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화] 반격 (4)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렉사르와 휴고는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들에게 있어 둘은 재앙과도 같았다.
전력의 차이는 확연했고, 그들은 감히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생명이 허무하게 바스라지고 있었다. 자부심을 갖고 평생을 일궈온 검술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갈대밭이 붉게 물들었다.
피 냄새에 찌든 뇌는 전의를 불태우지 않고, 생존 본능만 차올랐다.
주춤.
칼자루를 쥔 손이 축축하게 젖었다. 숨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것 같았다. 죽어 가는 이들의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동료를 돕기 위해 달려들어야 했다. 알고 있지만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
허무한 말로가 예상되었다.
기사는 죽음을 각오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장소에서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노략질이나 하는 도적 패인 채로 죽으라고?’
이건 아니다.
그들이 선망한 기사는 그 누구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존재였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위해 목숨을 불사르는 검.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명예로운 죽음이오, 기사의 삶이었다.
한데 이게 뭐란 말인가?
명령이기에 따랐다. 주군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도 명예롭지 않은 일인 것은 분명했으니.
내키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즐기기도 했다. 약자 앞에서 힘을 과시하는 행위 자체는 우월감을 충족시켜 줬으니.
이번에도 크게 다를 바 없으리라 생각했다.
습격에 앞서 계획을 수렵했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최대 규모의 행상이었다. 그럼에도 호위 인력은 없는 수준이었다.
의뢰를 받은 용병도, 기사도 없는 상인뿐인 행렬. 그야말로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럼에도 만약을 대비해 평소보다 많은 인력을 준비했다. 몰살시킬 계획은 아니었지만,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자그마치 두 개의 기사단이 투입되었다.
기사들은 모두 마나를 다룰 줄 알았고, 이 정도의 정예 인력이면 어지간한 영지의 병력과 전면전을 치르더라도 승산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물며 대부분이 검을 쥔 적도 없는 상인 나부랭이라면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거저먹기와도 같은 작전에 긴장은 느슨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여유를 부린 만용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맹수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먹잇감을 기다리던 그들은 단 한 순간에 입장이 바뀌어 먹잇감이 되어 버렸다.
“크하하하!”
렉사르가 광소를 터트렸다. 피 냄새는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휴고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지고 흉포해졌다.
그들은 살면서 이러한 공포를 겪은 적이 없었다.
가주의 위압감과 기사단장의 엄격함은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었지만, 죽음을 앞둔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본능에 각인된 공포.
맹수를 마주한 지금, 제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수도 없이 검을 휘두르며 각오하고 다짐했지만 지금은 의미를 잃었다.
“나, 난 도망갈래…….”
뒷걸음질을 치던 기사 하나가 동료를 내팽개치고 몸을 돌렸다.
기사라면 목숨과 같이 소중이 여겨야 할 검을 놓고 복면을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생존을 위해 전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촤르르르륵!
하지만 렉사르는 먹잇감이 도망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슬낫은 섬뜩한 소리를 내며 도망치는 이의 목을 절단 냈다.
툭. 데굴데굴.
“…….”
기사는 넋이 나간 얼굴로 바닥을 구르는 동료의 머리를 응시했다.
뭐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터벅 터벅.
선명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뻣뻣한 고개가 돌아간다. 고개를 돌리면서도 전신이 파들거리며 떨린다.
각인된 두려움이 마주보는 것을 꺼려지게끔 했다. 하지만 결국 기사는 고개를 돌렸고, 샛노란 짐승의 눈을 마주했다.
모든 동료가 죽었다. 기사는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넋이 나간 기사의 모습을 보며 기괴한 웃음을 흘린 렉사르가 사슬낫을 들었다. 피를 잔뜩 머금은 사슬낫은 요사스러운 예기를 흘리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무섭지?”
질문하는 렉사르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주저앉은 기사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 모습에 렉사르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애송이, 내가 어떻게 본거지를 터는지 궁금하다 했지?”
“……네?”
“잘봐 둬.”
촤르르륵.
렉사르의 사슬이 자아가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사슬은 기사의 몸은 순식간에 휘어 감았고, 기사는 꽁꽁 묶인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렉사르는 완전히 움직임이 제약당한 기사 앞에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섬광같이 손을 뻗어 기사의 턱 근육을 붙잡았다.
“가끔 혀를 깨물거나 하는 녀석들이 있어. 혀를 깨문다고 즉사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꽤나 귀찮아지지.”
“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렉사르와 수긍하는 휴고.
둘의 대화를 들은 기사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렉사르의 형형한 눈이 기사의 몸을 뱀처럼 훑었다.
“왜? 무서워?”
고저 없는 목소리.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기서 강인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렉사르의 샛노란 눈앞에서는 마치 발가벗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쫄 거면 건들지를 말았어야지.”
렉사르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노기 서린 감정은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느껴졌다.
“어디서 왔지?”
“…….”
마지막 자존심일까, 기사는 겁에 질렸지만 체념한 눈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렉사르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대부분은 이런 반응이야. 정보를 토해 내도 살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면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지.”
웃음기가 가득한 어조. 마치 장난감을 발견한 것 같은 천진한 미소였다.
“큭큭큭큭큭.”
렉사르는 거칠고, 기괴하고, 섬뜩한 미소를 흘렸다. 렉사르가 턱을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말 안 해도 돼. 상관없어. 오히려 쉽게 말하면 재미가 없지. 너는 귀, 코, 눈, 입술, 이빨, 손톱, 손가락, 팔, 다리. 어떤 게 좋은 것 같아?”
꽈아아악.
턱을 쥔 손에 힘이 더 강해진다. 턱에서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사의 떨림이 더욱 거세졌다.
“이건 말하는 게 너한테 좋을 거야.”
렉사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사미라는 다시 채비를 갖췄다.
낡은 천 흉갑과 세월의 흔적이 느껴져 허름한 가죽 벨트, 그리고 그 위에 갖은 도구들을 착용했다.
그러고는 평생을 함께해 온 거대하고 투박한 양날 도끼를 들었다.
최근 아카데미의 야장에게 정비를 맡겼더니 과거의 자태를 되찾았다. 반평생을 함께해 온 양날 도끼는 서늘한 예기를 빛내고 있었다.
등에 걸자 묵직한 중량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도끼를 등에 거는 순간,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챙길 건 적당히 챙긴 것 같아, 이대로 방을 나가려던 사미라의 눈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
묘한 빛을 뿜어내는 흑사자의 문양. 사미라는 말없이 그 인장을 바라보다 품에 챙겼다.
‘너는 이제 블란테의 일원이다.’
에단의 말이 떠올랐다.
원해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태생은 용병이었다. 평생을 거칠게 살아왔고, 그렇게 사는 법만 배웠다.
여자의 몸으로서 용병들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입도 자연스럽게 거칠어졌다.
그런 사미라가 속할 장소는 용병들의 세계와 다비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다.
‘거친 걸로 따지면 그 녀석만 한 게 없지만.’
순간 에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살면서 그렇게까지 걸걸하고 포악한 귀족은 처음 봤다.
피식 웃은 사미라가 블란테의 인장을 만지작거렸다.
금속의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피식 웃은 사미라가 품에 챙겨 놓고 문밖을 나섰다.
‘……일단 거기로 가 볼까.’
사미라가 처음 용병 생활을 시작했던 장소.
방랑자들의 쉼터.
그곳으로 향할 계획이다.
* * *
“수업 끝이다.”
에단의 말과 함께 학생들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에단은 학생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간만에 수업을 진행했다. 말로 전달받는 것보다 직접 아카데미의 분위기를 체험하는 게 빠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수업은 평소처럼 진행했다. 학생들의 모습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너무 오랜만에 수업을 하는 게 아니냐는 아우성은 있었지만, 에단은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
그 와중에 유독 건방진 시선이 느껴져 봤더니, 리사가 얇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에단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수업 내내 리사만 집중적으로 굴렸고, 그 탓에 리사는 탈진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에단이 문 밖으로 나서자 학생들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드르륵.
에단이 훈련장의 문을 닫았다. 문을 닫는 순간 에단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확실히 말은 돌은 모양이군.’
학생들이 소식을 전달받지 못했을 리 없었다. 에단은 학생들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
에단은 수업을 하며 드레이를 집중적으로 주시했다.
드레이는 다시 반에 잘 녹아든 것 같았지만, 묘하게 떠돌고 있었다.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것이다.
‘……슬슬 준비를 해야겠어.’
신성 왕국이 드레이에 대한 소식을 전달받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녀석들도 아카데미를 압박하는 것이다.
에단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수정구를 통해 메이와 연결했다.
[에단 님?]
“어.”
에단은 형식적인 대화 대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상황은 어때.”
[……좋지 않습니다. 저희도 총력을 동원하고 있지만, 제국이 너무 방대한 터라…….]
“그래 그렇겠지. 그건 됐고, 말했던 건 어찌 됐지?”
[페온이라는 자에 관한 것 말씀입니까?]
“어.”
[……정보가 없습니다. 기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훼손시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작위적입니다.]
메이의 말을 들은 에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작위적이라고?”
[네. 더 기록을 찾아본다면 무언가 건지는 게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됐어. 그럼 거기까지만 해.”
페온의 관한 정보도 중요했지만, 지금 신경을 쏟아야 할 건 그게 아니었다.
“신성 왕국은 지금 뭐 하고 있어?”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각국에 설치된 교회를 중심으로 블란테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저희 측이 최대한 무마하려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시민들이 교회에 가지고 있는 신뢰 탓에…….]
“그렇단 말이지…….”
에단이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틀어막아 봤자 의미 없어. 다른 거에 집중해.”
[그럼 어떤 것에……?]
“수인. 수인족에 관한 정보. 녀석들의 위치를 알아봐.”
아무래도 수인족을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