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반격 (5)
두 손을 모아 경건하게 기도를 하던 라오나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평
상시 입던 하얀 갑주가 아닌, 순백의 사제복을 입은 라오나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보고 때문인가?”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의 공표로 신도들의 신앙심이 커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예정보다 시기가 빨라진 탓에…….”
“질문의 의도가 뭐지?”
라오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산한 시선에 기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단지 소식이 끊긴 자들에 대해서…….”
“신경 쓸 것 없다. 그 더러운 년이 아무리 입을 열고 지껄여 봤자, 공신력 따윈 없으니까.”
신성 왕국이 대륙에 끼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권력은 평민들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도들과 평민들은 신을 믿는다.
그런 그들에게 신의 의지를 설파하는 신성 왕국과 교회는 곧 신이나 매한가지다.
국가나 고위 귀족들도 신성 왕국을 적대하거나 견제하지는 않는다. 오만하고 안하무인인 귀족들도 신벌은 두려운 법이었다.
병자를 치유하고 악을 멸하는 신성 왕국은 모두의 경외와 신뢰를 받는다.
그런 신성 왕국이 최근 성녀를 공표했다. 적게 잡아도 수백 년 만에 등장한 성녀였다.
신성 왕국의 지도자인 교황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신의 뜻을 전달받는 대행자.
신도들은 성녀의 등장에 감복했다.
신의 대리자인 성녀에게 신실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엄청난 기부금을 보내왔다.
모인 자본금이 커지고, 신도들이 많아질수록 신성 왕국은 더욱더 부강해졌다.
“……하지만 레미아가 점점 정신을 되찾는 비중이 높아집니다.”
성기사의 말에 레오나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성녀의 공포를 늦춘 이유.
그것은 레미아가 그들의 통제를 계속 벗어나려 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드는 말없이 성기사를 응시했다. 생각을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마치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선에 성기사는 설명할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
고저 없는 목소리.
레오나드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무감정한 목소리기에 더 큰 공포가 느껴졌다.
성기사가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 책망하려고 질문하는 게 아니야. 너의 의도를 묻는 거지. 시기가 앞당겨진 건 맞아. 만전을 기한 상황은 아니었지.”
여러 가지 외부 요인이 있었다.
도망친 성자, 힘을 잃은 레벨린, 점점 세력을 넓히고 입지를 세워 나가는 블란테, 그리고 1황자의 요구.
신성 왕국 입장에서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성자를 탈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블란테와 결탁했다면…….”
성기사의 말을 듣던 라오나드의 눈에 경멸이 서렸다.
“그깟 반쪽짜리 말인가? 그 정도 신성력은 사제들 중에서도 널리고 널렸어.”
라오나드는 드레이를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머리색을 바꾸고, 숨어들었다고 한들 신성 왕국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대륙 그 어디에도 신도들은 있었으니.
하지만 신성 왕국은 드레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레벨린은 모든 세력을 잃었고, 아카데미는 이제 블란테의 손에 떨어졌다.
하지만 라오나드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는 드레이의 신성력과 잠재력을 알고 있었다.
드레이는 성기사장인 자신보다도 못한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다.
‘성자라고?’
그 고귀한 이름을 가져다 대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순하고 불경하다.
라오나드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지자 성기사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용서는 내가 내리는 게 아니다.”
라오나드는 무심하게 말한 뒤 몸을 돌렸다. 드레이가 가진 가치는 성녀의 오빠라는 것.
그게 전부였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그 녀석들은 곧 고립될 테니. 그렇게 되면 레미아 님도 안정을 되찾을 거야.”
성녀, 레미아는 오빠인 드레이의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온전한 신의 대행자로서는 걸맞지 않은 모습이다. 성녀는 언제나 숭고하고 고고해야만 한다.
그래야만이 신도들은 성녀에게 경외심을 갖는다. 그들은 감정에 휘둘리는 성녀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뚜벅뚜벅.
라오나드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넓은 교회에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라오나드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 * *
“판을 벌인다.”
에단이 르니엘과 헨리, 드레이를 소집했다. 드레이는 판을 벌인다는 에단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판을 벌인다고요?”
“그래. 너도 알고는 있지? 녀석들이 성녀를 공표한 거.”
“…….”
드레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다문 드레이의 표정은 침통했다.
동생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수많은 감정이 뒤엉켰고,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생각해.”
에단은 입을 다물고 있는 드레이에게 물었다. 에단은 거리낌 없이 드레이의 역린을 건드렸다.
“……질문의 의도가 뭐죠?”
“말 그대로야 네 생각이 어떠냐고.”
거듭되는 에단의 물음에 드레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몰라서 묻습니까? 좋을 리가요.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새끼들 손에 붙잡혀 끌려가는 레미아의 얼굴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끌려가던 동생의 모습.
드레이는 겁에 질린 채 울던 동생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동생을 구하기는커녕, 간신히 혼자 몸을 빼내는 것이 할 수 있던 전부였다.
드레이의 얼굴이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다.
에단은 무심한 눈으로 드레이를 응시했다.
“그래서, 너는 지금 어떻게 하고 싶지?”
드레이의 감정 따위는 배려치 않은 질문이 연속되었다.
이를 악문 드레이는 매서운 눈초리로 에단을 노려봤다. 에단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드레이의 몸이 옅게 떨렸다.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고요하고 깊은 에단의 동공에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
드레이가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자 에단은 재차 물었다.
“묻잖아. 어떻게 하고 싶냐고.”
담담한 목소리에서 에단의 노기가 느껴졌다. 드레이는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복수하고 싶습니다.”
“누구한테.”
“그 엿 같은 신성 왕국 새끼들한테요. 애당초 원해서 얻은 힘도 아니었습니다.”
드레이에게는 신실한 신앙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경하게도 이 힘을 내려 준 신에 대한 원망만이 드레이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드레이의 대답을 들은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러면 해야지. 나도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거든.”
성녀의 공표, 그리고 습격, 상대는 민심을 이용해 공격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에단도 같은 방식으로 응수할 생각이었다.
“그 검.”
에단이 턱짓으로 드레이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아슬란을 가리켰다. 화려함 따위는 보이지 않는 수수한 모습이었다.
“일단 그것부터 손보고.”
성자가 쥘 성검이 될 것이니, 그에 걸맞은 화려함을 갖춰야 했다.
“녀석들이 성녀를 공표한 만큼, 우리도 성자를 내세워야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냥 무턱대고 신성력을 표출해 봤자…….”
드레이의 우려 섞인 말에 에단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누가 그냥 이대로 내보낸다고 했나? 당연히 사전에 밑 작업을 해 둬야지.”
이미 그림의 구상은 시작되었다. 에단이 르니엘과 헨리를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 * *
에단은 드레이에게서 아슬란을 받은 후 곧장 대장간으로 향했다.
대장간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드워프와 블란테의 야장들은 이미 친밀한 관계를 넘어 호형호제를 하고 있었다.
자존심 높은 장인들이었지만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배워 나갔다.
에단이 대장간에 들어서자, 드워프들과 야장들이 에단을 반겼다.
“의뢰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간 에단은 아슬란을 맡겼다.
검신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억겁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녹이 슬기는커녕 빛바램조차 없는 검이었다.
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대륙의 몇 없을 명검일 것은 분명했다.
에단이 검을 건네자, 드워프들과 야장들이 눈을 빛냈다. 검집을 제작하면서 봤던 기억은 있지만, 다시 봐도 놀라운 수준의 명검인 것은 분명했다.
장인이 열의를 불태울 만한 검이 바로 아슬란이었다.
“이 검의 모습을 좀 건드렸으면 합니다.”
“이걸 건드리란 말씀입니까?”
장인들은 묘하게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이 검은 비록 겉모습은 수수했지만, 손댈 곳 없이 완벽한 검이었다. 그런 검을 임의로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예, 이 검의 모습을 완전히 바꿨으면 합니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단이 가문의 야장들에게 무언가를 의뢰할 때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존대를 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 내포된 의미는 강압적이었다.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가문의 야장들은 에단의 굳은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손을 보면 되겠습니까?”
“지금 이 상태에서 최대한 외향을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전설의 용사가 휘두를 만한 성검처럼 최대한 화려한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검집도 물론 그에 걸맞은 모습이어야 하고요.”
“……겉모습만 건드리면 되는 겁니까?”
“예. 검의 내구도, 예리한 칼날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외향. 외향만 완전히 탈바꿈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의뢰. 하지만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경험 많고 노련한 야장들과 드워프들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에단의 의뢰를 끝마쳤다.
아슬란을 받아 든 에단은 감탄했다.
아슬란은 이제 이전처럼 수수한 모습의 검이 아니었다. 바뀐 것은 대부분 검의 자루 부분이었지만, 전설의 성검답게 아름답고도 화려했다.
같이 건넨 칼집도 여러 문양들이 새겨져 있어 고풍스럽고 경건함이 느껴졌다.
에단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상상 이상이군요.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우리는 가문의 장인들입니다. 의뢰할 것이 있으면 편하게 명령하셔도 됩니다.”
에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야장들에게 인사하고 떠났다. 에단은 드레이에게 아슬란을 전했다.
드레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아슬란을 받아 들었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검을 쥔 드레이의 눈이 순간 커졌다.
“이 검…….”
드레이의 주위에 신성력이 넘실거렸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 맞아.”
“왜 이런 모습이…….”
“넌 이제 성자이자, 용사가 될 거야. 시각적인 모습이 주는 이미지를 무시하지 마.”
“……대체 무슨 계획을 세우고 계신 거죠?”
“판을 키워야지.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만큼.”
에단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