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화] 성자 등장 (8)
메이는 그제야 실책을 깨달았다.
‘아, 내가 오판했구나.’
에단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메이는 에단에게 정보 길드를 바쳤지만, 그녀의 모든 것을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에단이 이번에 요구한 것은 정보 길드로서가 아닌, 메이의 본질이었다.
그녀는 불안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그렇기에 늘 가장 뒤에서 사건을 관망했다. 까마귀들도 그것에 동의했다.
까마귀들은 메이가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우려했으니.
이번 일은 메이의 의사가 아니었다.
까마귀의 의지였다.
그녀를 수호하는 까마귀들은 에단은 아직 신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까마귀들은 에단을 시험했다. 마지막 대면했을 때만 해도 까마귀들은 에단을 상대로 승리를 점쳤다.
까마귀는 마스터를 상대로 두고도 압도할 수 있는 저력을 지니고 있었다.
에단과 함께 다니던 노집사를 상대로는 이기기 어렵다고 말했지만, 에단은 이제 갓 스무 살에 들어선 자였다.
그렇다고 하룻강아지라는 말은 아니었다.
사자는 새끼 때도 사자였고, 범은 어려도 범이었다.
그리고 메이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메이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트라우마. 그것이 메이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렇기에 까마귀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에단을 시험했다.
예상했던 대로 에단은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의 여파는 그녀의 상상보다 막강했다.
까마귀들이 그녀의 그림자에서 뽑혀 나갔다. 심령을 옥죄는 압도적인 기세에 메이의 머리는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메이는 결국 항복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진심 어린 사죄를 내뱉은 순간, 공간을 가득 메웠던 기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허억!”
메이가 땅을 짚었다.
입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심장을 움켜쥔 기세가 사라지자 메이는 간신히 숨을 토해 냈다.
그것들은 까마귀들도 마찬가지였다.
유형화된 까마귀들은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다가오는 에단을 노려봤다.
에단이 까마귀를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에단은 까마귀가 표출하는 감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적의였다.
“왜? 더 해볼까?”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에단은 싸움을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손속에 사정을 둘 생각이 없었다. 여파를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다.
다시는 건방지게 고개를 세우지 못할 정도로 제대로 짓밟을 작정이었다.
에단의 섬뜩한 미소에 까마귀들은 주춤거렸다. 메이가 손을 들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그만하세요.”
까마귀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본인들의 무력함을 실감한 그들이 메이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에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메이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먼저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에단은 물끄러미 메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고요하고 숨 막히는 시선에 메이의 몸이 움찔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메이가 손을 들었다.
“모두 자리를 비키세요.”
이건 정보 길드원들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길드원들은 메이의 명령에 따랐다.
이제 이 장소에는 에단과 메이, 그리고 그녀의 그림자에 숨어들어 간 까마귀들만이 남아 있었다.
잠시 눈을 감은 채 고민하던 그녀가 착용하던 가면을 벗었다. 그러고는 적용하던 마법조차 해제하자 그녀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안녕하십니까, 에단 블란테님.”
메이는 처음으로 에단에게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두 개의 검은 귀가 쫑긋거렸다.
메이의 정체는 흑묘족이었다.
* * *
에단은 메이의 실체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명확하게 명시가 되진 않았지만, 작가가 여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에단은 구태여 메이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큰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게 옳았다.
메이가 큰 결단을 하고 가면을 벗었지만 에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에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메이를 응시했다. 메이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뭐지?’
메이의 예상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뭔가 엄청난 반응을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나 무덤덤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어딘가 모르게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 어쩌라고.”
“…….”
이어지는 에단의 말은 촌철살인이었다. 메이는 충격과 상처가 공존하는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놀라지 않으셨나요?”
“내가 왜 놀라.”
에단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단 주위에는 별의별 놈들이 몰려 있었다.
반인반수 휴고.
세계수의 수호자 헨리.
엘프들의 족장 르니엘.
전설적인 어쌔신 네이드.
전설적인 용병 사미라.
최후의 뱀파이어 벨몬트.
성자이자 용사가 될 예정인 드레이.
당장 주변만 봐도 그런 놈들의 집합소다.
최근에는 드래곤까지 처치했고, 수백 년 동안 실존된 드워프까지 찾아내 세력으로 흡수했다.
고작 흑묘족이라는 정체 하나 때문에 놀랄 이유는 없었다.
“저는…….”
“아아, 그만.”
메이가 착잡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질색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벌써 예상이 됐다.
에단은 그녀의 처절하고 처연한 사연에는 관심이 없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에단이 원하는 것은 그녀가 토해 낼 정보였다.
에단은 흑묘족에 대해 알고 있었다.
대다수의 수인들처럼 멸족의 길을 피하지 못한 수인이 바로 흑묘족이었다.
다른 수인들과 차이가 있다면 흑묘족 자체는 지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뱀파이어와 조금 흡사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들은 지하에 더 가까운 존재들이면서도 대륙에 위명을 떨치고, 어둠속에 군림하던 이들이었다.
흑묘족도 결은 비슷하다.
대륙에 있으면서도 한쪽 발은 어둠에 디딘 이들. 그리고 보통 그런 이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대충 보기만 해도 처절한 사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에단은 그런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에단이 메이를 만나러 온 용건은 단 하나였다.
“흑마법사의 위치.”
메이를 내려다보는 에단의 눈은 차가웠다. 그 무심하고 삭막한 눈빛을 본 메이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걱정하고 고민하던 게 부질없어진 것 같네.’
에단은 지금 메이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과거와 종족 따위는 에단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에단 앞에 있는 것은 정보 길드의 수장일 뿐이었다. 에단이 원하는 정보를 뱉어 내야 하는.
그렇게 생각하니 무거웠던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했다.
“……제가 알고 있는 실력 있는 흑마법사는 단 한 분입니다.”
사특한 힘을 숭상하는 잡다한 흑마법사는 아직 대륙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하지만 에단이 찾는 흑마법사는 그런 질 낮은 부류가 아니었다.
“오르번.”
한때 대륙에 공포로 군림하던 흑마법사의 이름.
그의 이름이 메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 *
“옘병할.”
에단은 욕설을 지껄였다. 욕설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메이를 통해 위치는 전달받았다. 하필 전달 받은 위치가 엿 같은 게 문제였다.
잿빛 늪지.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심장부.
지구로 치면 아마존 정도로 칭할 수 있는 장소였다. 거대한 나무들과 마수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울창한 밀림 같은 지역이었다.
당연히 사람은 살지 않는다. 나무면 환장하고 살아가는 엘프들도 거르는 지역이었다.
주인공이 히든 피스를 얻기 위해 향했다가 개처럼 구른 걸 기억하고 갈 생각을 접어 둔 장소였다.
그곳에 있는 능력은 에단에게는 딱히 필요하지 않은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흑마법사의 위치가 이 빌어먹을 정글의 중심부라는 것.
‘염병할 진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왜 하필 있어도 이딴 엿 같은 곳에 터를 잡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단이 게이트를 이용해 거리를 단축한 뒤, 지도를 보고 방향을 설정했다. 그러고는 달렸다.
완성된 신체와 마스터의 경지, 그리고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지닌 에단은 말을 타는 것보다 두 다리로 직접 뛰는 게 가성비가 잘 나왔다.
마나를 다루는 것에 있어 어느 정도 도가 튼 에단이기에, 마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딱히 지치지도 않았다.
에단은 잿빛 늪지에 들어서기 전 메이에게 전달받은 조언을 따라 마법처리가 되어 있는 부츠를 신었다.
질척거리는 늪지를 밟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치밀었다.
같이 말동무라도 하면서 갈 인원이 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드래곤의 시체를 부활시키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될 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결국 에단은 단독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후우.”
에단이 밀림의 앞을 바라봤다. 초임부터 늪지였다.
벌써부터 눅진한 습기가 피부에 들러붙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도 불쾌했고, 머리가 축축하게 젖는 기분도 짜증이 치밀었다. 깊은 한숨을 토해 낸 에단이 늪지 안으로 들어섰다.
까악―
에단의 어깨에 눌러앉은 까마귀가 부리를 통해 방향을 지시했다. 에단이 한숨을 푹 내쉬며 그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촤악!
늪지를 가르고 악어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은 몰랐고,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에단은 이곳에 오기 전 적당한 철검 하나를 챙겨 왔다. 맨손으로 뭘 만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꺼져.”
에단이 경멸을 가득 담아 검을 휘둘렀다.
늪지에서 튀어나온 악어는 보기만 해도 불쾌하게 생겼다. 에단이 마나를 가득 담아 검을 휘두르자, 수십에 달하는 악어 몬스터들이 전멸했다.
벌써부터 귀찮아진 에단은 피어를 끌어올렸다. 피어는 에단의 마나처럼 무한대가 아니었다.
에단의 정신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아무렇게나 남용해서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에단은 피어를 분출하며 달려 나갔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까마귀가 저 멀리 사라진 것이다.
에단의 기세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는 있지만 이동하는 까마귀를 범위에서 완벽하게 배제할 수는 없었다.
“옘병할.”
에단이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깊은 숨을 토해 낸 에단이 피어를 회수했다. 그러자가 까마귀가 다시 다가왔다.
까마귀의 검은 눈동자가 재수 없게 느껴졌다.
“빨리 안내해라.”
에단이 스산한 경고를 내뱉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몬스터들이 에단을 먹잇감으로 인식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얼씨구.”
몬스터를 바라보는 에단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