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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격투천재-255화 (255/398)

◈ [255화] 성자 등장 (3)

크리스토는 옥좌에 삐딱하게 앉은 채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일정한 리듬감으로 움직이는 검지에선 소리가 흘러나왔다.

툭. 툭.

“흐음.”

그는 지금 높은 곳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간만에 즐거운 여흥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체스 기사와 체스를 두더라도 현실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크리스토는 약점이 보인 상대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곧바로 반응이 왔다.

‘역시인가.’

크리스토가 입꼬리를 올렸다. 만일 순전히 당하기만 했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그때 정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크리스토가 시선을 던지자 정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흰 갑주에 새겨진 황금색 독수리의 문양.

“오, 알렉스 님. 바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크리스토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금발의 가까운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싸늘한 인상의 사내.

알렉스 카이제르가 크리스토 앞에 찾아왔다. 알렉스의 푸른 동공이 천천히 주위를 훑는다.

그가 풍기는 기세는 마치 잘 벼려진 칼 같았다. 자칫하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

하지만 크리스토는 입가에 머금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그저 싱글거리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알렉스와 크리스토의 시선이 마주쳤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

“편히 말씀하시지요.”

크리스토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알렉스의 이마에 선이 그어졌다.

“장난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호오, 만일 그만두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크리스토가 턱을 괸 채 그렇게 말했다. 두 명의 푸른 동공이 교차했다.

알렉스의 눈빛에 서린 노기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죠.”

그 순간 크리스토가 백기를 들었다. 알렉스는 여전히 물끄러미 크리스토를 응시했다.

“그나저나 바쁘신 분께서 여기까지 행차하신 이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우리한테 희생을 강요하는 것. 이게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희생 말입니까?”

“그래. 이번에 입은 피해. 너희도 알고 있겠지. 백에 달하는 기사가 죽었어.”

알렉스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기사 하나를 육성하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소요된다. 괜히 기사의 숫자가 가문의 번영을 측정하는 척도로 사용되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 가문에 있어서 기사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 사실은 대륙에서 가장 많은 기사를 보유했다고 알려진 카이제르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카이제르는 요 며칠 새에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자랑하던 기사단장은 목숨을 잃고, 그 아래의 기사들도 모조리 죽어 나갔다.

감히 카이제르에게 칼을 겨눈 대상이 누군지, 이 자리에 모르는 이는 없었다.

“아, 그러니까 그게 전부 제 탓이다, 라는 말씀이십니까?”

“부정할 셈인가?”

알렉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멀뚱멀뚱 알렉스를 바라보던 크리스토가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아, 그렇죠. 전부 제 탓이긴 하죠. 뭐, 확실히 제가 좀 오판을 한 것 같네요. 저는 그렇게 유세를 떠시길래 블란테와 좀 비빌 수 있을 거니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잘못된 생각이었던 것 같네요.”

“……뭐?”

“그렇지 않습니까? 명실공히 대륙의 절대적인 검술 명가 블란테, 그러한 그들을 밀어내고 있는 신흥 강자 카이제르. 그 타이틀을 얻을 수 있게 된 이유가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크리스토는 여전히 싱글거리는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알렉스를 응시하고 있는 눈은 스산했다.

크리스토와 알렉스. 가진 무력과 나이의 차이는 확연했지만 크리스토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이번에 블란테는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주축인 가주와 기사단장은커녕, 흑기사 기사단도 그 자리 그대로 있습니다. 지금 피해를 복구하기에 급급할 겁니다. 가문의 미래를 잃었으니 오죽할까.”

이건 크리스토 또한 예상하던 바가 아니었다.

크리스토와 레벨린이 거래하던 것은 맞았으나, 그녀의 가치가 사라진 이후부터는 교류가 없었으니.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됐군.’

숨겨 둔 저력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저력을 불태워 블란테에게 크게 한 방을 먹였다. 그리고 크리스토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크리스토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또다시 말을 이었다.

“이거 참 블란테에게 죄송스러워서 어쩌죠? 그동안 카이제르와 비견되어서 얼마나 기분이 상했을지 가늠되지가 않네요.”

크리스의 비아냥은 멈추지 않았다.

스으으―

말없이 크리스토를 응시하던 알렉스의 기도가 달라졌다. 옥좌 뒤에서 크리스토를 지키는 수호기사가 칼자루의 손을 얹었다.

툭.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가락도 멎었다. 크리스토도 웃음기를 지운 눈으로 알렉스를 응시했다.

알렉스와 크리스토가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쯧.”

알렉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고 기세를 죽였다. 그러자 크리스토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시죠. 어차피 블란테만 정리되면 기사들을 양성하는 거야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또다시 우리 애들을 사지로 내몰라는 건가?”

“아니요. 그냥 기다리고 있으시죠.”

크리스토가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여론전이니.”

* * *

“시발 진짜.”

잭슨이 걸쭉한 욕설을 내뱉었다. 복귀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고행길이 시작되었다.

이번에 향하는 장소는 북부였다. 메이가 말한 요구한 정보도 두루뭉술했다.

‘수인을 찾아오라고?’

벌써부터 머리가 아득해지는 내용.

아니, 신성 왕국도 찾지 못할 정도로 깊숙이 숨어든 녀석들을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찾아낸단 말인가. 억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인력도 많이 붙여 주지 않았다. 자의로 따라온다는 자들도 없었다. 개고생이 빤히 보이는데 누가 여길 간단 말인가.

“하아.”

한숨만 계속 나왔다.

벌써부터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그런데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정보 길드는 어디에나 있다는 소리를 하지만, 북쪽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가 없는데 누가 있겠느냔 말인가.

‘……만일 가던 도중에 신성 왕국이라도 만난다면.’

그대로 비명횡사다. 잭슨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정보원으로 활동하면서 죽음에 대한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 팔자야.”

아무래도 메이에게 잘못 찍힌 것 같았다.

* * *

“흐음.”

보고를 들은 에단이 생각에 잠겼다. 상대의 동향이 바뀐 것 같았다. 생각보다 반응이 빨리 왔다.

‘망나니 새끼는 아니란 거지?’

습격이 쥐 죽은 듯이 사라졌다. 렉사르가 먹잇감을 물어 오지 않았다. 당연히 한니발의 상행도 순조로웠다.

부족하던 물품들이 모조리 보급되었고, 물자가 부족하던 것은 블란테도 마찬가지였기에 빠르게 채워졌다.

블란테까지의 긴 여정에도 단 한 번도 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최근에는 평화롭다고 할 수 있었다.

‘근데 이거 어쩌지?’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깊게 가라앉은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나는 망나니 새끼인데.’

에단은 여기서 관망하거나 멈출 생각이 없었다. 에단이 수정구를 들었다.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자 복면을 눌러쓴 두 명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이드와 에밀라였다.

에단은 얼마 전 찾아온 에밀라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 *

“……휴직하겠습니다.”

“갑자기?”

“저를 머저리로 여기시는 겁니까? 저 또한…… 아카데미의 정보원으로 활동했었습니다.”

“딱히 무시한 건 아니고, 배려해 준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나? 이제 레벨린은 없어. 너는 어쌔신이 아닌, 아카데미의 교수라고.”

“……그 배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놓고 있으라는 소린가요?”

“생각이 앞서가는군.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나 같으면 업무 외 적인 부분에서 따로 터치 없으면 좋을 것 같은데.”

“필요 없습니다.”

에밀라의 단호한 태도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래, 필요 없으면 바꿔 줘야지. 그래서 너는 뭘 하고 싶지?”

에단이 품에 있던 수첩을 던졌다. 수첩을 받아 든 에밀라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건…….”

“읽어 봐.”

에밀라는 천천히 수첩을 넘기기 시작했다.

레벨린의 대한 게 담겨 있던 수첩이다.

세상을 향한 원망, 그리고 저주, 모든 것을 돌이키고 싶어 하는 광기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곳에는 에밀라에 관한 내용도 써져 있었다.

“……레벨린은 지금 어디 있죠?”

그녀는 무언가 예감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호수 같은 깊은 눈동자가 촉촉했다. 그녀의 질문에 에단은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죽였어. 내가 직접. 아주 끔찍하게.”

에단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 에밀라는 잠시 충격받은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기분이 어떻지?”

에단은 말없이 레벨린을 응시했다.

그녀의 동공은 잠시 흔들렸다. 이해는 한다. 레벨린은 그녀의 버팀목이었으니까. 하지만 에단은 잔혹한 질문을 이어 갔다.

에밀라는 대답하지 못했고, 에단은 대답을 강요했다.

“난 후회하지 않아. 아, 한 가지 후회하는 게 있다면 그년을 더 잔혹하게 죽이지 못한 게 한이라고 할 수 있겠지.”

“…….”

“나를 건드린다는 건 그런 소리야. 그게 나의 방식이자, 곧 블란테의 방식이기도 하고. 그깟 사연?”

에단은 같잖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좆이나 까 잡수라고 해. 세상에 사연 없는 녀석이 어디 있어?”

가소롭지도 않았다. 사연팔이는 에단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았다.

“그년은 나를 건드렸고, 나는 응징했어. 단순한 인과일 뿐이야. 그년의 복수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하라고 해.”

에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에단의 시선은 여전히 에밀라를 향하고 있었다. 에밀라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해.”

하지만 에단은 선택을 강요했다.

“뭔가를 하고 싶다고?”

에단이 말을 이었다.

“그럼 해. 다시 어쌔신의 본분으로 돌아가서, 아카데미와 블란테에 대해 악담하는 녀석들의 모가지를 따서 나한테 바쳐.”

에단은 차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는 에단의 노기가 느껴졌다.

에단의 눈살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하고 싶나?”

“…….”

유예 시간 따위 주어지지 않는 질문에 침묵하던 에밀라가 입을 열었다.

“……네, 하고 싶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다짐한 자의 눈이었다.

* * *

[명단은 확인했지?]

에단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이드와 에밀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를 죽여야 할지, 언제 죽여야 할지, 어떤 것을 알아 와야 할지, 모두 숙지하고 있었다.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오자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너무 밝은 곳에 있었다. 그 순간순간이 행복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밤과 어둠, 그리고 달빛은 그녀에게 너무 포근하게 느껴졌다.

에단은 필요한 말만 전달한 뒤 통신을 끊었다. 에밀라와 네이드가 서로를 마주 봤다.

네이드는 작전을 들어가기 앞서 그녀에게 몇 가지 말을 전달했다.

― 최대한 잔혹하게 죽이세요.

상대가 누굴 건드렸는지 알고, 두려워하게끔.

달빛을 머금은 둘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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