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용사와 마룡 (3)
재앙의 강림.
사람들은 재앙을 마주했다.
감히 대적할 수조차 없는 힘.
시민들은 비명 소리조차 흘리지 못했다. 그저 넋이 나간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소름 끼치거나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하늘에 현현한 지옥의 마룡을 마주 봤다.
“……뭐야 저게.”
한 시민이 중얼거렸다. 마룡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바람이 몰아쳤다.
남자는 눈을 끔뻑이며 마룡을 바라봤다.
크르르.
흉성이 흘러나왔다. 마룡의 두 눈에서는 끔찍한 흑염이 뿜어져 나왔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마치 지옥이 노래하는 것처럼 불쾌하고 소름끼쳤다.
와닿지 않던 상황 속에서 시민들은 그제야 실감했다.
아, 나는 오늘 죽겠구나.
“꺄아아아아아악!”
시민 한 명이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혼란과 소란이 퍼졌다.
이전에 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혼란이 금세 사람을 타고 전염된다.
무질서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숭고하고 경건하던 자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제 한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사람들을 밀쳐 내기 시작했다.
사람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그것은 숨기거나 가릴 수가 없는 본질이었다.
누구는 악을 써 가며 넘어진 사람들을 짓밟고 뛰기 시작했고, 누구는 혼이 빠진 것 같은 얼굴로 자포자기했다.
마룡의 등장은 사람들에게 성녀와는 비할 바 없는 충격을 선사해 주었다.
“저게 무슨…….”
마룡의 존재를 보고 입을 벌린 것은 라오나드와 성기사들도 매한가지였다.
눈에서 맹렬한 불을 토해 내고 입에서는 요사스러운 울음소리가 피어난다.
그들은 저것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사특한 존재이며, 사악한 괴물이었다. 이적을 행하는 성기사들은 저것과 맞서야 했다.
두려워할지언정 도망쳐서는 안 된다. 저 괴물에게 생체기 하나 내지 못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저것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광스러운 죽음.
성기사라면 모두 그런 숭고한 희생을 꿈꾸고는 한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신의 뜻을 더럽히는 마(魔)를 상대로 용기 있게 대적하는 것.
그로 인해 자신의 신실함을 보상받고, 아늑한 신의 품에 안기는 것.
그것이 성기사들이 바라던 이상(理想)이었다.
‘하지만 이건…….’
이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다리가 후들거린다. 사제의 축복을 입은 갑옷과 검을 치켜들었다. 순백의 검을 들고 마룡과 마주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유유히 창공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저 존재를.
대체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대적한단 말인가.
다리가 후들거렸다.
모골이 송연해지고, 등골에 소름이 질주해 나간다. 무력감이 차오른다.
머릿속에서는 감히 해서는 안 되는 생각도 들었다.
‘어째서?’
어째서 하필, 성녀의 순례가 있을 때 저런 존재가 강림한단 말인가.
다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들은 검을 들고 맞서고 있었지만, 진정으로 맞서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패배했다.
“뭣들 하는 게냐!”
라오나드가 일갈했다.
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타오르는 분노로 머리가 하얗게 질리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칼자루를 쥐던 손에 힘을 주었다.
“네가 감히…….”
라오나드가 드레이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은 이 녀석 때문이었다.
라오나드는 판단을 내렸다.
이 녀석을 여기서 죽여야 한다.
이건 자신에게 주어진 시험이자 관문이다. 여기서 망설임 따위는 필요 없었다.
저 사악하고 사특한 것들과 놀아난 반쪽짜리 성자를, 신 대신 벌해 줄 생각이었다.
라오나드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그리고 그때,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쿠구구구.
땅이 흔들린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사람들이 힘없이 넘어진다.
쿠구구구구.
지각의 변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아가 있는 것처럼 움직인 지면은 갑자기 높은 벽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형성된 벽은 마치 동물을 가둬 둔 우리 같았다.
이제 사람들 사이엔 혼란이 아닌, 짙은 절망이 엄습했다.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는 순간, 은신해서 지켜보던 에단이 수신호를 보냈다.
― 다음 진행해.
반응은 곧바로 왔다.
“악마와 결탁한 성기사들이 우리를 제물로 받치려고 든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성녀는 뭔 놈의 성녀냐!”
“애초에 이럴 작정으로 사람들을 모았지!”
원망의 대상이 정해지는 건 아주 작은 계기면 충분했다. 인파 사이에 숨어든 길드원들은 도화선에 불을 붙였을 뿐이다.
“저 개자식들이!”
“너희들이 그러고도 성기사와 사제냐!”
“카이제르 새끼들도 똑같아!”
“빨리 우리를 내보내 줘!”
수많은 시민들의 원망과 압박에 라오나드와 성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모두의 선망을 받던 이들이 한순간에 추락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라오나드가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라오나드의 분위기가 완전히 돌변했다.
그는 지금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최대한 빠르게 정리할 생각이었다.
한기를 품은 그가 움직이려 들었다. 드레이는 순간 움찔했다. 라오라드의 기세에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라오나드는 무력으로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기사였다. 그가 작정하고 적의를 표출한 것이었다.
스윽―
진심으로 돌변한 라오나드가 움직이려 들었다. 하지만 라오나드는 뛰쳐나가지 않았다. 라오나드의 다리가 지면에 고정되었다.
라오나드의 동공이 움직였다. 그리고 급격하게 몸을 돌렸다.
쾅!
불똥이 튀었다. 라오나드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그곳에는 외모를 바꾼 네이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서 있었다.
“반응이 빠르시군요.”
듣기 좋은 목소리. 마치 학생을 칭찬할 때 말하는 것처럼 따듯한 어조였다. 라오나드의 볼이 꿈틀거렸다.
“…….”
이제 소리 내어 분노를 토해 낼 여력도 없었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네이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많이 불쾌하셨나 봅니다. 하지만 저한테만 신경 쓰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네이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순간 라오나드는 또다시 뒤에서 엄습하는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쾅!
“크윽!”
라오나드가 간신히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 냈다. 공격을 막아 낸 라오나드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속절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곳에는 변장한 첸이 묵묵히 라오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오나드가 눈을 굴렸다.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정 힘들다면 성기사들을 희생시켜 성녀와 함께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저 나무로 이루어진 벽은 부술 수 있었다.
라오나드가 쓰는 신성력은 기사들의 오러와 비견해도 꿀리지 않았으니.
하지만 저 둘이 문제였다. 네이드와 첸.
라오나드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둘 모두 라오나드와 필적하거나 그 이상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라오나드는 도망칠 수 없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방법은 하나였다.
버티는 것.
멀지 않은 곳에 제국의 병사들이 있었다. 사태를 파악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들이 기사들과 함께 증원을 온다면 지금 상황도 충분히 타개할 수 있었다.
라오나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강하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가 순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후웅.
날갯짓에 바람이 휘몰아친다. 창공에는 마룡이 섬뜩한 눈으로 라오나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룡의 입에서는 포악한 흉성이 멈추지 않았다.
라오나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무리 찾아봐도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원망은 전염된다. 이 사태의 원흉은 신성 왕국이 짊어지게 될 것이다.
속이 들끓었다. 버러지 같은 것들 때문에 명예가 더럽혀지고 말았다. 라오나드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꽈드드득.
칼자루가 비명을 내지른다. 라오나드는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여기서 죽여야겠어.’
에단은 사태를 관망 중이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일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문제는 발각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인데.’
목적은 라오나드의 목숨. 어렵지는 않았다. 전력의 차이가 너무 확연했기 때문이다.
성기사들은 라오나드를 돕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배제해도 상관없었다.
마스터의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으니까.
에단이 끼어든다면 전세는 확실히 기울 것이다.
아무리 라오나드의 역량이 뛰어난다고 한들, 완숙한 마스터 셋이 몰아치면 감당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에단의 전력이 노출되는 것은 피해야 했다. 에단은 너무 눈에 띄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괜히 덜미를 줄 바에는 지금은 몸을 숨기고 있는 게 나았다.
‘휴고나 렉사르도 매한가지고. 가토는 지금 끼어들어 봤자 별다른 도움이 되기는 힘들 거야.’
에르미온과 데아티르는 술식을 유지하는 데에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화려하게 드래곤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둘의 개입을 바랄 수는 없었다.
에단이 고민하고 있는 찰나, 인파 속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의사가 들어왔다.
― 처리할 거면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 거다. 뭔가를 하려고 드는군.
들려오는 오르번의 목소리. 에단의 망설임은 끝났다.
― 걱정 마라. 드래곤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는 큰 무리가 되지 않으니, 은신을 보조해 주겠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발을 내디뎠다. 라오나드의 고개가 돌아간다. 예리한 그의 본능이 이질감을 감지한 것이다.
그것을 느낀 것은 네이드와 첸도 마찬가지다. 셋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의사는 통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튀어 나갔다. 라오나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손이 목걸이에 올라가려는 순간.
네이드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언제 꺼낸 건지조차 알 수 없는 비수들이 라오나드의 급소를 향해 쇄도했다. 서늘한 마나를 머금은 비수.
라오나드가 이를 갈았다. 몸을 비틀려던 찰나, 첸이 검을 휘둘렀다.
탈출로가 없자 라오나드는 신성력을 폭발시켰다.
쩌엉―!
신성력의 폭발.
첸은 마나를 전개시켜 가볍게 막아 냈다.
하지만 에단은 첸과 다른 선택을 했다.
“슬슬 끝내야지.”
타이탄의 장갑을 앞세워 신성력을 집어삼켰다. 에단은 효율 따위는 잊었다. 그저 한계를 모르는 마나를 불태웠다.
거칠게 타오르는 신성력 사이로 에단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또 보네?”
에단이 사납게 미소 지으며 그대로 라오나드의 목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