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성자 등장 (1)
“너는 용사이자, 성자가 될 거야.”
“……네?”
드레이가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에단의 말이 너무나도 허황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용사와 성자라니.
그 둘의 단어가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두 이름 모두 드레이에게는 너무 거대하게 느껴져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앞으로 표정이랑 말투 하나하나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거야.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하니까.”
“…….”
드레이는 말없이 에단을 바라봤다.
이야기를 듣고는 있었지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이해가…….”
“이해할 필요 없어. 넌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에단의 확고한 눈빛에 드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드레이의 가슴 한편에서 불안함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에단은 에르미온을 찾아갔다.
에르미온은 에단의 예상보다 충실하게 수업을 진행해 오고 있었다. 에단으로서는 의외의 일이었다.
에르미온은 마탑의 주인이었고, 그만큼 수많은 마법사를 거느리는 위치에 앉아 있었으니까.
홍염의 관장자라고까지 불리는 대마법사인 에르미온이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까지 성실하게 교수직을 수행하고 있을 줄은 상상치 못했다.
에르미온의 수업을 듣고자 하는 학생들은 넘쳐났다.
마탑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들도 에르미온에게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한데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에르미온에게 수업을 받는다.
이것이 얼마나 큰 기회이고, 수혜인지 모르는 학생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르미온의 수업이 끝나기까지 기다린 에단은 에르미온이 나오자 손을 들었다.
에단과 마주친 에르미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개자식.”
마주하자마자 곧바로 거친 말부터 나왔지만, 에단은 피식 웃으며 넘어갔다.
“얘기 좀 하자.”
에단은 에르미온을 데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에단을 보며 에르미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얘기를 할 거면 차라도 내와야 되는 거 아니야?”
“필요해? 필요하면 지금이라도 말 하고.”
“됐어.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애초에 차를 내오라고 해도 내올 생각도 없잖아?”
“알긴 하네.”
에단의 뻔뻔한 태도에 에르미온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서.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뭔데?”
“너도 알 거 아니야.”
“여기 상황?”
“그래.”
에단이 웃음기를 지웠다. 에단의 진지해진 표정에 에르미온이 살짝 표정을 굳혔다.
“그래서 나더러 이제 아카데미를 떠나라고?”
“아니, 그냥 묻는 거야. 구태여 남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 순간 에르미온의 고운 이마에 선이 그어졌다.
“이유? 언제는 여기서 애들이나 가르치라며?”
에르미온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 약속이었지. 그리고 너는 생각보다 성실하게 약속을 이행했고. 여기서 더 손해를 감수하라고 할 생각은 없어. 나도 그 정도 염치는 있고.”
만일 에르미온이 이 이상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활동한다면 주변 세력들이 마탑과 아카데미를 동일시할 것이다.
에단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마탑이라는 세력을 등에 업는 순간 에단의 입지는 더욱 커지는 것이니.
하지만 에르미온과 마탑은 그만큼의 리스크를 짊어져야 한다.
“상황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신성 왕국은 성녀를 내세웠고, 제국과 카이제르는 견제를 시작했지. 여론은 점점 바뀌고 있어.”
“……나는 그 개자식들이 싫어.”
에르미온의 걸걸한 말투에 에단이 웃었다.
“맞아. 나도 그 새끼들 싫어해.”
“그래서,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생각인가?”
“장난해?”
에단의 눈살이 좁혀졌다. 에단이 서늘한 눈초리로 에르미온을 응시했다.
“너는 내가 그냥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네가 그럴 위인은 되지 못하지.”
“어, 난 당하고는 못 살아. 받은 게 있으면 그 배로 되갚아 줘야만 직성이 풀리지.”
나는 성격이 더럽다. 에단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선택해. 여기서 떠난다고 해도 아무런 불이익이나 피해는 없을 거야. 장담하지. 하지만 우리와 함께할 거라면…… 각오를 다져.”
솔직히 그녀가 아카데미에 더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마탑은 중립 지역이었지만, 대륙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세력이었다.
원활한 연구와 상업적 활동을 위해서는 제국이나 신성 왕국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었다.
에르미온이 말없이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장을 끼고 다리를 꼰 채 검지 하나만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아무런 말도 없다가 이렇게 찾아와서 선택을 강요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어쩔 수 없었어.”
“그래 그랬겠지…….”
에르미온이 한숨을 토해 냈다.
에단의 상황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짜증이 치밀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에단의 제의를 따르고 함께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자신도 잘 모르게 되었다.
“대답은 지금 해야 되나?”
“어.”
“목적이 뭔데.”
“말 못 해 줘.”
“더럽게 치사하네.”
“내가 원래 좀 치사해.”
“아, 짜증 나.”
에르미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에단과 대화를 이어 나가면 이어 나갈수록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에르미온이 입을 열었다.
“좋아, 나도 껴 줘.”
“진심이야?”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할 사람처럼 보여?”
불쾌하다는 듯 말하는 에르미온의 모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에르미온은 불같은 성격을 지녔지만, 한번 내뱉은 말을 무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 슬슬 그놈의 계획이 뭔지 말해 주지?”
“나는 제국을 굴복시킬 거야.”
“……뭐라고?”
에단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발언에 에르미온이 말을 되물었다.
“제국, 카이제르, 신성 왕국.”
에단이 상체를 숙이고 천천히, 또박또박, 선명하게 말했다.
“녀석들이 다시는 얼굴을 들지 못하게 뭉개 버릴 거라고.”
에단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 * *
렉사르와 휴고가 갈대밭을 빠져나왔다.
둘의 몸은 완전히 피로 젖어 있었다. 로미덴과 상인들은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섬뜩한 모습.
렉사르는 사슬로 누군가를 묶은 채 질질 끌고 왔다. 끌려온 녀석의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렉사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사들을 향해 포로를 던졌다.
“적당히 치료하고 살려 둬.”
기사들은 이와 같은 상황이 익숙한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포로를 붙잡았다.
포로의 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이미 반쯤 정신을 잃은 채 가느다란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렉사르가 성큼성큼 로미덴에게 다가갔다.
“이동을 재개하시오.”
딸꾹―!
로미덴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강압적인 명령조였지만 로미덴은 렉사르의 말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이동이 시작되었다.
렉사르가 품에서 수정구를 꺼내 마나를 불어넣자 에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정구 너머의 에단이 렉사르의 얼굴을 보고 눈을 좁혔다.
― 상태를 보니 뭐가 있었군.
“녀석들의 위치를 특정했습니다.”
덤덤한 보고.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 카이제르인가?
“그렇습니다.”
―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에단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제국과 카이제르, 그리고 신성 왕국이 협력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던 사실이다.
얻은 증거를 가지고 추궁한다고 한들 녀석들은 발뺌할 것이 분명했다.
렉사르는 말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에단이 입을 열었다.
― 일단 움직이고 있어. 추가적인 계획은 전달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 아, 휴고는 어때? 좀 쓸 만하지?
에단의 물음에 렉사르가 곁에서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는 휴고를 바라봤다. 묘한 표정을 짓던 렉사르가 말했다.
“예.”
짧고 담백한 한마디에 수정구 너머 에단이 피식 웃었다.
― 그래, 사이좋게 지내. 추가 전달사항 있으면 연락하지.
통신이 끊겼다. 휴고가 눈을 끔뻑이면서 렉사르를 바라봤다.
“저 좀 쓸 만한가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질문에 렉사르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냥 닥치고 걸어.”
“……넵.”
휴고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걸었다.
* * *
수정구가 꺼지자 에단은 곧장 메이를 향해 통신을 걸었다.
― ……이번에는 무슨 용무인가요?
“수인 위치는.”
― 북부 너머인 것은 확인했으나, 아직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지 못해 직원을 보냈습니다.
“그래.”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예상하던 바였다.
신성 왕국의 눈을 피해 숨어들었으니 찾기가 쉽지는 않으리라 예상했다.
에단의 본론은 따로 있었다.
“입이 좀 많이 필요해.”
― 입…… 말입니까?
“어. 최대한 소문을 넓게 퍼트릴 거거든.”
― 어떤 소문을 퍼트릴 생각이신가요?
“신의 총애를 받는 용사. 그 등장을 최대한 화려하게 알릴 생각이야.”
― ……용사요?
에단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소리에 메이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어. 대충 각본은 짜 뒀어. 이번에 한니발을 통해 최대한 판을 벌일 거야. 여태껏 없던 규모의 엘프들이 노예로 넘어갈 예정이거든.”
― …….
메이는 별다른 말없이 에단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드래곤 슬레이어이자 성검의 간택을 받은 용사가 등장하는 거지. 적당한 적들도 몇 명 추려서 준비할 예정이야.”
메이는 그제야 에단이 무슨 소리를 한 것인지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메이의 입이 벌어졌다.
― 이, 입이 필요하단 게…….
“판을 벌려. 장소는 제국의 수도. 다 뒤집어엎을 거야. 입소문이 전 대륙에 퍼져 나가도록 해야 해.”
용사의 등장을 널리 알려 줄 장치들이 필요했다. 보고를 끝마친 에단이 드레이를 찾아갔다.
드레이는 수업에 참가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에단이 따로 준비해 뒀던 흉갑을 입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나설 때야.”
“……사람들이 믿을까요?”
“왜? 못 미더워?”
“……솔직히 아직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신경 쓰지 마. 곧 있으면 실감이 날 테니까.”
에단은 드레이를 이끌고 르니엘과 헨리 네이드를 한곳에 모았다. 그러고는 계획을 천천히 설명했다.
“검은 마나는 에르미온과 내가 사용할 수 있어. 어차피 마석은 차고 넘쳐. 겉으로 보이는 외향만 최대한 음험하고 음침하게 준비하면 돼.”
“제 주특기군요.”
네이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고개를 끄덕인 에단이 헨리를 바라봤다.
“너는 숨어서 지각변동 같은 것만 일으키면 돼. 드레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게끔 효과를 만들어.”
“넵!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에단이 못미덥다는 눈초리로 헨리를 바라보다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르니엘, 너는 저번에 했던 것처럼 드레이에게 구출되자마자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또렷하고 애절하게 소리쳐야 해.”
에단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용사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라고.”
녀석이 성녀를 등에 업고 으스댔다면, 우리는 용사이자 성자를 정면에 내세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