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마룡 등장 (3)
빈센트를 바라보던 에단의 눈빛에는 결의가 차올랐다. 빈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지만 너도 그만큼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호오, 그렇게 답한다는 거지.”
빈센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웃음기를 머금은 빈센트가 말했다.
“네가 가문의 대사를 결정하려드니, 그만한 위치에 올라야겠지. 아직 가주의 자리는 이르지만, 내정자로 만들 수는 있다. 영지와 기사들을 모아라. 너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임명시켜야겠다.”
빈센트가 선포했다.
* * *
‘쯧.’
집무실 밖을 나온 에단이 혀를 찼다. 결국 결과가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예상은 했다.
에단의 행동은 월권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힘을 숭상하는 것이 블란테의 방침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과한 건 분명했다.
가주도 결정짓지 못한 것들을 행해 왔다. 모룬이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신의 몫인 줄 알았던 차기 가주의 자리가 위태로운 게 느껴졌을 것이다.
거기서 오는 박탈감과 위기감.
그리고 에단을 향한 시샘과 적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벼이 여겼다.
박탈감, 위기감, 질투, 시샘, 적의, 공포, 두려움.
과거부터 에단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시선들이었다. 에단은 일찍이 깨달았다.
사연 없는 이는 없다. 개개인의 사연에 매몰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후회는 늦어.’
후회는 언제나 늦다.
아무리 일찍이 후회해도, 결국은 하게 되는 생각이 바로 후회였다.
에단은 후회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복수는 끝냈다. 주동자는 모두 죽였다.
그렇다고 후련해진 것은 아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다. 에단은 책임을 통감한다.
그렇기에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참극은 한 번이면 족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물론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권력이 필요했다.
언제까지 마다할 수는 없었다. 블란테를 움직이려 한 이상 그 책임을 져야만 한다.
에단은 벨몬트를 만나러 가기 전 영지를 들렸다. 영지민들은 이미 블란테의 상황이 어찌 됐는지를 알고 있었다.
최근까지 행상인이 오지 못해서 힘들던 생활이 많이 나아졌다. 에단은 영지민의 표정에 깃든 불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에단은 마을의 촌장을 찾아갔다.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집의 내부는 단출하지만 소박한 정이 느껴졌다.
촌장은 찬장을 뒤져 작은 나무 찻잔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 찻잔 안에 따뜻한 차를 담았다.
에단은 사양했지만 촌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에단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입에는 맞으시련지요.”
촌장이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은 딱히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이런 변변찮은 마을에서 마실 수 있는 차의 수준이 그리 좋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차의 맛은 딱 예상대로였다. 향기로움보다는 흙냄새가 앞섰다. 하지만 에단은 천천히 차를 음미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보잘 것 없는 저에게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죠.”
촌장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비록 작은 시골 마을의 촌장이었지만, 촌장의 얼굴에서는 현기가 느껴졌다. 에단은 물끄러미 촌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저는 블란테의 후계자입니다.”
“……그렇군요.”
촌장은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그런 촌장을 향해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블란테의 차기 가주로서 드리는 말입니다. 영지를 떠나시죠.”
“…….”
에단의 말을 들은 촌장은 아무런 말없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충격을 받지도, 놀라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는, 묘하고 기이한 표정이었다.
“마땅한 이유가 있으신 거겠죠?”
촌장의 물음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희는 더 이상 영지를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촌장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촌창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겠습니다.”
“…….”
촌장의 대답에 에단은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평생을 살아온 삶의 터전을 포기한다는 것.
그건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이야기하죠.”
“이전할 지역은 결정해 뒀습니다. 취업을 원하는 이는 도울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재물도 드릴 겁니다.”
“그렇다면 설득이 조금 더 수월해지겠군요.”
“…….”
에단은 다시 침묵했다.
촌장은 어딘가 초탈해 보였다. 가만히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에단이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붙잡아 뒀나 보군요.”
에단은 문을 나서기 직전 몸을 돌려 촌장을 바라봤다. 촌장은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쭤볼 게 하나 있습니다.”
“편히 말씀해 주시죠.”
“어떻게 그리 빠르게 수긍할 수가 있는 것이죠? 이 마을은 그래도…… 삶의 터전이었을 터인데.”
에단의 질문이 의외였는 듯 촌장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고는 다시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블란테를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록 먹은 건 나이밖에 없지만, 그 세월동안 블란테와 함께해 왔습니다. 가주가 어떤 존재이고, 블란테가 어떤 존재인지 곁에서 지켜보며 자라왔고, 늙어 왔습니다. 공자님이 방황하던 시절도 저는 기억하고 있죠. 심심할 때마다 마을로 내려와서 고성을 지르고 건물을 부수던…….”
“……그만.”
에단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촌장은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클클대며 웃었다.
“그런 도련님도 결국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저와 마을은 평생을 블란테에 의지하며 살아왔죠. 도적들은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일 엄두를 내지 못했고, 매년 범람하는 몬스터들도 블란테가 나서서 막아 주었죠. 그렇기에 이번에도 믿을 뿐입니다.”
“…….”
“어찌, 대답이 되었을까요?”
“충분합니다.”
에단은 촌장의 집에서 나왔다.
묘한 감각이 들었다. 에단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시간이 흐를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에단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씨익 웃은 에단이 지면을 박찼다.
파밧!
에단의 신체 능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영지의 산은 험준했지만, 에단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쏜살처럼 내달린 에단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벨몬트의 동굴 안에 도착했다.
에단이 동굴 안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의를 탈의한 벨몬트가 마중을 나왔다.
벨몬트는 한창 운동을 하던 중이었는지 몸과 머리가 땀에 푹 젖어 있었다.
“허억, 허억. 에단 님?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에단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벨몬트를 훑어봤다.
처음에 빈약하던 몸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벨몬트의 몸에는 오밀조밀한 근육들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시선에 민망함을 느낀 벨몬트가 손으로 제 몸을 가렸다.
나름대로 자신감이 붙은 육체였지만, 에단이랑 비교하면 초라했기 때문이다.
에단의 강인한 근육은 옷 안에서도 선명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안 쓸쓸했냐?”
에단이 대뜸 물었다.
예상치도 못한 의외의 질문에 벨몬트가 눈을 끔뻑였다.
쓸쓸하다라.
혼자는 익숙했다. 어둠은 친숙했다.
자신은 위대한 밤의 일족으로서 자부심을 지니며 살아왔다. 언젠가는 당당히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포부도 있었다.
하지만 벨몬트는 많은 게 달라졌다. 운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별것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인연이었고, 만남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썩 즐거웠던 것 같다.
“조금 쓸쓸했던 것 같기도요.”
“그럴 것 같더라.”
벨몬트와 에단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그래도 가끔 녀석들이 찾아옵니다. 뭐 대부분 보충제를 얻으러 오는 것 같긴 하지만…….”
“보충제 좀 열심히 만들어 봐. 제대로 보급할 예정이니까.”
“하하, 저도 그러고 싶기는 하지만 그게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던 도중 에단이 말했다.
“용건이 있어.”
“말씀하시죠.”
“여길 떠나자.”
“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제는 어쩔 수 없게 됐어. 이건 권유가 아니야.”
에단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에단의 표정을 본 벨몬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제가 에단 님께 저항해 봤자 의미는 없을 테고……. 따로 준비할 것도 없으니 바로 가시죠. 하지만 이유는 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으니 가면서 말하지.”
에단이 가파른 산길을 질주했다. 벨몬트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에단을 보며 헛숨을 집어삼켰다.
에단을 뒤쫓아 갔다. 에단이 힐긋 뒤를 바라보며 속도를 맞췄다.
“속도 낮출 테니까 날개는 펼치지 말고 들어.”
“……네.”
에단은 간략하게 벨몬트를 데려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너무 스케일이 거대해 멍하니 이야기를 듣던 벨몬트의 동공이 흔들렸다. 벨몬트는 경악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오르번……이라고요?”
“어. 듣기로는 꽤나 오래 산 노인네라고 하던데.”
“설마 오르번이 진짜 실존하는 인물일 줄이야…….”
벨몬트가 침음을 흘렸다. 벨몬트의 반응을 보고 조금 관심이 생긴 에단이 물었다.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나 봐?”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저 또한 전해들은 이야기가 전부라서요. 하지만…… 만일 그가 제가 아는 오르번이 맞다면…….”
벨몬트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는 정말 위험한 인물입니다.”
* * *
에단은 벨몬트를 이끌고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러고는 곧장 아카데미로 향했다.
블란테의 이전은 당장 시도할 생각이 아니었다. 지금 준비해야 할 것은 바로 드래곤의 부활이었다.
‘이틀인가.’
이틀 내에 준비를 끝마쳐야 한다. 급하게 벨몬트를 데려오기야 했지만 걱정이 들었다.
‘오르번의 말대로라면 문제가 아니겠지만…….’
벨몬트의 어벙한 얼굴을 보니 또 신용이 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도착한 에단은 곧장 작업 중인 창고의 문을 열었다.
창고 안은 작업이 한창이었다.
벨몬트는 창고의 문을 열고 드래곤의 사체를 보자마자 입을 벌리며 탄성을 흘렸다.
“진짜 드래곤…….”
“미안한데, 감탄할 시간이 없거든?”
에단이 벨몬트를 데리고 오르번 앞에 섰다. 오르번은 벨몬트를 보자마자 작은 감탄을 흘렸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정말 뱀파이어를 데리고 왔군.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거지?”
“뭔 방법이야. 그냥 있으니까 데려왔지. 그것보다 시간도 얼마 없는데 가능하겠어.”
에단의 물음에 오르번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충분해. 아직 뱀파이어의 진가를 잘 모르나 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