 보지 않았다.
“드레이!”
에단이 외쳤다.
동시에 첸과 네이드도 달려들었다. 라오나드가 끌어올리는 신성력을 봉쇄했다.
성기사들이 다급하게 개입하려 들었지만, 네이드와 첸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피가 흩뿌려졌다.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성기사들도 노련한 암살자와 정점에 오른 기사는 상대하지 못했다.
성기사들이 허무하게 쓰러진다. 라오나드가 성기사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움직이려 했지만, 무릎 쪽에서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드득.
찌이익―!
“끄아아아아아악!”
라오나드가 견디지 못하고 끔찍한 비명을 토해 냈다. 완벽하게 잡힌 힐훅의 그립은 무릎을 비틀었다. 에단이 살벌한 미소를 머금었다.
“드레이, 팔 잘라!”
라오나드가 발버둥을 치며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드레이는 순간 망설였다.
살아 있는 사람의 팔을 잘라 낸다는 것은 어지간한 결단으로는 하기 어려운 행위였다.
“드레이!”
에단이 살기가 득실거리는 눈으로 드레이를 노려봤다. 유리알같이 번들거리는 에단의 눈에 놀란 드레이가 이를 악물었다.
‘오늘과 같은 기회는 다신 없을 거야.’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드레이가 숨을 들이켠 뒤 일격에 검을 휘둘렀다.
쾅!
라오나드의 신성력이 드레이의 일격을 막아 냈다. 드레이는 내디딘 발에 힘을 더했다.
화르륵.
성스러운 빛이 타오른다. 드레이의 전신이 불길에 휩싸인 것 같았다.
“너…… 이 반쪽짜리 버러지가!”
“반쪽짜리한테 한번 당해 봐.”
신성한 기운과는 반대로, 드레이의 눈은 서늘한 한기를 머금었다.
촤악!
라오나드의 양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진다.
에단은 힐 훅의 그립을 놓음과 동시에 라오나드의 몸 위에 올라탔다.
“날 건드렸으면 각오하고 있었어야지.”
에단은 야성이 흐르는 미소를 지었다. 순간 라오나드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에단이 양팔에 마나를 둘렀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파운딩을 후려쳤다.
적당히 손속에 사정을 두는 손길이 아니었다.
에단은 라오나드를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저항 따위는 불가능하게끔 아주 철저하고 동시에 잔혹하게.
쾅! 쾅! 쾅! 쾅! 쾅! 쾅!
포탄이 떨어지는 것 같은 일격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처음에는 들썩거리던 몸이 점점 잠잠해진다.
“…….”
“…….”
“…….”
주위에 산재해 있던 정보 길드원들부터, 네이드, 첸, 드레이, 휴고, 가토, 르니엘, 그밖에 모든 이들이 에단의 폭력에 시선을 고정했다.
스물의 나이.
에단의 눈에는 그 어떤 환희와 기쁨도 없었다. 두 주먹과 전신은 라오나드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에단의 눈은 차갑게 식은 상태였다.
쾅!
마지막 일격을 내리꽂힌 라오나드의 상체는 더 이상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그 기괴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광경에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오르번, 은신 재개하고. 그리고 다음 작전 바로 실행해.”
에단이 무덤덤하게 작전을 지시했다. 오르번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에단을 다시 장막 속에 가렸다.
에단은 은신한 상태로 드레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네 몫이다.”
에단이 낮은 목소리로 드레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드레이는 딱딱하게 굳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에단이 장막 속으로 사라지자, 드레이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정보 길드원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타락한 성기사를 모두 쓰러트렸다!”
“성녀, 아니, 마녀도 빨리 끌어내!”
“아직 카이제르의 잔당들이 남았어!”
몸을 웅크리고 있던 시민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고 있었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앞에 펼쳐진 광경은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쓰러진 성기사들과 라오나드.
오르번의 조치로 인해 그들의 피는 칠흑처럼 새까맸다.
불같이 타오르는 신성력과 죽은 시체들, 그리고 그 앞에 초연하게 서 있는 드레이.
불순한 마음이 사라지고, 절로 경건함이 드는 광경이었다. 시민들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시작했다.
― 지금이다.
에단의 말이 떨어지자, 오르번이 먼저 움직였다. 마룡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
마룡에게서 이질적이면서도 사나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주위를 압도하는 기세에 시민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드레이는 그들을 힐긋 바라보더니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성검을 치켜들었다. 드레이는 카이제르의 잔당을 향해 매섭게 소리쳤다.
“이 비열한 악당놈들…… 도망치지 말고 덤벼라!”
“…….”
렉사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뒤편에 서 있던 휴고와 가토를 바라봤다. 둘 역시 얼빵한 표정으로 렉사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끔뻑끔뻑.
― 너희들 전부 뒈질래?
그 순간 셋의 머릿속에 에단의 음성이 우레처럼 내리꽂혔다.
순간적으로 소스라치게 놀란 셋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교활하고 악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케헤헤…… 네깟 녀석은…….”
말을 잇던 렉사르는 치미는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결국 휴고가 앞으로 나섰다.
드레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숨을 들이켠 뒤 뛰쳐나갔다.
파밧!
손에 쥔 성검이 신성력을 증폭시킨다. 타오르듯 방출되는 신성력에 렉사르와 일행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하고 픽픽 쓰러졌다.
드레이가 순식간에 잔당들을 정리하자 시민들이 환호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에도 드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드레이가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글거리는 흑염을 토해 내는 마룡을 노려봤다. 시민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드레이를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 자, 마지막이야. 헨리.
에단의 말에 헨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드득.
지각의 변동이 시작되었다. 높이 떠올라 있는 마룡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는 길이 형성되었다.
드레이는 헨리가 만든 땅을 발판 삼아 거침없이 질주했다. 그리고 드레이의 뒤에는 네이드와 에단, 첸도 함께했다.
파바바밧!
결국 마룡과 마주한 드레이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성검을 치켜들었다.
드레이는 본인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콰아아아아아―
마룡은 그 어떤 저항이나 적의도 없이 가만히 드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 오르번.
에단이 신호하자, 마룡의 입에 검은 기운이 밀집되기 시작했다. 내뿜는 순간 지상의 모든 것을 지워 버릴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이었다.
드레이는 최대치의 신성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지만, 재앙과도 같은 마룡에 대적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에단은 거기에 힘을 얹을 생각이었다.
파지직―
강렬한 기운에 은신 마법이 해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단은 개의치 않았다.
드레이와 마룡.
성자, 아니, 용사와 마룡이 내뿜는 기운은 압도적인 광채를 동반했다. 시민들은 감히 그 기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탁.
에단이 드레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최대한 끌어올려.”
스산한 중얼거림.
그리고 에단의 곁에는 네이드와 첸도 각자가 끄집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기운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우웅―
막강한 기운이 서로 상충되며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