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화] 용사와 마룡 (1)
“저, 저보고…… 이 괴물이랑 싸우라고요?”
드레이의 동공이 길을 잃은 것처럼 흔들렸다. 간절한 눈빛으로 에단을 바라봤지만, 에단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어. 네가 잡을 게 이 녀석이야. 어때 마음에 들어?”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드레이는 에단의 미소를 바라보자 소름이 끼쳤다.
‘제, 제정신이 아니야.’
원래부터 제정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자신이 에단을 과소평가한 것 같았다.
드레이가 뻣뻣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세상을 멸망시킬 것 같은 마룡이 드레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머리가 핑 돌았다.
드레이가 비틀거리자, 에단이 드레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분명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부축해 준 것일 텐데 강렬한 부담감이 느껴졌다.
드레이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왜? 너도 흥분되냐?”
“……네?”
“크, 나도 완성품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너는 이제부터 이 마룡을 쓰러트리고, 신화 속의 주인공이 될 거야.”
“……네?”
드레이가 연신 되물었다. 하지만 에단에게 있어 드레이의 반응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에단의 눈이 기이한 빛을 머금었다.
드레이는 그 눈빛을 보자 섬뜩함을 느꼈다. 에단의 눈은 광기에 젖어 있었다.
“그래. 할 수 있지?”
히끅.
드레이는 저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왔다. 결국 드레이는 절망에 물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드레이는 심연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 * *
날짜는 다가왔다. 에단은 작전의 브리핑을 위해 인원들을 소집시켰다.
주요 인물들이 전부 한곳에 모였다.
작전의 주인공이 될 드레이부터 시작해서, 오르번, 에르미온, 데아티르, 르니엘, 헨리, 네이드, 에밀라, 휴고, 가토, 그리고 첸과 렉사르까지.
모인 이들을 보며 에단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아버지가 아쉬워하겠군.’
빈센트는 이번 작전이 들어감에 앞서 강한 흥미를 보였다. 애초에 드래곤 토벌 때도 참여의 의사를 밝혔던 것이 바로 빈센트였다.
하지만 빈센트는 자리를 비우지 못했다. 또다시 영지를 떠나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충분해.’
충분하다 못해 과분할 정도였다. 이정도의 전력이라면 어지간한 국가와 맞서더라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이가 셋이고, 에단을 포함한다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가 셋이었다.
네이드와 첸은 이미 완숙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고, 에단의 경우에는 어느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둘보다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마스터의 근접한 이들도 있었다.
렉사르는 마스터의 경지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지만, 전투에 돌입했을 때는 굶주린 늑대처럼 몰아칠 것이었고, 르니엘도 전투에 돌입하는 순간 막강한 전력이 되어 줄 것이었다.
또한 헨리는 특정 분야에 있어서는 오히려 대마법사보다 강한 위력을 보여 준다.
에단이 그들을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드레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이쪽이 작전의 주인공이 될 예정인 드레이다.”
에단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드레이게로 쏠렸다.
드레이는 이제 모든 것에 초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먼저 본 모습을 한번 보여 줘야겠지.”
에단이 드레이를 향해 손짓했다. 드레이는 영혼이 빠진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터덜터덜 앞으로 나갔다.
드레이가 앞에 서자, 에단이 드레이를 향해 어깨동무하며 말했다.
“잘해라.”
파르르.
에단의 스산한 목소리의 드레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드레이가 숨을 가다듬었다.
드레이의 손이 칼자루에 얹어졌다. 칼집부터 화려한 모습이었다.
스릉―
맑은 소리와 함께 칼집에서 칼이 뽑혀 나왔다. 아슬란, 아니, 성검의 매끈한 자태가 본모습을 뽐냈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전설이나 신화 속에 등장하는 검 같은 영롱한 자태에 지켜보는 이들이 눈을 빛냈다.
“후우.”
드레이가 숨을 토해 냈다. 그 순간 몸속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신성력이 타올랐다.
화르륵!
성스럽고 찬란한 신성력이 피어오른다. 부정하고 사특한 것들을 불사르는 신성력이다.
맞은편에 서 있던 오르번이 인상을 찌푸렸다.
드레이의 신성력은 성검을 통해 증폭된다. 신성력이 거세졌다.
본래라면 드레이 본인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신성력이다.
하지만 에단이 성검의 힘을 봉인한 이후, 드레이는 성검의 힘을 제어할 수 있었다.
드레이의 눈에서 성스러운 광채가 흘러나왔다. 지금 드레이는 서 있는 것만으도 고결하며 경건했다.
“됐어.”
에단이 말하자 드레이는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타오르는 신성력이 사그라들었다. 드레이는 조금 지친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어때?”
에단의 물음에 첸이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놀라운 모습입니다. 제가 봐 왔던 그 어떤 신실한 성기사도 저와 같은 신성력을 보여 준 적이 없습니다. 확실히 성자라고 칭함에 있어서 부족함은 없어 보이는군요. 하지만…… 부족합니다. 저 소년이 드래곤과 싸우는 겁니까?”
첸의 물음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사실은 에단도 알고 있던 부분이다.
드레이의 신성력. 죽은 것에서 비롯된 존재를 멸하는 데는 압도적인 신위를 발휘하지만, 단순한 무력으로는 부족하다.
마룡은 오르번이 주도해서 되살려 낸 존재였다. 살려 냈다고는 표현하지만, 그것의 실체는 언데드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드레이의 신성력은 마룡에게 있어 쥐약이다. 하지만 문제는 마룡이 너무나도 압도적인 위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에단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너희들이 함께하는 거야.”
에단은 천천히 계획을 읊어줬다.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던 이들은 점점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입을 쩍 하고 벌린 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하지?”
브리핑을 끝낸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대륙의 중심이라 불리는 도시.
아르미엔드.
이곳은 아카데미처럼 각 국가와 세력이 힘을 모아 계획해 만든 계획도시였다.
사실상은 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도시였지만, 표면상으로는 자치도시였다.
도시가 세워질 때부터 계획적으로 지어진 만큼 아름다운 조형물들과 건물들이 있었다.
도로는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었고, 노점도 시 직원들의 철저한 관리하에 제한적으로 영업이 허락되었다.
도시는 사람들로 붐볐다.
원래 아르미엔드는 인파로 북적거렸지만, 오늘은 특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성녀의 순례 때문이었다.
성녀.
듣기만 해도 마음이 숭고해지고, 거룩해지는 기분이 드는 이름이었다.
수백 년 만에 등장한 성녀의 등장에 대륙민들은 환호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멀게만 느껴지는 교황이나 신 같은 존재보단, 성녀가 가깝고도 신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평민들에게 있어서 신의 대리자인 성녀의 말은 곧 신의 말씀이기도 했다.
숭고한 순례를 시작한 성녀는 오늘 아르미엔드에 도착한다. 그리고 높은 단상에 서서 연설할 것이다.
그 연설을 직관하기에 위해 이만한 인파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평소에 이만큼의 사람이 밀집된다면 적잖은 소란과 혼란이 빚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비교적 조용했다.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금 이 도시에는 성녀가 와 있었다.
성녀는 곧 신의 대리자였고, 그녀의 눈에 들어야만 죽어서 고통 받지 않을 것이었다.
평민들에게 있어 신의 진노는 두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왔다…….”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성녀 레미아가 천천히 단상 위에 오르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금발, 그리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금안.
무지몽매한 이가 보더라도 절로 숭고해지는 외모였다.
단상 아래에 모여 있는 평민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시작했다.
레미아가 단상 위에 섰다.
그리고 그 곁에는 백색의 사제복을 입은 라오나드가 레미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단상 위에 선 레미아의 황금색 동공이 길을 잃은 것처럼 흔들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오나드가 목걸이를 붙잡고 중얼거렸다.
라오나드가 뭐라 웅얼거리자, 레미아의 초점이 다시금 흐려졌다.
그녀는 흐릿한 동공을 한 채 단상 위에 올랐다. 좌중들은 모두 레미아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라오나드는 경건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아직 레미아는 온전한 상태라고 볼 수 없었다.
레미아은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예상보다 조금 일찍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불안정한 상태가 때때로 이렇게 나타나고는 했다. 그럴 때를 대비해 라오나드가 곁을 지키고 있었다.
라오나드가 묵념한 채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하는 라오나드의 모습은 성스러웠다.
단상 아래에 있던 성기사들 모두 기도를 시작했다. 따뜻한 신성력의 기운이 은은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성스럽고 거룩한 분위기에 좌중이 모두 양손을 모아 기도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레미아의 티 없이 맑고 고운 미성이 퍼져 나갔다. 단상에는 미리 준비해 둔 마법적 장치가 있었다.
레미아가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지 않더라도 그녀의 목소리는 모두의 귀에 스며든다.
레미아가 인사를 하자마자 주위가 고요에 휩싸였다. 모든 좌중들이 입을 다물었다.
아직 절제와 인내가 부족한 아이도 양손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레미아의 연설을 경청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죄를 속죄하고…… 그리고 위로하러 왔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 어떤 고민과 불안, 두려움 따위의 감정에 매몰될 필요가 없습니다. 거룩한 신의 목소리를 듣는 제가…… 여러분 앞에 섰으니까요.”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말이었다. 레미아가 양손을 모으자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그녀에게서 시작된 신성력이 천천히 퍼져 나갔다. 이 자리에 모인 수많은 이들 하나하나 느낄 정도로 넓고 충만한 신성력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으려던 순간, 고요함이 무너졌다.
“꺄아악―! 살려 주세요―!”
까랑까랑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요 속에 휩싸였기 때문일까, 그 소리는 좌중들에게 더욱 뚜렷하게 들렸다. 기도에 집중하던 자들의 기도가 끊어졌다.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에 사람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슨 소리야?”
“뭐야, 무슨 일이야?”
웅성웅성.
소란이 번지기 시작하며 경건하던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사, 살려 주세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사람들이 비명 소리의 발생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넝마가 된 옷가지로 간신히 몸을 가린 엘프가 힘겹게 도망치고 있었다.
“케헤헤헤! 이 요망한 엘프년! 네가 내 손에서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그리고 가녀린 엘프를 매섭게 쫓아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팍에는 카이제르를 상징하는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