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용사와 마룡 (2)
갑작스러운 소란에 라오나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뒤편에 서 있던 성기사를 향해 책망의 눈길을 보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란이지?”
하지만 아는 바가 없는 것은 성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것이…… 저도 잘…….”
“최대한 빨리 원인을 파악해서 마무리 지어라. 지금 우리가 무슨 일을 수행하는지 잊은 건가?”
“아, 알겠습니다.”
라오나드의 서슬 퍼런 질책에 성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소란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성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우글거리는 인파를 가르고 지나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기사들이 곤욕을 면치 못하자 라오나드의 안색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라오나드의 고개가 획하고 돌아갔다. 레미아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제길, 하필 지금.’
라오나드가 이를 갈며 다시금 목걸이를 붙잡고 중얼거렸다. 레미아의 초점이 다시금 흐려졌다.
“가만히 기다리고 계십시오.”
라오나드가 권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레미아는 라오나드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라오나드가 단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아직도 인파 앞에서 머뭇거리는 성기사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지금 뭣들 하는 거지?”
“단장님…… 그것이…….”
성기사 한 명이 난처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가리켰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그곳에는 비집고 지나갈 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라오나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키헤헤헤헤! 감히 블란테를 뛰어넘는 검술명가인 카이제르의 손에서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듣기 거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그 불쾌한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카이제르?”
“지금 카이제르라고 했나?”
“카이제르가 왜?”
“어, 저기 카이제르의 인장이!”
지금같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혼란은 조금씩 전염되기 시작했다.
카이제르의 기사 역을 맡은 렉사르는 그 역할에만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렉사르는 마음속으로 쉬지 않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참담한 심정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곁에 같은 역할을 맡은 휴고와 가토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렉사르는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들의 얼굴은 오르번을 포함한 두 대바법사와 네이드가 변장을 시켜 줬다.
카이제르 역할을 배정받은 이들은 모두 원래의 외향과는 완전히 딴판이 된 모습이었다.
“케케케케게! 엘프의 살을 맛보고 싶구나!”
렉사르가 광소를 내뱉었다.
휴고와 가토는 그 모습에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었다.
그들의 시선을 느낀 렉사르가 획하고 고개를 돌렸다.
가토와 휴고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이는 게 보였다.
렉사르의 얼굴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그러고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 둘을 노려본 렉사르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너넨 안 하냐?’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하는 렉사르의 섬뜩한 모습에 가토와 휴고 모두 행동에 돌입했다.
“하하핫! 두 번째는 내 몫이라고!”
“뭐라고? 이 자식! 죽고 싶은 거냐? 저 매끈한 허벅지에는 내가 침을 발라 놨단 말이다!”
가토와 휴고가 각자 저질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르니엘을 쫓았다.
매끈한 허벅지라는 구체적인 묘사에 르니엘은 도망치면서 경멸 어린 눈빛으로 둘을 흘겨봤다.
그 충격적인 눈초리에 두 사람은 표정 관리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인파 사이에 섞여 들어가 있던 에단이 이마를 쳤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 저 머저리들.’
어려운 연기를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호색한 악당이 되기를 요청했더니 지금 저 지랄을 떨고 있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워낙 사람이 밀집되어 있던 탓에 그들의 저질스러운 연기를 제대로 파악하는 이는 얼마 있지 않았다.
“카이제르다! 카이제르가 엘프를 겁탈하려 든다!”
“카이제르라고?!”
“아니, 카이제르가 왜 엘프를 겁탈해?”
“카이제르에는 원래 저런 저질스러운 새끼들밖에 없었어!”
“아니, 그렇다고?”
인파 사이사이에 배치해 둔 정보 길드원들과 한니발의 직원들이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지금같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작정하고 여론을 움직이려 들자 대중들은 꽤나 손쉽게 따라왔다.
“카이제르라고?”
“미친, 성녀의 연설이 시작되고 있는데 그 난리를 피운단 말이야?”
어떻게든 에단이 원하는 방향대로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건의 진위는 평생토록 밝혀지지 않을 테니까.
에단이 고개를 돌려 눈빛을 교환했다. 마찬가지로 변장한 네이드와 첸이었다.
‘지금.’
스스스.
준비해 뒀던 술식이 발현되었다.
셋의 몸이 투명해졌다.
본디 투명화 마법은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했지만, 세 명의 대마법사가 힘을 합치자 어렵지 않게 구현이 가능했다.
“비켜라―!”
멀리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라오나드의 목소리였다. 결국 견디다 못한 라오나드의 인내심이 폭발한 것이었다.
라오나드가 서슬 퍼런 기세를 풀풀 풍기자, 겁에 질린 사람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힘겹게 길이 터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도망치다 지쳐서 쓰러진 르니엘과 그를 향해 달려드는 카이제르의 기사 셋이 있었다.
카이제르의 기사들과 라오나드의 눈이 마주쳤다.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광경에 라오나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지금 이게 무슨…….”
말문이 막힌 라오나드가 그들을 지켜봤다.
순간 당황한 렉사르가 흠칫했지만 대본을 떠올렸다.
“오! 우리의 협력자, 라오나드가 아닌가! 빨리 우리 좀 도와주지 않겠나? 이 앙큼한 엘프 계집 년의 저항이 여간 거세야지 말이야. 아, 걱정하지 말라고 너도 맛은 보게 해 줄 테니까. 흐흐흐.”
“…….”
어색하기 그지없는 말투.
라오나드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무 기가 막히는 상황인지라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부, 부패한 성기사…….”
르니엘이 정확히 라오나드를 지목하며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맑고 커다란 눈망울에는 눈물이 방울방울 차오르고 있었다.
웅성웅성.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멍하니 사태를 지켜보던 라오나드는 생각을 정리하기를 포기했다.
라오나드의 볼이 꿈틀거렸다.
지금 어떤 놈들이, 무슨 작정으로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스르릉.
맑은 소리를 내며 백색의 검이 뽑혔다. 일단 이 사태를 정리하는 게 먼저였다.
라오나드가 검을 뽑아 들자, 좌중들의 웅성임이 심해졌다.
“부패한 성기사다!”
“신성 왕국이 이럴 줄 알았어!”
“성녀도 가짜 아니야?!”
인파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직원들이 소리를 내었다. 사람들은 전처럼 순식간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점 심해졌다.
지끈.
라오나드는 두통을 느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야, 이 자리에 있는 멍청한 이들을 죄다 죽여 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게 된다.
“후우.”
라오나드가 여러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토해 내고는 자세를 잡았다. 순간 렉사르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변을 감지해 낸 것은 가토와 휴고도 마찬가지였다. 가토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팟―!
라오나드가 섬광처럼 뛰쳐나갔다.
셋의 눈은 라오나드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살수를 던진다면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위해서였다.
쾅!
하지만 셋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 앞을 막아선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르르륵!
신성력이 찬란하게 타올랐다. 드레이의 금안이 형형한 광채를 뿜어냈다.
드레이는 아름다운 자태를 뿜어내는 성검을 움켜쥔 채 라오나드와 대적했다.
“너는…….”
라오나드의 눈이 커졌다. 그는 드레이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봤다.
드레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드레이는 라오나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드레이가 라오나드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디작은 목소리를 씹어뱉듯 말했다.
라오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가강!
신성력과 신성력이 맞부딪친다.
순간적인 출력은 드레이가 압도적이었다.
지금 드레이가 방출해 내는 신성력은 성녀인 레미아보다도 높았으니까.
하지만 검사로서의 역량이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났다.
라오나드는 몇 번 무게중심을 비트는 것만으로 칼의 대치에서 우위를 점했다.
“같잖은 계획을 세웠군.”
라오나드가 조소를 머금었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진다. 불량품 따위가 조악한 함정을 구성했다.
‘웃기지도 않아.’
라오나드는 비웃음과 경멸을 가득 담아 웃었다.
이깟 함정쯤은 신성 왕국에 아무런 흠집도 입히지 못할 것이다.
“크윽!”
드레이가 신음을 토해 낸다. 전세가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드레이는 역량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다음 계획으로 이어진다. 인파 사이에 숨어 있던 오르번이 행동을 나섰다.
쿵.
로브를 뒤집어쓴 그가 지팡이를 찍었다. 그러자 라오나드와 드레이 아래에 있던 마법진이 음험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드레이는 계획이 다음 차례로 이어진다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뿜어내던 신성력을 거뒀다.
그러고는 르니엘을 안아 든 채 옆으로 굴렀다.
사특한 술식이 발동하며 라오나드의 전신에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같잖은!”
라오나드가 노기를 토해 내며 오르번의 흑마법을 태워 버리려 들었지만, 오르번의 마법은 그렇게 간단히 지워지지 않았다.
오르번은 위대하고 오래된 흑마법사였다.
신성력은 그에게 상극이었지만, 노련한 흑마법사는 신성력을 어떻게 해야 억누를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레오나드를 뒤덮은 검은 연기가 마치 악귀의 형상처럼 바뀌었다.
“부, 부패한 성기사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아, 악마와 결탁했다!”
“꺄, 꺄아악!”
바람잡이들이 다시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라오나드는 머리가 하얘질 것 같은 격렬한 분노를 느끼며 어떻게든 이 검은 연기를 태워 버리려고 발악했다.
신성력을 집중하면 조금 사그라드는 것 같다가도 다시금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이 같잖은 놈이!”
라오나드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 다시금 지팡이를 바닥에 찍었다.
우웅.
진동이 퍼져 나갔다. 그것은 신호탄이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에르미온과 데아티르가 마법을 전개했다.
휘이잉―
바람이 사람들을 훑고 지나갔다. 선선한 바람이었지만 어딘가 스산하게 느껴졌다.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어린아이는 쓰고 있던 모자를 놓치고 말았다. 어린아이가 놓친 모자를 잡기 위해 고개를 드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엄마.”
아이가 곁에 있던 엄마를 불렀다.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뭐야?”
하늘을 유영하던 구름이 걷혔다. 재앙이 등장했다.
크라라라라라라!
그것은 마룡의 강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