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성자 등장 (5)
툭.
목검을 떨군 가토가 양손을 들었다. 항복의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고생했다.”
에단도 겨누던 목검을 회수했다. 그제야 가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수준 차이네.’
모골이 송연해졌다.
만일 에단의 손에 있는 게 진검이었고, 오러가 서려 있었다면 자신은 벌써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러 심경이 뒤섞였다. 주를 이루는 감정은 씁쓸함이었다.
“아야야…….”
야수화로부터 돌아온 휴고가 턱을 매만지며 가토에게 다가왔다. 에단의 무릎에 얻어맞은 휴고의 턱은 붉게 달아올랐다.
목검을 아무렇게나 던진 에단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어때, 검술 좀 늘지 않았냐?”
“……누구한테서 배우신 겁니까?”
“뭘 누구한테 배워. 너 수업하는 거 좀 보고, 기사들 훈련하는 것도 스윽 보고 눈대중으로 익힌 거지.”
에단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가토와 휴고는 벙 찐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저도요.”
둘의 어깨가 추욱 늘어지자, 에단은 피식 웃으며 둘의 등을 두드렸다.
“정신 차려. 나 보고 좌절한 놈들만 따져도 한 트럭이니까.”
“……한 트럭? 그게 무슨 말입니까?”
“뭐, 짐마차 여러 대 합쳐 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아니, 그게 위로입니까?”
가토가 황당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살면서 이렇게 오만한 위로는 처음 들어 봤던 것이다.
“사실인데 어쩌라고. 그럼 움직였으니까 배나 좀 채우자고.”
에단이 휴고와 가토를 이끌고 연무장 밖으로 나서려고 하자, 렉사르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아닙니다.”
렉사르가 고개를 젓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재미없는 놈. 가자, 밥이나 먹게.”
에단의 말에 렉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렉사르는 멀어지는 에단의 등을 지그시 바라봤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괴물이군.’
천재, 아니, 그 말로 표현하기도 부족할 정도였다. 에단의 모습을 보고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였다.
괴물.
괴물이라 불리우며 적들에게 공포로 군림하던 렉사르는 오늘 진짜 괴물이 무엇인지 목도했다.
에단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에단이 보여 준 것은 평소와 달랐다.
에단에게 목검은 익숙하지 않은 무기였다. 낯선 무기를 쥔 채 강자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에단이 보여 준 검의 숙련도.
그것은 하루 이틀 수련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재능 있는 자가 뛰어난 스승 밑에서 수년을 갈고닦아야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
그런 경지를 에단은 어깨 너머 본 것들로 익혔다고 한다.
그걸로 모자라 완벽하게 실전에서 사용했다. 각각의 검술이 추구하는 방향은 모두 달랐지만, 목적지는 같았다.
실전성.
에단의 검술은 완벽한 실전성을 품고 있었다. 아름다운 검술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날카로웠다.
실제와 가짜를 구분해 내는 에단의 눈은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마치 미래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안 오냐?”
에단이 고개를 돌려 우두커니 서 있는 렉사르를 향해 말했다. 에단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렉사르가 발을 옮겼다.
* * *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총 여섯 명이 죽었습니다.”
“허.”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던 크리스토가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군.’
크리스토의 예상대로 에단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보다 더 격렬하게 대응했다.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아카데미에 대해 주도적으로 악담을 일삼던 고위 귀족 여섯이 비명횡사했다. 배후가 누구인지는 훤했다.
‘전쟁을 원하는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어떤 이유로 이렇게 과격한 행보를 보이는 것일까.
“흐음.”
크리스토가 생각에 잠겼다. 그 또한 에단의 마음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반응을 취해야 할까.’
공개적으로 아카데미와 블란테를 비난하는 여론을 취해도 상관없었다. 이미 민심은 움직이고 있었으니.
‘조급해서 한 오판인 것인가?’
대세의 흐름은 기울고 있었다.
이번에 블란테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회복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역시 흥미로웠다. 크리스토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잠시 기다리지.”
어차피 이제 곧 성녀의 순례가 시작된다.
‘과연 이번에는 어떻게 대응할지.’
벌써부터 기대감이 일었다.
* * *
대련을 마치고 에단과 휴고, 렉사르 일행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렉사르는 접시에 담긴 음식들을 먹는 듯 마는 듯하며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을 입에 가득 넣은 에단이 눈살을 찌푸리며 렉사르를 노려봤다.
“뭐야?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말해.”
“……아닙니다.”
“그럼 작작 보고 먹기나 해.”
“……그러죠.”
렉사르는 신기한 눈으로 에단과 휴고, 그리고 가토를 바라봤다. 저들은 서로 경쟁하듯 음식을 비워 냈다. 접시들이 쌓이고 있었다.
‘……저게 전부 뱃속에 들어간다고?’
그런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셋은 계속해서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고 있었다.
기사들은 본래 대식가다. 그만큼 활동량이 받쳐 주니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저 셋이 먹는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식당에는 넷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힐긋거리며 시선을 던졌다. 렉사르는 묘한 수치심을 느끼며 묵묵히 접시를 비워 냈다.
식사를 마친 에단은 그들과 헤어져 에르미온에게 향했다. 그녀가 동참하기로 결정한 이상, 꽤나 계획이 수월해질 것이다.
‘이렇게 된 거 역대급으로 판을 벌려야겠어.’
시민들의 뇌리에서 성녀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지게끔 만들 예정이다.
오늘은 에르미온이 수업이 없는 날이었기에, 그녀에게 쓰라고 내어 준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의 문을 열자, 에르미온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봤다.
“노크 같은 건 팔아먹은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에단의 뻔뻔한 태도에 인상을 구긴 에르미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이제 같은 배를 탔으니까 계획도 공유하려고. 정확히 말하면 수정이지만.”
“……이렇게 된 김에 작정하고 부려 먹겠다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는데?”
“오, 눈치는 빠른데?”
“좆까.”
에르미온이 눈을 부라리자 피식 웃은 에단이 소파에 앉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에단을 노려보던 에르미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가고 있었다.
“후우, 그래서 뭔 계획을 수정하는 건데.”
그녀에게도 예민한 사항이었다. 에단이 벌일 일의 규모가 워낙 큰 터라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마탑까지 엮여서 위험할 수 있었다.
대륙에 막강한 위명을 떨치는 마탑일지라도 제국과 정면 승부를 펼치면 승산이 없었다.
“드래곤.”
에단이 대뜸 드래곤을 언급하자, 에르미온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드래곤은 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체. 그걸 쓰려고.”
“……뭐, 먹은 거 토해 내라 그거야? 장난해?”
“누가 토해 내래? 사람을 뭘로 보고.”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에르미온은 경계 어린 시선을 풀지 않았다. 그동안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건 아니고. 그걸로 뭘 좀 해 보려고.”
“한다고? 뭐를?”
“아직 우리가 드래곤을 잡았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 거의 없잖아.”
“……그런데.”
“내가 왜 묵혀 뒀겠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쩌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에르미온에 시선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서 지금 설명해 주려고 하잖아. 띠꺼운 표정 그만 짓고.”
“……옘병.”
에르미온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에단과 대화만 하면 늘 이렇게 되는 것 같았다.
“드래곤 슬레이어. 크, 이름만 들어도 감이 오지 않아? 이제는 사라진 전설 속 용사 느낌이 오잖아.”
“……그건 전에도 들었던 거 같은데.”
“원래는 뭐 대충 용사의 업적으로 뭉뚱그리려고 했는데, 상황이 달라졌어. 내 옆에 대마법사가 둘이나 있잖아.”
“둘? 한 명 더 있다고?”
“어, 데아티르도 넣으려고.”
“……그 재수탱이가 한대?”
“아, 아직 결정은 안 했어. 하게끔 만들어야지.”
“…….”
에르미온이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싶은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그런 시선에도 에단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을 이었다.
“드래곤 한번 되살려 보려고.”
“…….”
에단의 말에 잠시 어벙한 표정을 짓던 에르미온이 입을 뻐끔거렸다. 그녀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미, 미친!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나 있는 거야?”
“왜 몰라.”
“아니, 너는 몰라. 알면 그렇게 태평한 소리를 못 하거든. 되살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그거 사령술이라고! 대륙 공적!”
에르미온이 빼액 소리쳤다. 대체 무슨 계획이 있는지 한번 들어볼까 했는데, 이건 들어볼 가치도 없었다.
사령술은 이제는 양지에서 완전히 실존된 흑마법사들의 전유물이었다.
에르미온은 그런 범죄에 가담할 생각이 없었다.
“무슨 대마법사면 뭐든 할 줄 아는 줄 알아? 나는 흑마법 따위에 관심도 없고! 재료도…….”
쉼없이 말을 토해 내던 에르미온의 말끝이 흐려졌다. 에단의 손끝에서 짙은 검은색의 마나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깊디깊은 어둠. 죽은 마나의 힘이었다.
“재료는 충분하고. 그리고 명분?”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지금 누구랑 싸우는 건지 잊었어? 우리는 지금 신성 왕국이랑 박 터지게 싸우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대륙 공적이 될 일은 없으니까.”
“……어떻게 자신하지?”
“그야, 대륙에서 유일한 성자이자, 위험 속에서 엘프를 구출하고, 드래곤을 처단한 용사가 우리를 지지할 거니까.”
“……뭐라고?”
“못 들었어? 용사가 우리와 함께한다고. 그것도 성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막강한 신성력을 흩뿌리면서. 연출도 대략 준비해 놨어.”
“…….”
에르미온은 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에르미온이 입을 열었다.
“너 미친…… 대륙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일 생각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언제 사기를 친다고.”
“네가 말하는 게 지금 그런 거잖아! 드래곤을 살려서 사람들을 위기에 빠트린 다음…….”
“희생자는 별로 없을걸. 그리고 말로만 살리는 거지. 그냥 걸어 다니는 인형 정도로 해도 충분해. 전투력도 필요 없어. 대충 용병이랑 기사들 나가떨어지게 한 다음, 용사가 나타나서 슥삭.”
에단의 눈에서 광기 어린 귀화가 피어올랐다.
에르미온은 에단의 눈빛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에르미온을 바라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역대급 용사의 등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