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성자 등장 (7)
― …….
― …….
메이와 한니발은 둘 다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그 둘은 선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자리에 올라가는 길은 아름답지 않았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고, 고혈을 빨아 가며 올라선 자리였다.
하지만 에단의 광기 어린 모습에는 차마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의 등장.
그로 인해 얼마나 큰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발생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에단은 그런 것들을 등한시했다. 한니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내가 옳았구나.’
오히려 에단이 도덕이나 정의심 따위에 휘둘렸다면 이렇게까지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니발은 묘한 안도감이 드는 한편 소름이 끼쳤다.
에단의 계획은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었다.
전무후무한 용사의 등장.
그리고 그가 지지하는 세력은 아카데미와 한니발의 상단이 될 것이다.
제국과 카이제르, 신성 왕국의 견제?
그쯤 되면 우습지도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제국민을 통제하려고 한들 민심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정보 길드가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대륙 전체에 소문이 뻗치는 건 한순간이었다.
한니발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흥분감과 함께 고양감이 차올랐다.
한니발과 에단이 침묵하고 있자 에단이 입을 열었다.
“메이, 알고 있는 게 있을 거 아니야. 계속 감추려고?”
―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자들은 너무 위험한 존재입니다.
메이의 말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아직 에단이 어떤 인물들과 조우했는지 모른다.
흑마법사는 확실히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특히 메이가 알고 있는 자들은 흑마법이라는 분야의 종사급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봤자 ‘군주들’에 비하면 발톱의 때 같은 존재들이었다.
에단은 그런 군주의 힘을 흡수했다.
비록 군주가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많은 힘의 제약을 받은 상태라고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더불어 에단은 죽은 나무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흑마법사와 에단은 뒤집을 수 없는 상성의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접선 장소는 신경 쓰지 마. 내가 그쪽으로 갈 거니까.”
에단이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토해 냈다.
“후우.”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는 고개를 들었다.
천장이 보였다.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천장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책 속에 빙의한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이 남았다.
상념이 꼬리를 물었다.
에단은 이럴 때의 대처 방법을 알고 있었다.
‘몸을 움직여야겠어.’
이럴 때일수록 땀을 흘려야 했다.
* * *
“후우.”
운동을 끝낸 에단이 깊은 숨을 토해 냈다. 꽤나 긴 시간 동안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드워프들과 가문의 대장장이들의 합작품은 현대에 있을 때 사용했던 명품 운동기구들 못지않았다.
인터벌을 통해 몸이 달아오르면서 각 근육에 자극을 주었다. 에단의 몸에서 하얀 김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때마침 학생들이 없는 시간이었기에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상의를 탈의한 에단의 몸에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고, 강인한 근육에는 세밀한 결이 보였다.
‘실수하면 안 된다.’
에단은 가벼운 마음을 버렸다.
이건 게임 따위가 아닌,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동안 에단은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왔다. 류태신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과 쌓은 관계를 믿지 않았기에 그는 늘 고독했고 혼자였다.
하지만 에단은 스스로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에단이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검을 휘두르면서 생긴 굳은살이 보였다. 에단은 이 몸으로 많은 인간관계를 쌓아 왔다.
결코 긴 시간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까지 에단이 쌓은 인간관계는 류태신 시절보다 깊었다.
에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낯선 감정이 들었다.
두려움.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에단은 두려웠다. 지금 쌓아 올린 관계가 모래성처럼 무너질까 봐.
류태신일 때 그는 타인을 믿지 않았다.
늘 본인 스스로를 믿었다. 시기와 질투, 견제는 일상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실력으로 깨부쉈다. 동양인이라는 편견과 한계를 갈아 치우면서 성장했다.
그렇게 결국 무패의 황제로 세계에 군림했다. 도전자들은 류태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권태를 느꼈다. 모든 걸 이뤘다.
챔피언은 더 이상 세상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경쟁심도, 불안함도, 도전욕도 모든 것이 시들해지고 있었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
너무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때우기 위해 책을 읽었다
한데 그 책 속에 들어오게 됐다.
처음에는 즐거움뿐이었다.
남들의 시선을 바꾸고, 성장하고, 경쟁하는 것은 에단이 움직일 원동력이 되었다.
마치 실감나는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안일한 실책으로 가문의 사람이 피를 흘렸다.
득실을 따지는 것이 아니었다.
에단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리고 언제든지,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휴고, 가토, 네이드, 헨리, 리사, 그 외에도 많은 인물들.
에단이 쌓아 올린 관계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죽음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제국과만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칼을 들이미는 상대는 더 있었다.
‘지면 죽는다.’
에단은 긴장했다.
이건 자신만의 승부가 아니었다. 에단의 오판으로 언제든지 동료가 죽어 나갈 수 있었다.
에단은 그들의 죽음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할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미래를 알고 있다.
‘피하면 모두 죽는다.’
지하의 범람은 예정되어 있는 일.
에단이 사전에 틀어막아 그 속도를 지연시켰다고 한들 예정된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실수는 허용되지 않는다.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밝은 달빛이 에단의 얼굴을 비췄다. 달빛을 머금은 에단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 * *
다음 날이 밝았다.
에단은 수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수업은 오롯이 블란테의 기사들에게 일임했다. 애당초 에단의 수업 방식은 몸을 쓰는 것들이 주를 이뤘다.
체계적인 검술을 배우는 데에는 블란테의 기사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학생들의 체력은 이미 궤도에 올라 있었다.
에단이 작정하고 굴리려고 한다면 방법이야 무궁무진 했다.
하나 그렇게 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제국의 반응은 조용하지만 그 의도는 예상되었다.
‘간을 보겠다 이거겠지.’
에단은 상대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었다. 에단은 크리스토를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그렇기에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녀석은 나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어.’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같잖지도 않았다.
동질감?
류태신이 활동하던 시절 세계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격투기가 부흥하던 시점이다.
각 체급마다 천재들과 괴물들로 득실거렸다.
사람들은 말했다.
동양인의 한계는 명확하다고. 이루지 못할 꿈은 꾸지 말라고.
하지만 류태신은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보란 듯이 챔피언이 되었다. 괴물과 천재들도 결국은 류태신을 두려워했다.
에단은 웃었다. 그건 결국 크리스토도 다르지 않을 거다.
오만한 천재.
에단에겐 익숙했다. 이번에 어떻게 짓밟아 줄지 고민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어왔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원대한 목표 따위는 주인공이 짊어질 것이라는 형편 좋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에단은 본격적으로 달려 나갈 생각이었다.
툭. 툭.
에단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만일 오전 내에 연락이 없다면 에단은 직접 메이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우웅―
테이블 위에 있던 수정구가 반응했다. 에단은 곧바로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수정구 너머에는 메이의 모습이 보였다.
― ……잠깐 실제로 얼굴을 뵐 수 있을까요?
메이가 조심스럽게 말했고 에단은 수긍했다. 어차피 이제는 에단이 직접 움직여야 했다.
채비를 갖춘 에단은 게이트로 향했다. 많은 짐은 필요 없었다. 메이가 있는 지역에는 게이트 마법진이 있었다.
에단이 에르미온의 도움을 받아 곧장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마법진 앞에 대기하던 정보 길드원의 안내를 받아 메이 앞에 도달했다.
메이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면보 같은 가면을 쓴 채 신비스럽게 보이는 모습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단은 딱히 그 모습을 지적하지 않았다.
“……이렇게 뵙는 건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래.”
무감정하게 대답한 순간,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종의 기운이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익숙한 기운이었다. 마나의 기운은 죽은 마나였으니까.
에단이 웃었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웃음이었다.
메이는 지금 또다시 에단을 시험하고 있었다.
“웃기지도 않네.”
에단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단의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메이는 정보 길드를 넘기겠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정보 길드의 수장은 이제 메이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런 주제에 메이는 지금 에단을 시험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았다.
에단은 마나를 끌어올렸다. 에단은 지금 걸어 다니는 세계수와 같았다.
더불어 블랙 오우거와 드래곤의 피어까지 흡수한 상황이었다.
그런 에단이 기세를 방출했다.
쿠구구구구―
건물이 비명을 질렀다.
주위에 숨어 있는 쥐새끼들을 향한 배려는 없었다. 이 건물에는 메이의 정보원이 상주해 있었다.
정보원이 숨어 있다는 게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메이를 보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과연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에단이 조소와 함께 피어가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그 기세는 메이를 향하지 않았다.
“커헉―!”
메이의 그림자가 끄집어졌다. 에단은 저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소위 까마귀라고 불리는 자들. 오직 메이를 수호하고 메이를 향해서만 충성을 보이는 그녀의 수족.
메이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건 원작에서도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으니.
하지만 에단은 그딴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와 까마귀 새끼들이 감히 자신을 시험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에단은 키우던 개가 이빨을 드러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저 철저하게 되새겨 줄 뿐이다. 너는 그저 내 명을 따르는 개일 뿐이라고.
커헉―!
메이의 주변에 그림자가 일렁였다. 에단은 그것이 적대심의 표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힘의 근원은 과연 무엇일까.
에단은 신경 쓰지 않았다.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저 난폭하고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를 뿐이었다.
“개새끼면.”
에단이 말했다.
메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숨어 있던 쥐새끼들이 에단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씩 픽픽 쓰러졌다.
“알아서 기어.”
에단이 으르렁거렸다.
기세가 유형화되었다. 유형화된 기운이 실내를 잠식했다. 감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면 그 눈을 멀게 할 생각이었다.
“꺼헉…….”
메이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용서…….”
힘겹게 내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내를 집어 삼킨 포악한 기운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