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반격 (3)
“지시 사항을 끝냈습니다.”
“그래.”
측근 기사의 보고에 무심한 눈으로 대답한 크리스토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측근 기사는 경직된 얼굴로 묵묵히 서 있었다.
이내 흐릿한 동공이 형체를 되찾았다. 푸른 눈이 기사를 응시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나?”
“……네?”
“아, 됐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솔직히 궁금합니다. 아무리 상대가 블란테라고 해도 지금과 같은 전방위적인 압박을 견뎌 낼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토의 지시를 수행한 것은 측근 기사였다.
그렇기에 제국이 아카데미와 블란테를 향해 어떠한 조치를 취했고, 취하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피식 웃음을 흘린 크리스토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아무리 블란테가 무력이 강하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전면전을 치르면 모든 걸 잃을 테니까.”
“그러면 방도가 없는 게…….”
“글쎄,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크리스토는 웃음기를 머금었다. 아직도 에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권좌에 앉아 수많은 이들을 발아래로 내려다보면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감각이었다.
‘동질감?’
느껴 본 적이 없기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토가 입꼬리를 올렸다. 만일 동질감이 맞다면 그는 결코 이대로 당하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 * *
“후우.”
이번 행상을 맡은 로미덴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마차의 행렬을 바라봤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규모의 행상이었다. 규모로만 따지면 전쟁 보급과도 맞먹을 정도였다. 규모가 규모인 만큼 인력도 엄청나게 동원되었다.
움직이는 상인들과 잡일꾼들만 합해도 수십에 달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로미덴은 이번 행상에서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제기랄.’
로미덴은 상인으로서 최근 대륙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타깃이 블란테와 연관된 모든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근 한니발 산하의 상인들은 막대한 재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한니발이 그 피해를 메우고 있었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한계를 맞이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 규모의 물자이동을 강행한다고?’
벌써부터 불안감이 들었다. 심지어 목적지는 아카데미를 경유한 후 블란테를 향한다. 사실상 습격은 예정된 미래라고 볼 수 있었다.
로미덴도 우려를 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미덴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아직 구해진 용병은 전무…….’
로미덴의 눈이 착잡했다. 가뜩이나 용병들이 기피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대규모 행상의 의뢰를 맡을 용병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의뢰나 마구잡이로 수락하는 드잡이들에게 의뢰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
‘한니발 님께서는 따로 경호를 맡길 사람이 있다고는 하셨지만…….’
불안감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결국 죽으면 모든 게 끝이었다.
“로미덴 님, 곧 있으면 출발 시간입니다.”
“……알고 있어.”
후우.
로미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니발이 말한 이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상태 점검하고, 일단은…… 대기한다.”
“알겠습니다. 어, 저기 오시는 분들…….”
부하 직원이 정면을 가리켰다. 지평선으로부터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신다는 호위가 저분들 아닙니까?”
“……설마 저게 전부야?”
로미덴이 믿을 수 없다는 어투로 말했다. 멀리서 드러나는 윤곽을 봤을 때 보이는 숫자는 고작 대여섯밖에 되지 않았다.
‘저 숫자로 이 기나긴 행렬을 모두 지키겠다고?’
로미덴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가오던 자들이 가까워졌다.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린 자들이었다.
터벅.
개중 한 명이 로미덴 앞에 서자 로미덴은 결심했다.
‘이번 행상은 포기해야 한다.’
막대한 물자가 모인 터라 이대로 상행을 물린다면 손해가 막심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결과가 보이는 미래에 목숨을 배팅할 머저리는 없다. 모든 상인은 돈을 추구하지만 돈 위에는 목숨이 있는 법이다.
‘고작 다섯한테 모두의 목숨을 걸 수는 없다.’
이 선택으로 한니발에게 버림받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결단을 내린 로미덴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로미덴의 눈은 굳은 결의로 차 있었다.
“이보시오.”
로미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권위를 담아 말했다. 그러자 후두를 눌러쓴 무리 중 선두에 있는 자가 로미덴 앞에 섰다.
“……네가 로미덴인가?”
후드 사이에 드러나는 샛노란 안광이 번뜩였다. 로미덴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 딸꾹질을 했다.
쇠를 긁는 것 같은 섬뜩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왜 답이 없지? 내 말이 우습나?”
렉사르의 연이은 질문에 로미덴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아, 아닙니다. 제가 로미덴 맞습니다.”
“…….”
렉사르는 로미덴과 주변의 상인들을 찬찬히 훑어본 뒤 말했다.
“이번 행상의 경호를 맡았다. 우리들의 이름은 알 것 없고…… 출발은 언제 할 예정이지?”
“본래라면 지금…….”
“그럼 지금 출발해.”
갑을이 뒤바뀐 것 같은 강압적인 어투. 하지만 로미덴은 그것을 지적할 수도, 불쾌함을 내색할 수도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빠, 빨리 준비들 해!”
오히려 다른 직원들에게 윽박을 지른 로미덴은 행상에 섞여 들어갔다.
짧은 소란과 함께 긴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상인과 직원들 모두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여정을 함께하는 이들의 숫자가 고작 저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는 상황이다.
렉사르와 휴고, 그리고 추가로 붙은 기사들은 대열에서 조금 떨어진 채 천천히 따라붙었다.
일상적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저 지척에서 묵묵히 행렬을 뒤따랐다.
결국 내리깔린 침묵의 어색함을 이겨 내지 못한 휴고가 입을 열었다.
“저, 저기……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조심스러운 질문에도 렉사르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묵묵히 발을 옮겼다. 슬슬 눈치를 살피던 휴고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렉사르의 노란 눈이 휴고를 응시했다.
“……말해라.”
“앗, 감사합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벙한 미소를 흘리자, 렉사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면 그냥 닥치고.”
“그,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조금 궁금해서요.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건 습격 이후 대처 때문에 저희를 보내신 거 아닌가요? 본거지까지 알아내라고.”
“……그래서.”
“근데 딱히 준비한 게 없는 것 같아서요. 그냥 이대로 습격만 기다리면 끝인가요? 저도 뭔가 마음의 준비를…….”
휴고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횡설수설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렉사르가 피식 웃었다.
“필요 없다.”
“……네?”
“필요 없다고. 너는 동물들이 특별한 교육을 받는다고 생각하나?”
“…….”
“본능에 각인되어 있을 뿐이야. 너도 알 텐데.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감각, 겁에 질린 냄새, 흔들리는 동공. 본거지의 위치? 잡힌 놈들이 불어도 그만, 안 불어도 그만이야. 결국은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어. 사냥감이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말한 렉사르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눈을 돌려 휴고를 응시했다. 휴고는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너는 할 수 있어. 준비가 필요하다고? 그딴 것보다 한 번의 실전이면…….”
렉사르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휴고는 렉사르가 어째서 말을 끊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발걸음 속도가 느려졌다. 감각이 예민해진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선명하게 느껴진다. 피부가 저릿했다. 스쳐 가는 바람에서 묘한 누린내가 풍겨 온다.
“……역시 너는 이미 알고 있어.”
렉사르가 톱날 같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휴고의 동공은 어느새 짐승의 것처럼 좁혀져 있었다.
몸이 달아오르며 입에서 흘러나오는 입김이 눈에 보였다.
“……적입니다.”
휴고의 목소리에 다른 기사들이 움찔하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렉사르가 그들을 힐긋 바라보며 명령했다.
“……너희들은 여기를 지켜.”
그러고는 씨익 웃었다.
“둘로도 과분하니.”
렉사르가 품에서 사슬낫을 꺼내고는 순식간에 쏘아져 나갔다. 렉사르가 뛰쳐나가는 순간 휴고도 곧바로 그 뒤에 따라붙었다.
타다다닷!
엄청난 속도의 질주.
히이이이잉―!
감각이 예민한 말들이 겁을 집어먹었다. 마차를 이끌던 마부들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얘들이 갑자기 왜 이러지?”
한두 마리의 말들만 그러는 것이 아닌, 행렬을 따르는 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그러한 반응을 보였다.
“어, 저기…….”
상인 하나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가리킨 장소에는 갈대가 가득했다. 그곳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아악!”
“죽여!”
단둘이서 적진에 뛰어들었지만, 렉사르와 휴고는 미쳐 날뛰고 있었다.
본능에 의한 움직임.
동작에는 형식 따위가 없었다. 휴고와 렉사르의 샛노란 눈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초인적인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은 적들의 모든 공격을 허사로 만들었다.
씨익.
렉사르의 미소가 만개했다.
피와 살이 튄다. 주위에 먹잇감들이 가득했다. 적들의 수준은 낮지 않았고, 체계적인 훈련과 연계가 느껴졌다.
그렇기에 활력을 느꼈다. 너무 손쉬웠다면 아무런 재미도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크흐흐흐…….”
렉사르가 꺼림칙한 미소를 흘렸다.
사슬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뱀처럼 움직이는 사슬이 먹잇감을 집어삼켰다.
끝에 달린 사슬이 시퍼런 오러를 머금고 있었다. 사람의 신체 부위가 숭덩숭덩 썰려 나간다.
오직 렉사르가 서 있는 장소만이 폭풍의 눈처럼 안전했다.
반대로 휴고는 기민하고 민첩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상대는 휴고의 움직임을 쫓지도 못했다. 휴고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였다.
콰직!
공중제비를 돌던 휴고의 손이 적의 목을 도려냈다. 피가 분수처럼 피어오르며 시체가 허물어진다.
“이 개새끼가!”
허물어지는 동료의 시체를 보고 격분한 이가 검을 치켜든 채 달려들었다.
순간 휴고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휴고라도 공중에서는 행동이 제약되기 마련이었다.
휴고에게 달려드는 자는 총 셋.
빈틈을 주지 않는 완벽에 가까운 합공이 들어올 때.
휴고의 눈빛이 돌변했다.
크르르.
휴고의 입에서 짙은 흉성이 흘러나왔다. 손톱이 짐승의 것처럼 길어지고 송곳니가 날카로워졌다.
휘리리릭!
어느새 휴고의 손에는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휴고가 한 바퀴 회전하자 달려들던 이들이 순식간에 갈려 나갔다.
갈대밭이 피로 물들며 전세가 순식간에 기울었다.
휴고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멈춰 섰다.
덜덜덜.
칼을 쥔 손이 떨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이, 이건 아니야…….’
이렇게 죽으면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서는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킁킁.
휴고와 렉사르는 겁쟁이의 냄새를 누구보다 빠르게 잡아냈다. 둘의 황금빛 안광이 스산하게 빛났다.