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화] 성자 등장 (2)
계획을 진행하기에 앞서, 에단은 짬을 내서 다비를 만나러 갔다. 사미라와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간 소홀하기는 했지.’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하나같이 굵직하던 사건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다비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뭐, 혼자서도 잘하고 있을 테니.’
자신을 앞에 두고 동그란 눈을 치켜뜬 채 호객 행위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맹랑한 꼬맹이였다. 용병들과 상인들 틈새에서 살아남던 녀석이니, 아카데미의 텃세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다비가 있는 건물에까지 당도했다.
중간에 만난 교수에게 다비가 수업을 받고 있는 교실을 물어, 그 앞에서 기다렸다.
대충 시간을 가늠해 온 터라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이 끝났고, 교실 문이 열리며 선생이 나왔다.
“……어?”
선생이 에단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그녀에게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말해 주자 이내 선생이 다비를 불렀다.
에단을 본 다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빼액 소리친 다비가 에단의 명치 쪽을 향해서 정권 찌르기를 날렸다.
* * *
다그닥.
말에서 내린 사미라가 눌러쓴 후드를 벗었다. 붉은 기가 감도는 머리를 질끈 묶은 사미라는 삭막한 눈으로 황량한 마을을 바라봤다.
황폐했다고 봐도 좋은 마을이었다.
생동감이나 활기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관리되지 않은 건물과 길에는 오물들이 가득했다.
이곳은 사람이 살기 좋은 지역이 아니었다. 식물과 동물이 살기 어려운 장소에서는 사람도 살아가기 힘들었다.
사미라가 말 고삐를 잡은 채 마을에 들어서려고 했다. 그러자 사미라의 앞을 막아선 남자들이 있었다. 사미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지?”
“여길 들어가려면 통행료를 내야지.”
두 남자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사미라의 동공이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여길 들어가는데 통행료를 내라고?”
허름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목책을 가리키며 말하자, 두 남자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불만이라도 있나? 싫으면 말을 돌리든가. 돈이 없는 거라면…….”
남자는 음흉한 눈빛으로 사미라를 훑어보며 입술을 핥았다. 사미라가 순간 코웃음을 쳤다.
“아, 그래? 통행료가 얼마지?”
사미라가 순순히 인정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남자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통행료는…….”
쾅!
남자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사미라가 그대로 남자의 복부를 걷어찼기 때문이다.
사미라의 강렬한 일격을 얻어맞은 남자는 목책을 부수며 순식간에 날아갔다.
“카, 칼센! 이년이!”
한순간에 동료가 당한 것을 지켜본 남자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사미라가 시선을 돌렸다. 사미라의 눈에서 섬뜩한 안광이 줄줄 흘러내렸다.
위압적인 기세에 남자는 순간 뒷걸음질 쳤다.
“내가 잘 찾아온 게 맞나? 언제부터 히페니아가 양아치 소굴이 되었지?”
사미라가 표정이 불쾌함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후드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무식하게 거대한 도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웅―!
공기를 찢어발기는 흉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미라가 한 손으로 도끼 자루를 쥔 채 남자를 향해 겨눴다.
“입장료가 필요하다고 했지?”
검은 도끼날에서 푸른빛 오러가 넘실거렸다.
사미라의 압도적인 기세에 남자는 처음의 태도를 잃고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군.”
사미라가 남자와 대치 중이던 순간,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미라가 고개를 돌렸다. 한 손에 술병을 쥔 채 비척거리면서 다가오는 초로의 노인이 사미라를 응시했다.
“……바크리.”
“오랜만이군, 검은 도끼.”
사미라를 바라보던 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 * *
히페니어.
일명 용병들의 둥지.
대륙의 서부에 위치한 사막을 앞에 둔 작은 마을.
이곳은 사람이 살아가기에 있어 그다지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카악, 퉤!”
모래 먼지로 인해 코와 목이 까칠해졌다. 뱉어 낸 가래가 노랬다.
콧잔등을 찌푸린 사미라가 시선을 돌려 바크리를 바라봤다.
바크리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연신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아니꼽다는 듯이 묻는 사미라를 보고도 바크리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웃음이 나오지 않을 리가. 분명 이곳을 떠나갈 때 두 번 다시는 올 일 없다고 하지 않았나?”
“……옘병할.”
사미라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순간 열이 훅 하고 올라왔다.
“다신 오지 않을 것처럼 떠난 검은 도끼께서 다 무너져 가는 둥지에는 왜 찾아왔을까?”
바크리는 의자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물었다. 사미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여기로 온 이유가 뭐가 있겠어. 의뢰하러 왔지.”
“호오, 사람이 필요한가?”
“어. 그것도 쓸 만한.”
사미라의 말을 들은 바크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총명했다.
“이유는?”
“…….”
흐르던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미라가 바크리를 응시했다.
이 둥지의 주인은 저 노인이었다.
그는 거칠고 야만적인 용병들을 키워 온 장본인이었다. 애매하게 말을 빙빙 돌리며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었다.
“전쟁을 준비할 거야.”
“전쟁이라…….”
바크리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바크리가 입꼬리를 올렸다.
“간만에 듣는 재미있는 소식이군.”
“정신 나간 노인네 같으니라고.”
“클클, 너도 더 나이를 먹으면 알 거야. 죽을 때가 다가오니 인생의 재미가 없어. 그래서 수준은 어느 정도로 맞춰야 하지?”
“내 바로 아래.”
“……뭐라고?”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던 바크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누구보다 사미라의 수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지금 네 바로 아래 얘들만 불러 모으란 소리를 하는 거냐?”
“어. 그 이하는 안 돼.”
“……허, 간만에 재밌었으니 됐다. 그만 들어가 보거라.”
바크리가 미련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사미라가 짜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정말 없나?”
사미라의 물음에 바크리가 고개를 획 돌렸다. 바크리의 얼굴에는 짜증과 황당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럼 너는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바크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보다 바로 아래라면 적어도 상급의 마나 유저라는 소린데, 그런 새끼가 많은 줄 알았나? 아니 애당초 그 정도 수준이면 용병질을 안 하지!”
바크리가 가슴팍을 두드리며 말하자, 사미라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다. 용병들의 수준이야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냥 있는 대로 모아 줘.”
“다시 물으마. 대체 뭘 하려는 거지?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용병은 말이 아닌 돈으로 움직이는…….”
바크리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미라가 묵직한 주머니를 탁자 위에 얹었다. 쿵하는 소리가 중량감을 드러냈다.
“전부 금화야.”
사미라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바크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정도면 돈은 충분하겠지?”
* * *
끼이익, 철컥.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네이드는 커다란 가방을 꺼내 들었다.
툭.
잠금장치를 열자 검은 옷과 새파랗게 날이 벼려져 있는 비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이드가 밝은 달이라는 이명을 떨칠 때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것들의 상태는 아직 멀쩡했다.
가방을 펼쳐 놓은 채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네이드가 작게 웃었다.
‘이걸 또 입게 될 줄은 몰랐군요.’
다시는 입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네이드의 의지로 입게 되었다.
툭. 툭.
네이드가 단정하게 매여 있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네이드의 분위기가 바뀌어 나갔다.
집사복을 모두 벗자, 네이드의 육신이 드러났다. 중년을 넘어서 노년에 접어드는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몸 상태였다.
네이드의 몸은 마치 잘 벼려진 비수 같았다.
피하지방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전신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작은 구김 하나 없이 깔끔하게 관리된 집사복을 가지런하게 갠 네이드는, 검은 의복을 몸에 걸쳤다.
네이드의 몸이 어둠에 물들기 시작했다. 검은 의복은 전신의 모든 곳을 가렸고, 눈이 있는 부위만 작게 트여 있었다.
비수들까지 전부 챙긴 네이드가 가방 안에 정장을 조심스럽게 넣고는 고개를 들었다.
명부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가주님의 명령이 아닌, 에단 님의 명을 따르게 될 줄이야.’
네이드가 작게 미소 지었다. 달빛이 비집고 들어오는 창문에서 서늘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스윽―
네이드가 미끄러지듯 발을 내디뎠다. 어딘가 이질적인 발걸음이었고, 그 순간 네이드의 모습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 * *
한니발이 보낸 상인들이 도착했다.
긴 행렬을 이룰 정도로 큰 규모의 행상이었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기뻐했다.
그간 제대로 된 보급이 들어오지 않아 궁핍하게 지난 탓이었다.
상인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피로에 젖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로보다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렉사르와 휴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에단은 자신이 있는 곳까지 느껴지는 피비린내에 미간을 찌푸렸다.
“좀 씻고 다녀라.”
“……아영을 했습니다.”
“지금 말대답하냐?”
“…….”
렉사르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게 지금 막 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한테 할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건방진 눈초리에 코웃음을 친 에단이 물었다.
“습격은 또 없었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습격보다는 실력도 수준도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에단이 턱을 매만지다가 물었다.
“전부 카이제르 쪽이었나?”
“고용된 용병이나 도적 따위들도 보이긴 했으나, 대부분의 구성원은 카이제르였던 것 같군요.”
보고를 모두 들은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제르는 생각보다 노골적으로 에단을 압박하고 있었다.
‘제국은 아직 힘을 쓰지 않는다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꽤나 배알이 꼴리고 있었다.
“고생들 했어. 금방 다시 움직여야 할 테니까 오늘은 이만 쉬어.”
“……알겠습니다.”
렉사르가 작게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자 에단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휴고를 불렀다.
“고생했다.”
“아, 아닙니다.”
휴고는 또다시 특유의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한결같이 순박한 모습에 피식 웃은 에단이 휴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 아앗…….”
휴고는 당황해하면서도 싫은 티를 내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에단이 호주머니에 있던 육포를 하나 꺼내 휴고를 향해 던졌다.
그 순간 휴고가 민첩한 움직임으로 육포를 받아먹었다.
“……저는 개가 아닌데요.”
휴고가 육포를 우물우물 씹으며 불만스럽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